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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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판의 변론을 맡았던 당시에 나는 장정일이 던진 화두를 제대로 풀지는 못하였다. 검사가 소설이 명백히 음란하다고 주장하고, 판사도 음란물을 버젓이 내놓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가둬놓은 상황에서, 나는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소설이 왜 음란하지 않다는 것인지 해답을 찾아야 하였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음란'과 '예술'의 개념 사이에서 헤매인 과정이 그에 대한 변론과정이었던 듯하다.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성묘사로 가득 차 있고, 장정일 스스로 "자기모멸을 위하여 포르노의 양식을 빌어왔다"고 밝힌 작품을 눈앞에 두고 음란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명제와 한참을 다투어야 하였다.


(-)


육체는 성적으로 다루어질 자유를 가지며, 예술을 포함해서 사회의 모든 외설적 성표현물을 모조리 금기시할 수는 없다. 범죄적 수준의 반사회성을 띠는 경우에 해당하는 성표현물들로 국한된다. 이 점에서 외설과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은 의미가 달라진다.


소설은 법이 보호하는 예술의 자유의 보호영역에 속하고, 예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은 현실을 반성하고, 현실의 보이는 것 그대로를 회의하고 정체를 뒤집어 보는 실험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적 실험은 본질적으로 기존 가치, 질서와의 충돌을 내포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이 지니는 하나의 본질적 기능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술은 사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외설적인 성표현물이라 하더라도 예술에 해당한다면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반사회적 범죄의 소산이라 할 수 없어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할 수는 없다.


(-)




그러나 성도덕에서 특히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법원이 음란성에 대한 평가에서 나와 같은 견해를 취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변론기는 '음란'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과, 예술의 개념을 두고 무언가 산뜻하게 해명되지 않는 해답을 찾아서 도리어 나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는 하나의 질문지 수준에 그쳤던 듯하다. 법원은 1997년 7월 23일 변호인의 보석허가청구를 받아들여 장정일을 석방하였다. 그는 1998년 2월 18일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았다. 상고심인 대법원은 2000년 10월 27일에 이르러 변호인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대법원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이라 함은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침해하기에 적합한 것을 가리킨다"고 정의를 내렸다. 또한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고,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법원은 장정일 소설의 3/4 이상이 *섹스, **성교, **성교[알라딘 서재 금지어 문제로 가림표 처리함], 가학 및 피학적인 성행위 등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묘사 방법도 노골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러한 묘사부분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 사건 소설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고, 특히 38세의 유부남과 18세의 여고생이 벌이는 괴벽스럽고 변태적인 섹스행각의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소설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된다고 판단하였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관한 나의 변론이 외설(음란)이지만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형법에서 말하는 반사회적인 음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로 요약된다면, 법원의 결론은 후자에 해당될 정도로 음란하다는 것이다. 법원이 취하고 있는 음란성 판단기준대로 성적 수치심과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해치는 성표현물이 반사회적인 '음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설이 음란한가 아닌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성적 수치심과 도의관념의 수준에 달려 있게 된다.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부도덕하다고 여기면 소설은 음란한 것이지만, 같은 소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정도로 느끼지 않는다면 음란한 것은 아니게 된다. (-) 외국의 경우에는 포르노그라피 자체를 내용의 강도에 따라 분류한다든가, 사회적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기준으로 도입하는 시도들을 하고 있으나, 그 분류의 기준, 가치여부를 따지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음란성 판단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무엇을, 어느 수준에서 음란하다고 느끼는가 하는 심정적 수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




소설이 음란한 것인지 여부에 관한 화두의 대답은 처음부터 장정일 자신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과 섞임에 대하여 투명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감싸는 문체의 수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뢴트겐 사진을 펼쳐 보이듯 제시한다. 손바닥을 펼쳐보인 그의 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음란성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국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소설을 처벌한다.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장정일의 책임이 아니지만, 소설 자체가 음란한 것도 아니지만, 그와 같은 원인을 제공하려는 행위를 차단하려는 국가의지에 대하여 장정일은 거리를 두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계속 취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음란성이 소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음란하다고 죄를 묻는 재판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음란하지 않았고, 그 재판은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형법으로 재구성하는 문제였으므로 그가 개입하여 소설을 변명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신을 비하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


1심 재판의 최후진술과정에서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법원을 멸시하거나 저항하는 것도 아니며, 법원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의 병존적 상황이었다.


