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질문은 도덕적인 행동 규범들이 공동체의 삶에서 자명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길 멈출 때 항상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집단적 에토스는 언제나 보수적인 에토스이고, 그것은 모든 동시대 에토스 내부에 존재하는 어려움과 불연속성을 억압하려드는 가짜 통일성을 가정한다(-) 이는 한때 통일되어 있었는데 그 뒤에 분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한때 이상화, 실로 어떤 민족주의가 있었고 이제 그것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고 또 신뢰해서도 안 된다는 그런 뜻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억압과 폭력 같은 것으로서의 윤리에 호소하는 것을 경고한다. (-)
(-) 그런 관념들의 모습으로 생존하는 윤리나 도덕 따위보다 더 퇴보한 것은 없다. (-) 그 관념들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속성을 획득한다. (-)
(-) 아도르노는 오직 집단적 에토스가 지배를 멈추었을 때에만 도덕적 질문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도덕적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공통으로 수용된 에토스에 토대해서 발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 집단적 에토스는 오직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공통성commonality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집단적 에토스는 폭력을 이용해서 집단성의 외양appearance을 유지하려고 한다. 게다가 집단적 에토스는 시대착오적이 되었을 때에만 폭력으로 변한다. (-) 집단적 에토스는 자신을 현재에 부과하고 강요할 뿐 아니라 현재를 무색하게 만들려고 하기도 한다. (-)
(-) "보편적 이해관계와 특수한 이해관계, 특수한 개별자들의 이해관계들이 갈라질 때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가 도덕의 문제를 만든다."(-) 아도르노는 "보편자"가 개별자와 화합하거나 개별자를 포함하지 못하고, 보편성에 대한 요청 자체가 개별자의 "권리"를 무시하게 되는 상황을 언급한다. (-) "보편자는 (-) 인간을 위한 어떤 실질적인 현실성도 갖지 않는다."(-) 모든 일군의 격언이나 규칙은 개인들에 의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전유되어야 한다(-) 아도르노는 삶의 방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윤리적 규범이나, 지금의 사회적 조건들에서는 전유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질 윤리적 규범은 반드시 비판적 개정이 필요하다(-) 현재의 사회적 조건들-모든 윤리가 전유될 때의 조건들이기도 한-을 무시하는 윤리적 에토스는 폭력적이게 된다.(-) 아도르노의 이론적 틀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도덕적 탐구 자체의 가변적인 역사적 특성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 그는 도덕적 탐구의 필요를 출현시키는 가변적인 사회맥락 안에서 도덕을 고찰하는데 헌신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맥락은 질문에 외재적이지exterior 않다. 맥락은 질문이 취할 형식을 조건짓는다. (-)
(-) 문제는 보편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특수성에 반응하는데 실패한 보편성, 자신의 적용가능성의 영역 안에 포함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반응하면서 재정식화되지 못하는 보편성의 작동방식에 있다(-) 보편적인 교훈precept이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전유될 수 없을 때, 정말 그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거부당해야만 할 때, 그 보편적 교훈 자체가 경합의 장소, 민주적 논쟁의 주제이자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민주적 논쟁의 전제조건으로서의 보편적 교훈의 위상이 사라진다. 그런데도 보편적 교훈이 민주적 논쟁에 전제조건으로, 참여의 필수조건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배제적인 폐제foreclosure의 형태로 그 폭력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는 보편성이 정의상 폭력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러나 보편성이 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 조건들이 존재한다. 아도르노 덕분에 우리는 보편성의 폭력이, 살아 있는 생생한 전유를 가능케 할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보편성의 무관심에 일부 자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 즉 교훈은 오직 치명적인 것으로서만, 자유와 특수성을 대가로 치르면서 무관심한 밖으로부터 강요된 고통겪기suffering[역주-명사가 실체화한다면 동명사는 순간, 상황, 과정을 보존한다는 버틀러의 평소 주장을 반영해서 suffering은 이 책에서는 고통겪기로 번역한다]로서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물론 정반대편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실수, 즉 "나I"가 자신의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된 채 이해되고, 자신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들(-)에서 초연히 떨어져서 순수한 직접성(-)으로 떠받들어지는 실수를 경고한다. (-) 이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나"는 어떤 용어로 도덕을 전유하거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가? (-) 자신의 출현의 사회적 조건들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존립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조건짓는 일군의 도덕적 규범들(-)에 연루되지 않은 "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배적인 윤리적 규범들의 매트릭스 및 서로 갈등하는 도덕적 틀에서 분리되어 별도로 존립하지 않는다. 