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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좋겠어요
김용택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평점 :
사람들은 자기에게 소용없었던 말을
남에게 해준다.
사람들은 그 누구의 어떤 말도
마음에 닿지 않을 많은 일을
울면서 겪어낸다.
지혜란 대부분
마음 편할 때 소용되는 말이다.
남의 말은
답이 잘 안 맞는 참고서일 뿐이다.
_「소용없는 말」
아침때 쑥을 뜯으러 갔다.
다섯 자루 정도 뜯었다.
뜯는다고 하지만 키가 커서 낫으로 벤다.
쑥을 다듬고 있는데 꾀꼬리가
이 산 저 산에서 또렷하게 운다.
앞산에서 한 마리가 울면 뒷산에서 화답한다.
시를 잊고 산다.
저 산천이 시다.
산천이 저리 찬란하고 눈이 부신데,
바람이 저렇게 부는데,
새로 길어난 나뭇가지들이
봄바람에 저렇게 흔들리는데,
시는 뭐 하러 쓰나.
시를 어따 쓰나.
내 하루 삶의 어디다가 시를 쓰나.
어느 빈자리가 있기는 있나.
새들이 저리 날아다니는데.
내 시를 어디다가 쓰나.
인간에게는 최소한도가 없다.
자자 하고 바로 잤다.
_「자자 하고, 잤다」
이게 제가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우리 마을은 한 오백년쯤 됐습니다. 임진왜란 때 피란을 와서 살다가 사람들이 전쟁이 길어지니까 에이 가지 말고 여기 살자, 오륙 년 동안 산천과 정이 들어서 살기로 하고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마흔 가구 정도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열두 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을 인구는 저희 내외까지 해서 스물세 명 정도가 살고 있어요. 우리나라에 농촌은 없어요. 농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인정이 넘치는 시골, 그런 건 이제 없어요. 도시나 산골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달라져버린 거죠. 한 군데만 달라지는 건 없고 한곳이 달라지면 다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집들을 새로 지어서 이따금 주말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말에 와서 삼겹살만 구워먹고 가는 집. 저는 삼겹살집이라고 그럽니다. 그런 집이 서너 가구 되고, 그걸 합쳐도 열두 가구입니다.
사람들이 여기다 마을을 만들자 생각하면서 뭘 먼저 생각했을까요? 이 근방에 아파트가 지어질까? 요즘은 그런 생각으로 마을을 만들죠. 옛날 사람들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산이었습니다. 산도 어떤 산이었을까요. 산이 많잖아요. 바로 뒤에 있는 산이었습니다. 뒷산, 왜 뒷산을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을까요. 기댔습니다. 뒷산에 기댔어요. 우리 인문의 가장 기본은 기대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이 기대고 인간이 자연과 기대고. 그렇게 기대고 사는 게 인문의 시작이에요. 우리 인간들이 사는 사회, 부부간에도 부자지간에도 자식간에도 형제간에도 그렇고 절대적으로 믿는 부모는 요즘은 절대 없죠. 절대 믿는 부부, 믿는 형제도 없죠. 인간들은 늘 믿는다고 하지만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예요.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 무너질 수가 있다 그 말이죠. 사회적으로 법이 있잖아요. 법이라는 걸 기대고 사는 건데 오늘날에는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더 많죠.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한 가지가 필요했는데 그게 뒷산이었던 거죠. 모든 마을의 뒷산, 어떤 집도 무너지는 산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허물어지죠. 산을 깎고 아파트를 세워서.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무너지는 뒷산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모든 마을은 뒤에 산이 있습니다. 그렇듯 모든 마을이 기대고 있습니다. 그게 인문의 시작입니다. 서로 기대고 산다는 것.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 어머니들, 당숙들, 큰엄마, 어머니들 책을 안 보는 거죠. 그런데 마을에서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어요. 공부를 안 했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던 거죠. 여러분들은 지장 많죠? 농사 짓고 사는 사람들은 삶이 공부였습니다. 살아가는 게 공부였습니다. 사실 책이라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책 속에는 나보다 못한 생각도 많고. 우리가 사는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고치고 바꾸고 맞출 게 많습니까. 그게 공부입니다. 공부가 꼭 책에만 있는 건 아니고 삶에 있다는 것이죠. 인생관이나 철학이 삶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죠. 배우면 반드시 써먹었습니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배워서 반드시 써먹었어요. 우리는 공부하면서 시험에만 소용되는 것들을 배우죠. 시험에서는 정직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배우지만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죠.
시인이 되려고 하면 안 돼요. 무엇을 하다보면 그것이 되는 것이죠. 글쓰기란 글을 한 줄 쓰고 나면 내가 달라져 있는 것이죠. 우리 인간들이 전혀 가보지 못한 세계가 있습니다. 글을 써서 가보는 거죠. 그게 희망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것을 자세히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쓰고 쓰다보면 자기가 하는 일이 더 잘 보이게 됩니다. 글이란 삶을 도와주는 겁니다. 글은 쓰다보면 늡니다. 오늘부터 10분씩만 노트를 내놓고 글을 써보는 겁니다. 아무 글이나.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아무 글이나 쓰다보면 됩니다. 저는 13년이 걸렸습니다. 책을 읽는 게 좋았고 시를 쓰는 게 좋았습니다. 좋아하다보니까 어느 날 시인이 된 거죠. 무엇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책을 보고 글을 쓰다보면 무엇을 하게 되더라는 거죠. 정말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세계에 간다는 말이죠. 그게 정말로 무엇이 돼요. 어떤 글이든지 써보는 거죠. 혼자 하기가 힘들면 친구들이랑 같이 모여서 차 마시면서 글을 써보자. 어떤 글이든지 몇 줄만 써보자. 처음엔 부끄럽겠지만. 이 생각이 밖으로 나가야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는 겁니다. 인생을 잘 사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살면 안 되는 거예요. 늘 달라져야 해요.
저희 어머니가 맨날 힘들 때마다 누군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딨겠냐고, 누구도 그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겪을 건 다 겪고 산다고 해요. 별일이 다 있는 거예요. 상상해보지 못한 일들이 있는 거죠. 어머니가 그랬어요. 용택아,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다, 그런데 살다보면 무슨 수가 난다.
못난 사람, 못된 사람 세상에 있어요. 남을 탓하고 비하하고 그런 사람들 많죠. 접어둘 때가 됐습니다. 당당하고 진실하고 정직하면 이기는 겁니다. 그걸 믿고 살아야 하죠. 그게 인문입니다. 이렇게 눈 올 때까지 사셨습니다. 얼마나 애를 쓰셨습니까. 별일이 다 있었죠? 잘 살아오신 겁니다. 지금 살아오신 것처럼 남은 올해, 잘 사시고 수를 찾아서, 뭔 수를 찾아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늘 새로운 세상에 사시길 바랍니다.
-12월 3일 하안도서관 강연 '자연이 말해주는 것을 받아 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