(-)




사람의 사회는 그침없이 변화하고 무엇 하나 고정된 것 없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불안하고, 그러나 모여살기 위하여는 안정과 정착이 필요하므로 일정한 질서와 통제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래서 불안과 안정성의 지향이 항상 이중적으로 존재하고 충돌하는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통제의 집중과 과도함으로 탄생한 국가권력의 억압성이 문제되어 왔다. 권력통제의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대상은 개인의 몸이다. 개인의 몸을 길들여야 순종하는 정신이 따라오고 질서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권력과 개인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며 충돌하는 전장은 바로 개인의 육체 그 자체가 된다. 고문·학살·의문사와 같은 언어군은 이러한 육체에 가하여지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통제를 표현하는 상징들이다.


육체는 권력에 길들여져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성의 관계망과 육체의 자유를 표현하는 쾌감은 철저히 통제될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 장정일은 이 세계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깨어 있는 정신으로 바로 그 뇌관을 건드린 우리 시대의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우리 사회 호칭의 복잡한 권위적 구조, 性器를 공개적으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은폐성을 생각해 보라─, 가능한 한 육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놓여 원하고 충족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타인의 육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며, 삶에 지친 몸을 달래는 모든 사람이 밤마다 혼자 잠들면서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앞선 사람인 작가로서 그와 같은 꿈에 도전한 장정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모든 장정일을 위하여 나는 변론하고 싶다.




_강금실_장정일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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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퀴어 -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박차민정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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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목격한 "기괴한" 장면이란 역전에서 중년의 노동자가 더벅머리 총각의 손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가가서 귀를 기울여보니 중년의 남성은 젊은이에게 가지 말라고, 갈 거라면 하룻밤만 더 놀다 가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차상찬은 이 장면을 보고 "동성애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모르는 척 그 노동자에게 사연을 물었다. 중년의 노동자는 서슴없이 그 더벅머리 총각이 자신의 '미동'이며, 3년을 같이 지내다 오늘 타향으로 떠나게 돼 작별을 위해 정읍역에 나왔다고 답했다. 통계조사라는 근대적 지식을 통해 조선 민족의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을 구하고자 했던 이 계몽주의적 지식인은 두 남성의 애틋한 모습을 웃음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할 기이한 광경이라고 기록한다. 그러고는 곧 두 남성의 친밀성을 착취당하는 “가련한 조선 농민”의 서사 속에 다시 배치한다. 마흔이나 먹은 이 빈궁한 노동자가 부자 놈들처럼 아름다운 기생이나 첩의 향내를 맡지 못할지언정 “총각친구의 X냄새(똥냄새)”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빈곤으로 인해 "이성애를 한 번도 잘 못하고" 그래서 "그런 데에나" 애정을 [붙일]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불평등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성들끼리의 항문 성관계는 1940년대 한국 사회, 적어도 강원도에서는 그렇게 어렵게 접하는 현상은 아니다. 아니,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1940년대에 나이가 10살 내지는 20살 정도였던 노인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그러한 남성들과의 성관계를 경험했다고 증언한다. 


상대의 부인이 수동무에게 가지 못하게 하면, 수동무 상대는 부인을 때리기도 한다. 수동무 상대는 자신의 부인에게 옷을 사 주지 않지만, 수동무에게는 단오, 추석, 설 등 3 '명일'에 바지저고리를 해 준다. 그리고 신발도 사 주고, 목도리도 사 준다. 수동무 상대는 수동무와 같이 그네도 뛰고 자신이 가는 곳에 수동무를 대동한다. '도방'등에서 자신의 수동무만을 데리고 자면서 수동무에게 허벅지를 쪼이게 하고 성기를 허벅지 사이에 비빈다. 수동무는 이쁘고 똑똑한 아이들만 수동무가 되었고, 못난 애는 수동무도 되지 못했다.