그런 매트릭스는 중요한 의미에서 (-) "나"가 출현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나"는 나에 선행하는 에토스, 또는 어떤 갈등 중이거나 불연속적인 규범들의 장의 효과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자신을 설명하려고 할 때 "나"는 자신에서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이 자아가 이미 사회적 시간성-자신의 서술 능력을 초과하는-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설명, 자기 자신의 출현의 조건들을 포함해야만 하는 설명을 하려고 할 때 "나"는 당연히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가 들려주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일군의 규범들과의 관계-혹은 관계들의 집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출현의 사회적 조건들에 항상 어느 정도는 탈취당한다dispossessed. 그러나 이런 탈취는 우리가 윤리를 위한 주관적인 토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탈취는 당연히 도덕적 탐구의 조건, 도덕 자체가 출현하기 위한 조건일 수 있다. (-) 이는 주체가 그런 규범들을 숙고해야 한다는 것, (-) 심사숙고하는 주체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고 그 주체가 어떻게 일군의 규범들을 실제로 살아내거나 전유하게 되는가(-) 윤리는 사회이론의 과업에 가담해야 하고 사회이론은 비폭력적인 결과를 낳으려 한다면 이 "나"가 살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
사회 제도들의 매트릭스에 입각해 "나"의 출현을 설명할 방법, 즉 사회 조건들 안에서 도덕을 맥락화할 방법은 다양하다. (-)
(-) 주체가 규범들을 전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존재론적인 장 안에 주체를 위한 장소를 마련할 규범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다르다. (-) 그러나 아도르노는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주체가 되지 못할지 역시 이 규범들이 사전에 이미 결정한다는 것을 고려했을까? (-) 사회적 존재론의 영역 내부에 적법한 부지를 확립할 때 규범들이 작동한다는 것을 고려했던 것일까?
우리는 반응과 소음에 대답하는 질문과 더불어 시작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그렇게 한다.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임시변통으로 한다. 거기 아니 여기 누가 있고 누가 가버린 걸까?
-토마스 키넌, <책임의 우화>
(-)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되고, 어떻게 자신이 했던 것을 설명할 위치를 정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오직 어떤 상해를 입게 되었을 때에만 자신에 대해 의식적이게 된다(-) 누군가 그 결과 고통을 겪는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나 혹은 정의의 체계 안에서 그/그녀의 옹호자로 행동한 이는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서 우리에게 자신이 그 원인인가를 묻는다. 다름 아닌 상해를 입힌 행위를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공정한 처벌을 할당하기 위해, 질문이 제기되고 문제의 주체가 자신에게 질문을 제기한다. (-) "처벌은 기억 만들기이다." 질문은 자아를 원인causative force으로 단정지으면서, 특수한 양태의 책임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고통의 원인이 우리였는지 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로서의 고통겪기 사이에서 인과론적인 관계를 공언하고, 또 우리의 행위와 행위의 결과를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기성의 권위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오직 정의와 처벌의 체계에 의해 설명가능해지는 존재로 호명되기에 우리는 설명을 시작한다. (-)
따라서 니체가 옳다면, 내가 설명을 시작하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설명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고, 그 누군가는 기존의 정의 체계가 위임한 권력을 갖고 있다. 나에게 메시지가 전달된adress 것이고, 심지어 어떤 행위가 나에게 귀속된 것이고, 처벌의 위협이 이런 심문을 후원한다. 나는 두려운 마음에 스스로를 "나"로 제공하면서 나 자신의 행동들을 재구성하려고 하고, 나에게 귀속된 행동은 사실 내 행동이었거나 내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내가 원인으로 기여했음을 확인하면서 내가 그 행동의 원인이었다고 자백하거나, 내가 원인이 아니라고 항변하면서 그 원인을 다른 데 위치지울 것이다. 그런 매개변수들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이 발생한다. (-)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의 결과로서, 도덕적으로 설명 가능해진다.
