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016.1 - Vol.213
인물과사상 편집부 엮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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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어느 토론회에서 목사님 한 분이 '개신교는 왜 동성애를 싫어하는가'라는 청중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른 죄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인정하기에, 설사 회개하고 같은 죄를 또 저지른다고 해도 그 죄를 추궁하기 힘들지만 동성애자들은 아예 죄인이라고 인정하지도 않기에 더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 하지만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를 믿지 않는 것 역시 큰 죄다. 현재 한국 인구의 50퍼센트 가까이는 무교이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42퍼센트는 불교도이니 대한민국에는 죄를 짓고도 죄인이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개신교가 선교와 전도를 열심히 하는 이유로는 이해가 되지만, 왜 동성애만 이토록 극렬하게 반대하는지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질문에 다른 목사님은 '개신교의 위기'를 언급했다. 18세기 말 조선에 처음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의 숫자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일제 식민지와 6.25 전쟁, 그리고 친미 독재 정권이 주도한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은 개신교의 교세 확장과 잘 맞물렸다. 세계 50대 메가 처치(mega-church) 중 24개가 한국에 있으며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세계 최대의 단일 교회란 사실은 한국 개신교계의 빛나는 자부심이다.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인은 1985년에는 648만 명, 1995년에는 876만 명으로 늘어났기에 개신교계는 2000년대가 되면 신자 수가 1,000만 명이 넘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2005년에 발표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개신교인은 861만 명으로 오히려 줄어들었고, 경쟁자로 의식하는 천주교는 10년 전보다 교인의 수가 무려 74퍼센트나 늘어났다.

신도들의 헌금이 주요 수입원인 교회로서는 신도의 감소는 곧 위기다. 실제로 2002~2008년 매년 1,300개가 넘는 교회가 폐업했다.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흔한 전략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성애는 꽤 '유용한 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가 없었다면, 교인이 늘고 교회가 융성해지고 있다면 개신교는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지 않고 2015년에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서 반대 집회를 열지 않았을까? 동성 간 결혼 법제화에 찬성했을까? 이렇게 반문해보니 교세의 감소에 대한 반작용으로 동성애 혐오가 등장했다는 설명도 충분하지는 않다. 

근래 많은 사람이 개신교는 '왜 동성애를 이토록 혐오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흔히 '성경에 명시된 죄'라는 명분을 제시하지만 관련된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여전히 논쟁적이다. 더군다나 <<성경>>에 명시된 수백 개가 넘는 죄의 목록 중에서 어떤 것도 동성애만큼 집요하게 추궁당하지 않는다(심지어 십계명을 어긴 죄조차도 그렇다).

핵심은 동성애가 '정죄 대상 여부'가 아니라 동성애를 '정죄의 대상으로 다루려는 이유'에 있다. 왜 개신교는 동성애를 싫어할까라는 질문은 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라는 공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보자, 왜 한국 개신교는 지금 이 시기에 동성애를 혐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걸까? 그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한국 개신교의 반동성애 활동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2007년으로 돌아가보자.


1989년에 설립된 보수 개신교의 대표적 연합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서 성적소수자와 관련한 첫 성명서가 나온 것은 2002년이었다. 김홍신 의원이 낸 성전환자 성별 변경에 관한 특례법안을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는 2003년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동성애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청소년보호법을 개정하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2006년에 대법원의 성전환자 성별 변경 판결을 우려한 세 번째 성명서가 나온다. 한국의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홍석천과 하리수의 커밍아웃이 있었고, 퍼레이드를 비롯한 퀴어문화축제도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개신교계는 지금과 달리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에 보수 개신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내외부적인 치열한 싸움에 빠져 있었다.

김영삼을 통해 '장로 대통령'과 '기독교 국가'라는 꿈을 꾸었던 보수 개신교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긴장한다.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개신교로서는 햇볕정책 등 북한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도 영 마뜩잖았다. 설상가상으로 유명 목사의 공금횡령, 기도원 비리, 대형 교회의 목사직 세습 등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개신교에 대한 반감과 사회적 신뢰도의 추락은 교인 감소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노무현 정부가 탄핵 위기를 이겨내고 4대 입법 개혁안을 내놓자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사학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이기 위한 사립학교법 개정은 개신교로서는 중대한 재산권 침해에 속했다. 미션 스쿨에 다니는 학생에게 예배 선택권이 있는지를 두고 법적 공방도 함께 진행되던 때라 교계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웠다.