어린 시절 (-) 5촌네 집에서 머슴을 사는 50살 정도의 머슴의 수동무를 13살부터 2년 동안 하였다. 그 머슴은 나에게 개목도리를 사 주었다.

15살 때에는 부인이 있는 30살 남자가 자꾸 집적거려 못 이기는 척하며 똥구멍을 주었다. 그와는 1년 정도 교제했다. 그의 집의 사랑방에 가서 자면, 그는 부인과 자지 않고 사랑방에 와 삐역을 했다.


'도방'에서 남자들이 10명 내지는 20명 정도가 함께 자기도 하는데, 한쪽 구석에서 나이가 든 남자가 어린 남자 아이인 수동무를 상대로 뼉을 하기도 한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뼉을 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이 다른 동네에 놀러가 도방에서 자다 삐역을 당하기도 한다.


수동무는 대체로 17살 정도면 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17살 이상이 되어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동년배끼리 번갈아 가면서 항문 성관계를 한다.


수동무 상대가 강제로라도 수동무와 뼉을 하면, 수동무는 그 날 이후부터 수동무 상대의 마누라에 버금가는 정도가 되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뼉을 한다. 일단 수동무가 되어 뼉을 하게 되면, 수동무 상대가 50살이더라도 수동무는 경어를 사용하지 않고 반말을 사용한다.


_박관수 (2006.2). 1940년대의 ‘남자동성애’ 연구. 『비교민속학』, 31집 389-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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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비폭력 저항 - 제3의 길
윌터 윙크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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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을 주장하기 꺼려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선 비폭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정적이다. 즉 비폭력이란 용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며, 무엇인가 선한 일을 위해 전력투구하기보다는, 무엇인가 악한 일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들린다. (-) 많은 사람들은 "비폭력"을 권력 앞에서 복종하라는 명령으로 간주한다. 로마서 13장 1-7절은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원문에서 고딕 서체로 구분, 이하 동일)  절대 복종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되어 왔다. 또한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씀 역시 노예들과 하인들이 매질과 구타를 당해도 얼굴 찡그리지 말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하나님의 최후통첩으로 간주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억압당하는 자들이 마음속으로부터 고분고분해야 하며, 체제를 바꿀 생각 없이 모든 불의를 용서해야만 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

(-)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폭력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체제의 폭력과, 그 폭력이 억압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적으로 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만든 대응폭력을 똑같은 차원에 올려놓는 짓이다. 청년들이 던지는 돌멩이가 경찰이 쏘는 총알과 참으로 같은 정도의 폭력인가?

끝으로, 일부 평화주의자들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고난보다 자신들의 의로움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비판을 받은 것은 옳았다. (-)

여기서 문제는 "나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응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이다. "내가 어떻게 덕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일에 내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비폭력은 하나님과 타인들과 우리 자신들 앞에서 우리들 자신의 결백함을 내세우는 자기 정당화의 전제일 따름이며, 이것은 악마의 유혹, 즉 깨끗한 손과 더러운 심장을 지닌 채 죽으라는 악마의 유혹에 불과할 따름이다.