(-) 처벌하려는 욕망이 부추기지 않은 알고 이해하려는 욕망, 처벌의 공포로 유발되지 않은 설명하고 서술하려는 욕망이 당연히 존재할 수 있다. 나에게 설명을 부탁하는 "너"와 마주 본 상태에서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이해한 부분에서 니체는 옳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질문이나 귀속attribution-"그게 너 였니?"-을 마주했을 때에만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서술하길 시작하거나, 긴급한 이유로 자기를 서술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그런 질문을 마주한 채 침묵하는 일, 침묵이 질문에 대한 저항을 명확히 하는 경우도 늘 있을 수 있다-"넌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할 권리가 없어", "아무 증거도 없는 그런 주장을 그럴듯하게 대답이라 부르지는 않겠어" "설사 그게 나였다고 해도, 네가 알아야 해서는 아니야" 같은. 이 경우 침묵은(-) 권위의 정당성을 문제삼거나, 질문자가 끼어들 수 없거나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자율성의 영역을 구획짓고 제한하려고 한다. 서술하길 거부하는 것은 서사의 관계와 말걸기의 장면과의 관계로 남는다. 보류된 서사로서의 침묵은 질문자가 전제한 관계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질문받은 이가 질문하는 이를 거부하도록 그 관계를 바꾸게 된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telling story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giving an account과는 다르다. (-) 우리 자신에 대해 한 설명에 필요한 종류의 서사는 다음과 같은 전제, 즉 자아는 타자들의 고통겪기와(-)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것(-)
따라서 설명하기의 서사 형식은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을 타당한 추이와 더불어 중계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설득을 목적으로 청중을 향하고 있는 서사의 목소리와 권위에도 의존한다. 그렇다면 서사는 자아가 그런 고통겪기의 원인이었거나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야 하고, 따라서 자아의 인과적 행위성을 이해시킬 수 있는 설득적 매체를 제공해야 한다. 서사는 인과적 행위성이란 사실 뒤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성에 대한 모든 설명의 선결조건을 구성한다. (-)
니체의 관점은 (-) 메시지 전달 장면scene of address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는다. (-) 처벌 체계는 인과적 행위주체로서의 주체에게 호소해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고통겪기와 상해를 삶이 어느 정도는 수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 삶은 상해, 공격, 착취, 파괴를 통해 작동하고 그런 성격 없이는 전혀 사유될 수 없다" (-) 갈등을 제거하려는 사법적인 노력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니체의 관점에서 문제는 (-) "인간human"을 삶 자체에 적대적이게끔 강제적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 니체는 자신이 했었던 것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되는 대화적 장면, 즉 무엇을 어떤 이유에서 했는지 알고 싶어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솔직해지려고 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다.
(-) 고통겪기에는 그것이 삶의 일부분이고 삶 자체의 "유혹"과 "생명력"의 일부를 구성할 정도로 뭔가 "정당화될만한" 것이 있다. 이런 설명에 대적해야 할 이유는 너무 많다. (-)
(-) 니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는 다른 대화적 조건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고,(-)
(-) 내가 도덕적 틀을 통해 설명가능해진다면, 그 틀이 먼저 나에게 전달된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걸기와 질문을 통해 먼저 나에게 작용한 것이다. 나는 오직 그 방식을 통해서만 그 틀을 알게 된다. 그런 질문에 반응하면서 나를 설명한다면, 나는 내가 말하고 있는 내 앞의 타자와의 관계에 연루된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할 때,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거는 이에게 나 자신을 전달하도록 고무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서사적 설명을 확립하는 맥락에서 반성적 주체로 존재하게 된다.
