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기제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자아를 변질시키고, 마침내는 애정을 주고받는 능력까지 소멸시킨다. 우울증은 우리의 내면이 홀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까지도 파괴한다. 사랑은, 우울증을 예방하진 못하지만 마음의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되어 마음을 보호해 준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는 우리가 더 쉽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이런 보호 기능을 되살려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 사랑은 이따금 우리를 저버리며 우리도 사랑을 저버린다. (-) 사랑 없는 상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무의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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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식을 체험하는 것, 거의 날마다 내리는 비의 파괴에 노출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 자신이 연약한 존재로 변모하고 있고 자신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강풍에 날려 가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을 아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감정의 녹이 더 많이 슨다. (-)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헤쳐 나갈 수는 있다. (-)
(-) 죽음은 곧 자신의 붕괴, 가지들의 부러짐이다. 처음 사라지는 건 행복이다. 그 무엇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된다. (-)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던 슬픔(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온 듯한 슬픔), 유머 감각, 사랑에 대한 신념과 사랑하는 능력. 그렇게 모든 것들이 걸러져 나가면 스스로에게도 멍청이로 보인다. 원래 머리숱이 적었다면 더 적어지고 원래 피부가 나빴다면 더 나빠진다. 자신에게조차 역겨운 냄새를 풍기게 된다. 다른 사람을 믿거나 감동하거나 슬퍼하는 능력도 잃는다. (-)
현재 존재하는 것은 부재하게 된 것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것들의 부재는 다른 것들의 존재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약물치료는 덩굴식물을 난도질한다. 우리는 약물이 그 기생식물을 조금씩 말라죽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가지들이 자연적인 형태를 제법 회복하는 게 느껴진다. (-) 덩굴식물의 무게가 사라져도 대개의 경우 나무에겐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뿌리는 남아 있고 드문드문 남은 잎들이 필수적인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삶도, 강한 삶도 되지 못한다. (-)
(-) 나는 행복할 때는 행복감 때문에 마음이 좀 산란해진다. 행복감이 내 정신과 두뇌 속에서 활동을 원하는 어떤 부분을 이용하는 데 실패하기라도 한 것처럼. (-) 상실의 순간에 나의 이해력은 강화되고 예리해진다. 유리로 된 물체가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볼 수 있다. (-)
사람을 마비시키는 절박감은 우울증의 커다란 한 부분을 이룬다. 우리는 6인치 높이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을 천 길 낭떠러지에서는 못한다. 추락에 대한 공포가(바로 그 공포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는데도) 우리를 사로잡는다. (-)
우울증 환자의 주위 사람들은 환자 스스로 자신을 다스려 주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는 침울해할 여지를 여간해서는 주지 않는다. (-)
(-)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의 진전이다. 우리에게는 통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 약은 약한 독이고, 사랑은 무딘 칼이며, 통찰력은 무리하게 잡아당기면 끊어지고 마는 밧줄이고, 의지력은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하므로 그것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
"(-) 첫째로는 그들에게 잊는 법을 가르쳤어요. 우리는 날마다 잊는 연습을 했어요. 완전히 잊는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조금씩 잊을 수 있도록 말예요. (-) 그들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 그들이 하고 싶다는 일들을 하게 합니다. 한꺼풀만 벗기면 우울증이 있지만, 온몸의 살갗 바로 아래에 우울증이 숨쉬고 있지만, 그것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잊으려는 노력은 할 수 있죠. (-) 일을 다 배우면 사랑을 가르칩니다. 나는 우리 집 옆에 간이 한증탕을 하나 지었어요. (-) 그들을 그곳에 데리고 가서 목욕도 하고 서로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도 발라 주게 하고 손톱 손질법도 가르치지요. 그렇게 하면 자신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게 되니까요. 그들은 그런 느낌을 간절히 원하죠. 다른 사람과 육체적인 접촉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그러면 그들을 육체적 고립의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고 결국 감정적인 고립도 해소되니까요. 그들은 함께 몸을 씻고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서로 얘기도 나누고 조금씩 서로를 믿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친구를 사귀게 되고 더 이상 혼자 외롭게 살 필요가 없게 되지요. 그리고 나한테밖에는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하게 됩니다."
