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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제주도에서 육지(한반도)로 이동할 때 가장 불편한 지역은 어디일까? 강의할 때 청중에게 물어보면 답하는 이가 별로 없다. 나도 제주에 사는 친구에게 듣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얼마 전 어느 마을 공동체 강의에서 한 여성이 답을 맞췄는데, 강의 후에 주최 측이 그녀가 장애아를 키우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이동권(移動權) 전문가일 것이다.
제주도에서 출도착이 가장 불편한 도시는 '교통의 요지'인 대전이다. 공항이 없기 때문이다. 가까운 공항은 청주공항이나 김포공항이다. 둘 중 하나를 거쳐 다시 버스나 기차로 이동해야 한다. 선박을 이용해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가는 사람은 자기 경험과 거리 개념이 일치한다. 인식론적 혼란이 없다. 이때 사람들은 세상과 자신이 일치한다고 느낀다.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거나 의문을 제기하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든 위치에 서게 된다. 익숙하고 당연하니 별 생각 없이 살면서 자기 경험이 보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그저 서울에 산다는 사실뿐이다. 우연히 얻은 기득권과 이 사실에 대한 무지가 몸과 생각이 편안한 이유다.
이에 반해 실제 거리와 이동 거리, 체감 거리가 모두 불일치하는 경우 객관적 거리 개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불편을 당연시하거나 알아도 체념하는 경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이렇게 산다. 두 번째, 서울 중심주의로 인한 교통의 불편함 그리고 이 불편에 대한 서울 중심적 해석("자연스러운 일이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저항 의식과 체념의 공존, 이러한 분열은 당연하고 건강한 상태다. 세 번째는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질문을 다른 차원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다.
'서울', '대전', '제주'(-) 이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비유와 상징이다. 이 글은 주류와 비주류, 소수와 다수의 경계는 항상 흔들리고 다시 그어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누구도 어딘가에 영원히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이다. 거리(장소, 공간……) 개념은 '킬로미터'라는 수치가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산물이다. 위 사례는 우리가 객관성(과학, 중립, 보편, 사실……)과 관련한 인식 제반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성이나 여성주의에 무관심하면서도 '여성주의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면서 뭔가를 주문하고 지도하려는 여론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여성의 권익 요구에만 '머물지 말고' 사회 전반에 걸쳐 약자의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언설이다. (하지만 실제 여성주의 실천이 이런 방식으로 나아간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극렬'하게 반대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방식은 일상과 제도, 몸, 역사 모든 분야의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의 요구(?)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보다 더 심각하다. (-) 이 사례를 성별 범주와 구별되는 지역이라는 모순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제주도 사람'의 목소리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모든 곳에 소속되어 있다. 이 경우 제주 도민의 입장이기도 하고 제주 여성의 입장이기도 하다. 제주 여성은 제주 도민이 아닌가? 제주라는 범주와 여성이라는 범주는 배타적이지도 않고 독립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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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은 그것의 구조와 원인, 역사를 규명하려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때리는 사람은, "왜 그랬을까?"와 같은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고, 맞는 사람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대상이 사람이든 이데올로기든 조직이든, 더 헌신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열정이 지나간 뒤의 황폐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왜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열정적인 사람이 상처받는지에 대해 분개했다. 이것이 그 어떤 이념으로도 설명되지 않은 인생의 근원적인 불합리이고, 부정의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처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언어가 자란다. '쿨 앤 드라이', 건조하고 차가운 장소에서는 유기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 조건이다. 상처가 클수록 더 넓고 깊은 세상과 만난다. 돌에 부딪친 물이 크고 작은 포말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벽에 닿으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알게 된다. 이처럼 앎은 경계와의 만남에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