(-) 니체에게 도덕은 처벌에 대한 두려운 반응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이 공포는 이상하게도 비옥한 것으로 드러난다. (-)
(-) 도덕의 약호는 항상 금지와 금지의 내면화 효과들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
(-) 주체를 담론의 "효과"로 다루었던 푸코는 말년 작업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재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미묘한 차이를 첨가한다. 주체는 일군의 약호, 규정 혹은 규범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고, (a) 자기-구성을 일종의 제작(포이에시스poiesis)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b) 자기-제작을 자기-제작보다 더 방대한 비판의 작동의 일환으로 확립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 푸코의 윤리적 자기-제작은 무로부터 자아의 급진적 창조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도덕적 실천의 대상을 이룰 자신의 일부를 정하는 것"(-) 자기에 대한 이런 작업(work),이런 한계지우기로서의 행위는 일군의 규범들(-)의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 역사적인 도식의 한계, 주체가 결국 존재하게 될 내부인 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지평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런 한계를 드러낼 방식으로 자기자신을 만드는 것이 바로 기존의 규범들과의 비판적 관계를 유지할 자아의 미학aesthetics of the self에 관여하는 것이다. (-)
(-)
어떤 행동이 "도덕적"이려면, 그것이 규칙이나 법, 혹은 가치에 순응하는 행위나 일련의 행위들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모든 도덕적 행동에는 그 행동이 수행되는 현실과의 관계와 또한 자아와의 관계가 포함된다. 자기와의 관계는 단지 "자기-인식"이 아닌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형성인데,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도덕적 실천의 대상을 이룰 자신의 일부를 정하면서 자신이 따를 도덕적 교훈에 상관적인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의하고, 자신의 도덕적 목적으로 봉사하게 될 어떤 특수한 존재 양식을 결정한다. (-)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형성을 요청하지 않는 도덕적 행동은 없다. (-)
(-)
푸코에게 도덕은 창안적inventive이고, 창안성을 필요로 하고, 좀 뒤에 보게 될 것처럼 심지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온다. (-) 자아가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자아는 명령에 대답하여 어떻게 자신을 정교하게 제작하는가, 자아는 어떻게 자신을 형성하는 것인가, 자아는 자신에게 어떤 노동을 수행하는가는(-) 하나의 도전이다. (-) 명령은 주체의 자기-정교화를 위한 무대를 설치하는데, 이런 자기-정교화는 항상 부과된 일군의 규범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의 조건들과 늘 갈등한다. 이런 갈등 중에 행위성 혹은 자유가 작동한다면, 그것은 강제하면서 강제를 제한하는 장의 맥락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윤리적 행위성은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떤 식으로건 생산해야 할 때에도, 윤리적 행위성의 갈등이나 일차적 딜레마는 세계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이다. (-)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삶의 조건들과 갈등한다는 것, 갈등-행위성-은 역설적이지만 이런 일차적인 조건으로서의 비자유unfreedom의 지속에 의해 가능해질 수도 있다.
(-) 자기정초적이지 않은 주체, 그런 주체를 단언하면 책임의 가능성,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훼손될까?
우리가 말하자면 처음부터 나뉘어졌고, 무정초적이거나 혹은 모순적인 게 진짜 사실이라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책임감의 개념을 정초하기는 불가능할까? (-)주체가 자신에게 불투명하고, 완전히 투명하지 않고, 자신에게 전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거나 타자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자유와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무지unknowingness의 순간들은 타자와의 관계의 맥락에서 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불투명한 것이 타자와의 관계 때문이라면, 또 이런 타자와의 관계가 우리의 윤리적 책임감의 현장을 이룬다면, (-) 다름아닌 주체가 자신에게 불투명하기 때문에 주체는 가장 중요한 자신의 몇몇 윤리적 속박bonds을 초래하고 유지한다는 결론이 당연히 나오게 된다.
(-)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의 다양한 자아들을 설명해야 하지만, 설명의 구조적 조건들로 인해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서사가 가리키는 단수의 몸singular body은 충만한full 서사로는 포착할 수 없다. (-) 일차적 관계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필연적인 불투명성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형성적이기formative 때문에(-) 자신에 대한 설명은 다른 사람-존재하든 상상이든-에게 주어지고, (-) 우리가 설명을 줄 때 사용하는 바로 그 용어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이해가능하게 만들 때 사용하는 그 용어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
나는 여러 철학자와 비판적 이론가를 취사선택하면서(-) 목적은 종합이 아니며, 그 이론들 각각이 윤리적 중요성-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이의 모든 노력을 조건짓는 한계들에서 비롯될-을 갖는다는 것은 주장하고 싶다. (-)