(-) 나는 고통받는 능력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평생 막연한 슬픔 속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심한 우울증은 다르다. 사람은 격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살아남을 수 있다. 내가 근절하고자 하는 것은 우울증으로 인해 살아 있는 시체처럼 살아가는 것이며 이 책도 그런 목적을 위해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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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사회적 저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궁핍과 빈곤은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빈곤층 사이에서 우울증은 너무도 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식별하지 못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 "친구들이 다 그런 상태라면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된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외부적인 일들의 탓으로 여기며 외부적인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면적인 것도 변할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
(-) 빈곤층 가운데 다수가 안고 있는 문제는 우울증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학습된 무력감이다. 동물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습된 무력감은 맞서 싸울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할 때 일어난다. 이런 처지에 놓인 동물은 인간의 우울증과 흡사한 유순한 상태가 된다. (-)
(-) 아이들은 의지를 지녔으며 자신의 힘을 믿으며 자랄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성공적인 힘의 주장은 그 아이들의 상대적인 부유함과 지적 능력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런 주장에 대해 (하다못해 부정적으로라도) 반응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재앙이다. (-) "우리는 일부 환자들에게 감정들의 목록을 주고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지요. 그들이 무조건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죠. 그런 다음 그들에게 그런 감정들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 다음에 목표를 세우고요. 그들 가운데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식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일인 사람들도 있지요."
(-) 사람들은 우울증을 에이즈의 결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울증이 먼저인 경우가 많다. (-) "기분장애를 갖게 되면 섹스와 주사 바늘에 대해 훨씬 더 부주의해진다. 콘돔이 찢어져서 에이즈에 걸리는 경우는 극히 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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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 (-)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덜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 "유감스럽게도 자살이나 고통, 슬픔의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픈지, 어떤 증세들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그저 환자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이 느끼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질환과 성격은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어떤 환자들은 심각한 증세들도 잘 견디고 어떤 환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견디지 못한다. 우울증은 심각하게 의욕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견디려면 상당한 생존 욕구가 필요하다. (-)
(-) 우울증을 겪는 동안 꼭 명심해야 할 점은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생이 끝난 시점에서 불행했던 세월만큼을 더 살 수는 없다. 우울증이 삼켜버린 시간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당신이 우울증을 겪으며 보내는 순간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 해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겨우 숨만 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 나는 우리 모두가 의지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으며, 화학적인 운명이나 그로 인한 도덕적인 허점을 거부한다. 우리가 누구이고, 선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재기하는지를 아우르는 통일체가 존재한다. (-) 엔젤 스타키는 강철 같은 낙관주의로 대중 앞에서 노리스타운 병원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무한한 애정으로 룸메이트에게 몇 시간이고 오이 껍질 벗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나의 집필을 돕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자신들의 생각들을 적어 보내 주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집을 티끌 하나 없이 청소한다. 우울증은 그녀의 기능은 손상시켰지만 성격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아의 경계를 분명하게 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 경험과 화학 작용의 무질서한 영역을 벗어나 금맥처럼 순수하게 존재하는 본질적인 자아는 없다. 인간이란 유기체는 서로에게 굴복당하거나 서로를 선택하는 자아들의 연속체다. 우리는 각자의 선택들과 상황들의 총합이며 자아는 세상과 우리의 선택들이 만나는 좁은 공간에 존재한다. (-) 의사를 찾아가 특정한 처치를 받으면 그런 관용과 사랑을 지닌 인물로 거듭날 수 있을까? 관용과 사랑은 막대한 에너지와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과연 (-) 주사를 놓듯 인격을 주입하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간디나 테레사 수녀처럼 될 수 있는 그런 날이 도래할까? (-) 훌륭한 자질이란 것도 그저 임의적인 화학적 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 이 세상의 어떤 명약도 우리를 재창조할 수는 없으며 다만 우리가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선택이라는 것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자아는 매일의 선택들 속에 존재한다. 하루에 두 번씩 약을 먹기로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아버지와 이야기하기로 선택하는 것도 나이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기로 선택하는 것도, 개를 기르기로 선택하는 것도, (-)
(-)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진실에 가까울 공산이 크다. (-) 어떤 사건에 대한 통제력에 관해 묻자 정상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실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반면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통제력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와 인지는 정확성이 아닌 자신과 세계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자기 강화적인 환상들이 특징이다. (-) 가벼운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은 정상인들에 비해 자신과 세계와 미래를 정확하게 본다. ......그들에겐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고 실패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환상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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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은 약에 의존하면서 기다린다. 물론 정신역동 치료나 전기충격 치료, 수술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계속 살아간다.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듯 그것에서 언제,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우울증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은 슬플 때조차도 생기에 차 있다. 어쩌면 내년쯤 나는 다시 무너질 수도 있으며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 나는 거의 날마다 순간적인 절망감을 맛보며, 늘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 건 아닌지 걱정한다. 그리고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긴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충동들에 젖는다. (-) 난 그런 감정들이 지긋지긋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살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고 그 이유들에 매달리게 되었음을 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한탄하지는 않는다. 나는 날마다(-) 살아 있기로 선택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문 기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