(-)


불의를 끝장내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해버린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수동적이며 (-) 남들에게 무조건 짓밟힐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되어, 많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불의 앞에서 겁쟁이가 되고 불의를 방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복음 5:38-41 표준새번역 개정판)


(-)

(-)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적절한 번역은 "악에 대해(혹은, 너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 치지 말아라," 혹은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아라"일 것이다. 학자역본(-)은 "악한 자에게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아라"(-)라고 탁월하게 번역했다. (-)


(-)

예수님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간단한 사례를 들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왜 ^오른쪽^ 뺨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오른쪽 뺨을 치는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시 오른손을 쓰던 세상에서 오른손 주먹으로 상대방을 치면 그 상대방은 왼쪽 뺨을 맞게 된다. 주먹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치기 위해서는 왼손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유대힌 사회에서는 왼손을 불결한 일을 위해서만 사용했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했을 경우 공동체에서 쫓겨나 10일 동안 참회하는 벌을 받았다(<사해사본> 1QS 7).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른손 손등^으로 치는 방법이다. 이것은 주먹다짐이 아니라, 창피를 주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즉 그 의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욕을 주기 위함이며, 그 "꼬락서니"를 제대로 알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당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같은 신분의 사람을 손등으로 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랬다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같은 신분의 사람을 주먹으로 치면 벌금이 4전이었던 반면에, 손등으로 치면 400전이었다. 그러나 하급자들을 손등으로 칠 경우에는 벌금이 없었다. <미슈나>, Baba Qamma 8:1-6).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다. ^이것들은 불평등한 관계들로서, 각각의 경우 보복을 한다는 것은 자살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대응 방법은 움츠려 굴복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청중이 누구였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경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고소하거나,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피해자들이었다("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너를^ 걸어 고소하여 ...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그의 청중들 가운데는 이처럼 신분, 종족, 성별, 나이, 지위 등의 위계적 질서와 로마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그들이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밖에 없으며,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처럼 이미 치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왜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시는가? 왜냐하면 왼뺨을 돌려대는 행동은 그 압제자에게서 모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좋다. (오른손 주먹으로) 다시 때려 봐라. 네가 처음 때린 것은 네가 의도했던 효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네가 나를 모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다. 너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너는 나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그 때린 사람은 몹시 난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손등으로 칠 수가 없다. 이미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왼손으로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가 (오른손) 주먹으로 친다면 그는 스스로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처럼 손등으로 치는 것의 요점은 신분계급 제도를 강화시키고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왼뺨을 돌려댄 사람을) 매질하도록 명령한다 해도, 그의 주장은 이제 취소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그 억압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이 하급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도록 된 것이다. 이 강자는 약자를 비인간화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긴 것이다. 이런 대응 방법은 수동성과 비겁함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도전하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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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가면 Elephant Mask (한영 바이링궐 에디션) 움직씨 미투 metoo 1
노유다 지음, 김유라 옮김 / 움직씨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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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칠천 수백여 일간 폭력의 기억을 제대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내 비밀,

더 나아가 원가족의 비밀은 조개우물 이야기만큼이나

아득한 것이다. 나는 전화번호 112의 기능을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부모님한테 알리지 못했다.

여섯 살 터울의 남자가 위협해서도, 두 살 터울의 

남자가 감시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한집에서 자란

형제이며 친모 친부가 나보다 더 의지하고 아끼는

자식들인 탓이었다.

예컨대 내게도 어느 주말의 한가한 기억쯤은 

있는 것이다. 수원 지하방 한가운데에 버너를 놓고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엄마가 얻어 온 홍차 향을

맡았던 일은 내 인생에 손꼽히는 요긴한 기억이다.

아련한 홍차 향이 아빠 작업복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싫지 않게 만들었다. 가족들과의 한 끼 식사와 나들이

같은 아주 사소한 순간이 나를 침묵하게 했다. 내가

범죄 사건의 방관자가 된 이유는 추악한 범인들을

가족으로 여긴 탓이었다.

무거운 비밀을 견디는 대신 나는 닥치는 대로 먹었다.

먹고 먹어서 코끼리처럼 몸이 커지면 세상 어떤 망할

자식도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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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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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 교촌치킨 먹으려고 허니오리지날 배달 주문해놓고 읽기 시작했는데 단편 하나 읽고 나니깐 가슴 미어져서 왠지 치킨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엇음.. 그래도 맛잇게 먹엇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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