(-) 나는 도덕이 자신의 사회적 조건들의 징후나 그 조건들의 초월성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도덕은 차라리 희망의 가능성과 행위성의 결정에 본질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 윤리의 질문이 출현하는 곳이 다름아닌 우리의 이해가능성의 도식의 한계, 즉 어떤 공통의 토대도 추정할 수 없는 대화를 지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자문해볼 수 있는 장소, 우리가 있는 바로 이 장소, 말하자면 그럼에도 여전히-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 거기에 있는 다른 누군가, 그리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승인을 제공하고 승인을 받아들이라는 요구 하에 있는 사람이 아는 것의 한계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진리 체제regime of truth(-) 전적으로 진리 체제가 그 형식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 체제는 인정의 틀을 제공하고, 누가 인정의 주체로서의 자격이 있는가를 약술하고, 인정의 행위에 소용이 있을 규범을 제공하기에, 결정한다는 너무 강한 단어일지 모른다. (-)이 체제와의 어떤 관계, 쟁점이 되는 규범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자기-제작(-) 누가 '나'일 것인지를 묻는 질문과 협상하는 자기-제작의 양태는 늘 존재한다. (-) 설사 규범이 나중에 우리가 하게 될 일군의 결정에 틀과 참조점을 제공한다고 해도, 우리는 규범들에 의해 결정론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 인정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런 틀과 관계해서, 혹은 인정을 통치하는 규범은 이 틀과 연관해서 도전을 받고 변형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푸코의 핵심은 그런 규범과의 관계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진리 체제와의 모든 관계는 동시에 나와의 관계이기도 할 것이라는 점이다. 비판은(-) 나 자신의 진리를 의심하는 것, 나 자신에 대해 진리를 말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 비판은(-) 이해가능성의 어떤 주어진 사회적 실천이나 지평에 관한 것이 아니다. 비판은 내가 나 자신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 역시도 함축한다. (-)
(-) 우선 다름아닌 나의 존재가 양도되어 있는 이 규범들, 나를 취임시킬install, 혹은 인정가능한 주체로서의 나의 취임을 박탈할 권력을 갖고 있는 이 규범들은 무엇인가? 둘째, 이 타자는 어디에 있고 누구인가? (-) 어쩌면 자아와 타자의 2자적 장면으로는 주체의 생산과 상호주체적인 교환 양자를 조건짓는 규범성의 사회적 작동방식을 적절히 다룰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 자아의 존재가 자신의 단수성singularity에서 타자의 실존에 의존할(-) 뿐 아니라 인정의 장면을 통치하는 규범성의 사회적 차원에도 의존한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렸을 수 있다. (-)
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보거나 심지어 나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규범들은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규범들은 사회적 측면에서 기능하고, 자신들을 조건짓는 모든 2자적 관계를 초과한다. 그러나 그 규범들의 사회성은 구조주의적인 총체성totality이나 초월적 혹은 유사-초월적인 불변성으로 간주될 수 없다. (-) 어떤 인정의 실천들, 아니 인정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어떤 붕괴가 규범성의 지평 안에서 파열의 부지를 표시하면서 암묵적으로 제도로서의 새로운 규범을 요청하고, 현재 지배적인 규범적 지평의 소여성giveness을 문제 삼는다는 점 역시 참이다. 내가 그 안에서 타자를 보고 있는 규범적 지평, (-) 역시 비판적 개방에 종속된다.
(-) "나"는 내가 사용하게 되어 있는 용어들로는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없거나 혹은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화를 발생시키는 용어들을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내가 규범들과 일으키는 갈등은 나 자신의 갈등이다. 푸코의 질문, "나를 위한 존재론을 결정하는 진리 체제에 유념한다면, 나는 누구일 수 있을까?"는 유효한 질문으로 남는다. (-)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내가 타자를 그녀의her 분리성과 외재성 안에서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줄 틀이 존재한다면, 타자는 오직 나에게만 나타나고, 오직 나를 위한 어떤 타자an other로만 기능하기 때문이다. (-)
(-) 타자는 완전히 개인적이지personal 않아도 단수일 수 있지만, 규범들은 어느 정도는 비개인적이고 무관심하다. (-) "나"는 규범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만큼 항상 규범에 의해 사용되는 것 같다. (-) 그러나 당신을 인정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규범들과의 이런 싸움에 휘말려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역시 사실 아닐까? 우리는 이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인정을 주는 순간에 나에게 잠재적으로 인정이 주어지고, 내가 주는 인정의 형식은 잠재적으로 나에게 주어진다. (-)
(-) 나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주는 순간에 그리고 주는 행위 속에서 인정을 받고 있기에 그렇다(-) 나에게 이렇게 빨리 돌아오지만, 실제로는 내 손을 결코 떠나지 않는 이 선물gift은 어떤 종류의 선물인가(-) 인정은 타자가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된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게 만드는 상호적 행위인 걸까? (-)
(-) 헤겔적인 주체는 외적인 것을 자신에게 내적인 일군의 특질들로 전면적으로 동화시키는 변화를 초래한다(-) 전유의 제스쳐이고 이는 제국주의의 스타일(-) 그러나 헤겔에 대한 다른 읽기는 (-) 즉 "나"는 반복적으로 자신을 자기 밖에서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이고 나 자신으로의 나의 귀환이 일어나는 어떤 최종적인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내가 겪는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된다. 즉 인정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타자가 되고, 그렇게 해서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정지한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에는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정의 행위를 통해 변형되기 때문이다. (-) 행위는 과거의 조직방식과 그 의미를 바꿈과 동시에 인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현재 역시도 바꾼다. (-) 타자와의 만남은 어떤 귀환도 불가능할 자아의 변형을 초래한다. 이런 교환이 일어날 때 자아와 관련해서 인정되는 것은, 자아는 자기 내부에 머무르기 불가능하다고 밝혀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자기 밖에 있어야 하고 자기 밖에서 행동한다. 우리는 자기 밖에서, 자기에게 외적으로 발생하는 매개를 통해서, 자신이 만들지 않았던 규범이나 관습-이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저자나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의 작인agent으로 식별할 수 없다-에 의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나"의 가능성. "나"를 말하고 알 가능성은 그 "나"가 조건짓는 1인칭 관점을 탈구시키는 관점에 있다.