마침내 2005년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개신교계는 법안의 재개정을 목표로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정권 퇴진을 외쳤다. 이를 두고 신학자 김진호는 "1940년대 중반 북한 정권이 토지 개혁을 주장하며 기독교의 재산을 빼앗아간 것처럼 민주 정부도 교회의 영토인 미션 스쿨들을 침탈해가는 것처럼 여겼다"고 평가했다. 그들에게 "민주화는 곧 공산화와 같았다"는 것이다. 2007년 7월, 결국 사립학교법은 재개정된다. 사활을 건 목사들의 압력을 못 견디고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마저 무릎을 꿇은 결과였다. 그리고 얼마 후인 10월, 법무부는 차별금지법을 입법 예고했다. 악연의 시작이었다.

사실 처음 개신교계는 차별금지법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립학교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2007년 3월까지만 해도 한국교회언론회에서 길원평 교수가 주도하는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운동을 지지한다는 논평이 간단히 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10월에는 달랐다. 사립학교법 투쟁을 통해 개신교가 정부의 입법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직후였다. 정치인을 중심으로 즉각 '동성애차별금지법안 저지 의회 선교연합'이 결성되고, 시민단체로는 '동성애 차별금지법 반대 국민연합'이 꾸려졌다.

당시 보수 개신교계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했던 논리를 살펴보자. 차별금지법은 '반기독교적인 세력의 의도적이고 집요한 전략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며. '교회나 기독교 교육 기관에서 동성애자 채용을 거부하거나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면 도리어 범죄자'가 된다고 우려한다. 이런 탄압을 시작으로 '국가는 점차 교회를 장악하고 인사권이나 교육 내용, 재정권을 행사'할 것이며 이후 '동성 결혼 합법화와 입양 허용뿐만 아니라 인간 복제를 부추길 위험'까지 있기에 '악법의 제정을 막는 것이 기독교의 정치 참여'라고 주장했다. 핵심은 사립학교법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교계의 이해관계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거부와 두려움에 있다.

원래 차별금지법을 가장 반대했던 곳은 채용과 해고에 제약을 받게 될 전국경제인연합회 같은 재계였다. 재계의 반대를 무마하고 입법 예고되었던 차별금지법은 예상에 없던 개신교계의 반대에 부딪쳤고, 차별 사유에 포함된 '성적 지향'을 기독교 탄압으로 확대해석한 결과 재계가 어부지리를 얻게 되었다. 이후 2010년(법무부), 2012년(통합진보당), 2013년(민주당)에 시도되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은 모두 무산되었다. 2011년에 당시 오세훈 서울 시장이 시장직을 걸 만큼 무상급식 논쟁이 뜨거웠을 때 대형교회에서 신도들에게 '무상급식 반대 투표를 하지 않으면 동성애자가 확산된다'는 문자 메시지를 돌린 일도 있었다. 이때 교회가 걱정했던 것은 동성애 확산이었을까, 무상급식이었을까? (-)


한국 개신교 역사의 뼈대는 한마디로 반공주의다. 한국 보수 개신교 지도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언제든 공산주의와 담합할 수 있는 좌파로 보고 위험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자는 명분으로 직접적인 정치 세력화를 도모했다. 2003년 서울광장 대규모 기도회로 시작된 일련의 보수.반공주의적 시국 집회들은 보수 대연합의 정치 세력화를 드러내는 신호탄이었고, 이로 인해 개신교는 '반공 친미적 극우주의'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2003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에서 분단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공산주의를 척결하는 것이 한국 개신교의 임무라고 외쳤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사립학교법 개정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자신들의 물질적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에 처했다. 2008년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진보 성향의 교육감과 서울 시장은 그들에겐 악몽 같았던 '잃어버린 10년'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혼 증가, 10대들의 임신.낙태, 동성애 등은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런 때일수록 교회가 나서서 사회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겼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2015년 '한국 교회는 동성애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의 최종 병기'라고 천명한다(최종 병기라는 말에는 세계 최대의 개신교 국가인 미국도 동성 결혼을 막아내는 데 실패했고, 이제 한국 개신교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중을 선동하는 이런 구호에 휩쓸리지 않고 보수 개신교의 진짜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북한 선교'라는 네 글자와 만날 수 있다. 김진호는 1990년대에 "교회가 위기의식에 사로잡히는 대신 체제 전복적인 북한 선교 담론으로 자긍심과 우월감을 만끽했다"고 분석한다. 이미 한기총은 1995년에 북한교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해 북한에 3,000여 교회가 재건할 전략을 세우고 교단끼리의 경쟁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아예 교단별로 재건할 교회를 할당하는 밑그림까지 그렸다. 북한에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있지만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2006년 설립된 북한교회세우기연합회는 2014년 북한 개방 후 10년 안에 3,000개의 교회 재건 외에도 1만 2,000개의 교회를 새로 재건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2014년 신년사는 '통일은 대박'이었다. 선교 차원에서 보자면, 북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지구 상의 거의 유일한 땅으로 '선교 대박'의 기회다. 해방 후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개신교가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쓴 것처럼 통일 정부 건립을 개신교가 확실하게 주도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높다. 또 통일 대박을 위해 개신교는 하나로 뭉치고 타종교와의 관계도 확실하게 정리해야 한다.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내부의 차이를 극복할 공동의 '적'이 필요하다.

