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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평점 :
2017년 11월 12일
─오래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 부엌 한 귀퉁이에 뒹굴고 있던 십자가를 발견한 적이 있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오 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십자가였는데 아마도 전 주인이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한 십자가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내 것이 아니라고 해서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이 작은 십자가에 의지해서 어두운 시간을 밝혀내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나는 내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고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내기 힘든 지경까지 삶에 불행이 찾아왔을 때 우연히 책상 서랍 안에서 십자가를 발견했다. 나는 그 십자가를 손에 들고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고난과 불행을 견뎌내던 한 사람,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잊어버리고 가버린 십자가. 하지만 그 사람이 잊어버린 십자가를 발견한 다른 사람이 지금 그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지 희망을 발견하려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십자가를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전 주인이 십자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상상해보는 일에 따스함이 있었다.
─시를 쓰던 순간은 어쩌면 그렇게 다른 이가 잊어버리고 간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십자가라는 것이 한 종교에 속한 상징이라면 다른 종교에 속한 어떤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사람의 시간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린 수국 한 그루를 마당에 심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기 새들이 종일 지저귀던, 늙은 전나무에 있는 새집을 바라보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사랑을 향한 강렬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 시를 쓰는 순간 그 자체가 가진 힘이 시인을 시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