(-) 우리는 독립해 있는 단순한 짝dyad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둘 사이의 교환을 조건짓고 매개하는 것은 언어, 관습, 교환에 관여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고, 사회적 성격을 가진 규범들의 침전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개인적인 만남을 야기하고 방향상실을 초래하는 비개인적 관점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 <정신현상학>에서 무대화된 인정투쟁은 2자 관계를 참조해서 사회적 삶을 이해하기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2자적 교환은 인정투쟁에 가담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일군의 규범들을 가리킨다. 무엇이 인정을 가능케 하는가를 물을 때 우리는 그것을 단지 타자라고, 나를 알고 있고 나를 튿별한 재능이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타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 타자 역시 오직 암묵적이긴 하지만 어떤 기준, 즉 누군가에게 자아와 관련해서 인정할만한 것과 인정할 수 없는 것을 확립하는 기준은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한 틀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는 일차적으로는 내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내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내적 능력을 통해서 인정-그럼에도 우리는 인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아내야만 한다-을 수여한다. 나의 얼굴이 독해 가능하다면, 이는 오직 얼굴의 해독성을 조건짓는 시각적 틀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만 가능하다. 다른 이들은 읽지 못하는데 유독 어떤 한 사람이 나를 "읽을" 수 있다면, 이는 나를 읽을 수 있는 이가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내적 능력을 가져서일까? 아니면 어떤 독해 실천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우리가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산한 어떤 틀과 이미지들과 관련해서 가능해졌기 때문일까? 가령 인간의 얼굴에 윤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우선 인간적인 것the human을 위한 틀, 그때그때 사례에 맞춰 바꿀 수 있는 틀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시각적 재현을 놓고 어떤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려한다면, 인간의 얼굴로서의 얼굴에 반응하는 우리의 능력을 조건짓고 매개하는 것은 다양하게 인간화하고 탈인간화하는 참조 틀일 것이다.
따라서 얼굴에 윤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시각 장의 규범성을 필요로 한다. (-) 주어진 어떤 하나의 얼굴은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얼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누구는 얼굴, 쉽게 읽히는 가시적인 얼굴을 획득하고, 다른 이들은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 만남의 틀을 이루는 언어가 존재한다. 그 언어에 배태되어embedded 있는 것은, 무엇이 인정가능성을 구성하고 무엇이 구성하지 않는가와 연관된 일군의 규범들이다. (-) 진리 체제는 (-) 그가 인정할 수 있는 인간으로 알려지고 인간이게 하는 진리, 그가 자신에 대해 부여할 수 있는 설명을 구성하거나 구성하지 않을 것을 강제한다(-)
익명성이 너는 나를 모른다고 주장한다. 이제 어쩌지?
-리 길모어, <자서전의 한계>
(-)아드리아나 카바레로는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마치 우리의 사람됨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듯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푸코에게 그렇듯이, 질문은 우리가 일차적으로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질문인 반성적 질문이 아니다. 카바레로가 보기에 질문을 제기할 때 말걸기의 구조 자체가 그 질문의 함의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한다. 인정에 가장 중심적인 질문은 직접적인 질문으로, 그 질문은 타자에게 "너는 누구인가?"로 전달된다. 이 질문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가 우리 앞에 있고, 헤겔의 도식이 제공하는 상호적 인정 모델과 다른 사람을 더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가능성에 제한을 가하는 독특함과 대체불가능성의 존재인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고 추정한다.
(-) 행동과 발화는 상호간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근본적이며 특별히 인간적인 행위인 동시에 모든 신참에게 제기되는 질문인 '너는 누구인가?'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 "누구"란 질문은 이타주의의 가능성에 가담한다. 카바레로가 "누구란 질문"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이것을 했는가?"라는 질문, 즉 엄격히 도덕적인 설명가능성의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혹은 알려질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질문이다. (-) 카바레로는 아렌트가 관계적 정치를 확립하려는 목적에서 "누구"의 정치, 즉 타자의 노출explosure과 취약성이 나에게 일차적인 윤리적 요청을 제기하는 정치를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 카바레로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취약성과 단수성 안에서 서로에게 노출된 존재들이고, 우리의 정치적 상황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항구적으로 필연적인 노출을 어떻게 가장 잘 다룰-그리고 존중할-것인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 이런 주체 "바깥"에 대한 이론은 헤겔적 입장의 탈아적 흐름을 급진화한다. 그녀의 관점에서는, 말하자면 나는 내적 주체, 나 자신에게 갇혀 있는, 유아론적인 주체, 오직 나 자신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너를 위해, 그리고 너가 있었기에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존재한다. 만약 말걸기의 조건들을 잃어버리고 말을 걸 "너"가 없다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관점에서라면 우리는 오직 다른 이에게만 자서전을 이야기할 수 있고, 오직 "너"와 연관해서만 "나"를 지시할 수 있다. "너"가 없다면 나 자신의 이야기는 불가능해진다.
(-) 근본적으로 노출되고, 가시적이며, 보여진 존재로서의 이 타자, 외양appearance의 영역에서 신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타자(-) 나는 나의 의지로 그런 노출을 멀리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의 육체성, 이런 의미에서 나의 삶의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
(-) 우리가 근본적으로 타자에게 의존한다는 것과 관련된 첫 번째 논점은 우리가 타자에게 말을 걸지 않고서는, 또한 타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의 근본적인 사회성이 사라지길 바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 우리는 어떤 이가 다른 이들보다 우리를 더 적절히 인정한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 카바레로는 우리가 들려주어야 하는 독특한 이야기들에서 분명해지는 우리들 각각의 존재의 환원불가능성, 따라서 완전히 집단적인 "우리"와 동일시하려는 모든 노력은 반드시 실패할 우리 모두의 환원불가능성을 옹호한다. (-)
이른바 이타주의적인 관계의 윤리라고 불리는 것은 감정이입, 동일시, 혼융confusion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윤리는 참으로 독특한, 다른 사람인 너를 욕망한다. 이 윤리는 네가 아무리 나와 비슷하고, 나와 일치한다고 해도, 너의 이야기는 결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라이프-스토리들의 더 큰 특징들이 유사해 보인들, 나는 너 안에서, 심지어 집단적인 우리 안에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동일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는 우리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것에 의해, 즉 우리의 단수성에 의해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현상학>에서 "이"를 분석할 때 헤겔은 (-) "'단수'라고 말할 때 나는 완전히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것 자체what it is를 이야기하는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단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이 종이 한 장' 식으로 좀 더 정확하게 기술한다면 그때 그 낱장의 종이는 '이 종이 한 장'이고 나는 항상 오직 보편적인 것을 말했던 것이다. (-) 단수성의 한가운데에서 대체가능성의 구조를 확립하면서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특징짓는(-)
(-) 설사 그런 노출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설명을 구조화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나를 인정할만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내가 사용하는 규범들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나와 함께 태어나지 않았다. 규범들이 출현한 시간성은 나 자신의 삶의 시간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정할만한 존재로서의 나의 삶을 사는 동안, 나는 나의 죽음이 종점이 될 시간성들의 벡터를 살지만, 또 다른 시간성은 나의 인정가능성을 확립하고 유지시키는 규범들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성에 존재한다. 이 규범들은 말하자면 나에게, 나의 삶과 나의 죽음에 무관심하다. 규범들은 나의 삶의 시간성과 똑같지 않은 시간성에 따라 출현하고, 변화하고, 존속하기에, 그리고 그 시간성들은 어떤 면에서 나의 삶의 이해가능성을 지속시키기에, 규범들의 시간성은 나의 삶의 시간을 가로막는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런 나의 삶의 관점의 차단, 이런 방향상실, 이런 사회성 안의 무관심의 심급이 그럼에도 나의 살기living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 모든 내면성을 억압하고 나의 삶에 너무나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바깥에 나의 발화를 종속시킨다고, 그것은 나의 삶과 나의 죽음의 차이를 전혀 모른다(-)
(-)나의 말들은 내가 그 말들을 할 때 탈취되어, 나의 삶의 시간과 같지 않은 담론의 시간에 의해 차단당한다. 나의 삶을 가능케하는 무관심한 구조들이 나를 초과하는 사회성에 속하기에, (-)
(-) 규범을 사용한 만큼만 규범이 나를 사용한다(-) 무엇이 인정할만한 설명이고 무엇이 아닌지 조건짓는 규범(-)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은 모두 어느 정도 규범들, (-) 어느 정도 협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규범들에 순응한다. (-) 내가 누군가에게 설명을 한다는 것, 그 설명의 수신자-사실이든 상상이든-가 이런 나에 대한 설명이 나의 설명이라는 느낌을 중단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만약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이고 누군가에게 하는 설명이라면, 그것을 나의 설명으로 확립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설명을 누설하고, 전달하고, 그것에 탈취당하게 된다. 설사 수신자가 암묵적이고 무명으로 남아 있고 익명이거나 명기되지 않은 채 있다고 해도, 말걸기의 구조 밖에서는 어떤 설명도 일어나지 않는다. 설명을 확립시키는 것은 말걸기이고, 설명이 완성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나 자신의 것의 영역에서 효과적으로 수출되고 몰수되어야 한다. 오직 탈취를 통해서만 나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한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설명하려 하고 나를 인정할만하고 이해할만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때 나는 나의 삶에 대한 서사적 설명과 함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사는 나의 것이 아닌 것, 꼭 나의 것은 아닌 것에 의해 방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인정할만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또 바로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 너무나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 "나"가 나의 출현의 이야기나 나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내가 없었던 거기의 정황들, 따라서 권위적인 지식을 희생하고서만 서술할 수 있는 일군의 기원들의 정황을 입증해야 한다. (-) 나는 여러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할 것이고, 설명들은 항상 일관되거나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것(-) 기원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기원에 대한 여러 개연성 있는 판현들을 갖는다는 뜻(-) 이 기원의 판형들은 어느 것이건 가능할법한 서사이지만, 그 중 어느 하나를 꼭 집어 그것만이 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렇다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이 깨지고 훼손될 잠재성을 갖게 되는 방식은 여럿이다. 스스로를 설명하려는 나의 노력이 좌초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내가 나의 설명에 말걸기 때문이고 나의 설명에 말을 걸면서, 너에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 내가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나의 조건, 그러나 설령 나의 몸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해도 내가 정확히 서술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 이야기들은 스스로가 가리키고 있는 몸을 포착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 몸의 역사는 완전한 서술이 불가능하다. 몸이라는 것to be a body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삶을 완전하게 회상할 수 없다(-)
(-) (1) 서술될 수 없는 노출, 나의 단수성을 확립하는 노출이 존재한다. (2) 나의 삶의 역사에서 지속적이고 정기적으로 회귀하는 인상이나 자국을 형성하는 일차적 관계들, 회복불가능한 일차적 관계들이 존재한다. (-)
(-) 이것은 나의 서사가 갑자기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in media res, 즉 많은 일들이 이미 발생했고 그래서 언어로 나와 나의 이야기를 만회할 수 있는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항상 손실을 만회하고,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기원들을 허구화하고 우화로 만들고 있게 된다. 이야기를 만들면서 새로운 형식으로 나를 창조하고, 내가 지나간 과거의 삶을 들려주려고 하고 있는 "나"에게 덧붙여지는 서사적 "나"를 취임시킨다.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서사적 "나"가 이야기에 효과적으로 첨가된다. (-)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은 부분적이고, 거기에는 내가 어떤 명확한 이야기도 지어낼 수 없는 것이 따라다닌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출현했는가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서사적인 재구성을 향한 나의 노력은 항상 수정 중에 있다. 내가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는 것이 내 안에 그리고 나와 연관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 의미에서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내가 행동하는가를 내가 설명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일까?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어떤 불투명성이 존속하고, 너에게 나 자신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는 윤리적 실패일까? (-)
주디스 버틀러 _윤리적 폭력 비판 - 나 자신을 설명하기 1장 자기자신에 대한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