신학자 류대영의 지적대로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는 신학적.정치사회적으로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독재 정권과 싸우고 민중의 삶을 보듬는 진보 개신교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2007년 차별금지법이나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의 무산 등 동성애의 인권이 차별받고 유린당할 때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진보 그룹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조차도 나서길 망설였다는 사실을 주목해볼 만한 일이다. 지금의 보수 개신교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내부 장치는 전혀 없는 걸까?


2008년 이후 반동성애 활동은 전반적으로 다소 잠잠했다. 그러다 갑자기 2010년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과 선민네트워크가 발족하고, 2013년에는 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2014년에는 인터넷 미디어인 KhTV, 2015년에는 한국교회동성애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에스더기도운동본부와 예수재단 등 반동성애 활동에 주력하는 단체들이 늘어나고, 대형 교회와 교단 차원의 합세도 시작되었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개신교계 내부의 갈등과 분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9년 8월, 기독교계의 UN 총회라고 불리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의 2013년 총회 개최지로 부산이 선정되었다. 개최를 준비했던 교단들은 환호성을 올렸지만, 한기총은 WCC문제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즉각 반대에 나섰다. 1959년에 WCC 가입 여부를 두고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총회와 합동총회로 쪼개질 만큼 오래전부터 민감한 사안이었다. 근본주의와 반공에 기반한 보수 개신교단은 종교다원주의와 공산주의까지 포괄하는 WCC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들은 WCC가 한국 교회를 죽이고 공산주의를 조장하는 '적 그리스도'라며 비난했다. 총회를 반대하는 기도회나 전단지에는 어김없이 에이즈, '남자 며느리' 같은 문구들이 등장했다. WCC를 동성애를 옹호하는 정신 나간 단체라고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한기총에는 큰 파문이 생긴다. 2011년 한기총 대표 회장 선거에 수억 원대의 돈이 오갔다는 폭로로 금권 선거 논란이 일어났다. 한기총은 자진 해체하라는 요구까지 나왔지만, 회장 선출에서 편법만 더 늘어날 뿐 자정의 분위기는 없었다. 결국 2012년에 일부 교단이 빠져나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을 세우면서 한기총은 둘로 쪼개졌다. 2013년에는 이단 해체 문제로 국내 최대 교단인 예장 합동마저 한기총과 결별했다. 이런 분열의 늪에 빠지면서도 WCC 반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2013년 10월 WCC 총회가 열리는 행사장 밖에서도 같은 기독교인들이 저주를 퍼붓는 부끄러운 모양새가 펼쳐졌다.


(한기총은 2013년 WCC 부산 총회를 반대했는데, WCC가 "각 개인들의 각기 다른 생활을 따라 성생활 선택을 지지"했고, 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문란한 사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WCC 총회가 끝나도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2014년 2월,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내부 분열을 이유로 보수 기독교계의 연합 기구인 WEA(World Evangelical Aliance, 세계복음주의연맹)는 10월로 예정했던 서울 총회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한다(사실상 취소한다는 의미다). 이어 7월에는 2016년에 예정되었던 '그리스도교 세계대회'도 취소되었다. WCC 개최 찬반으로 이 대회를 주최할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사이에 분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4년 8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까지 이어졌다. 성당이 문을 닫을 정도로 교세가 약화되는 유럽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더욱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2015년 6월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15년 만에 처음으로 보수 개신교의 조직적인 방해를 받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2010년부터 깊어진 보수 개신교계의 내부 갈등은 놀랍게도 동성애라는 키워드 앞에서는 하나로 봉합되었다. 이단 문제로 협의체를 탈퇴할 정도로 단호한 입장을 보이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명서에는 이단들과도 나란히 이름을 올린다. 정치적 계산이 다르지만 한기총과 한교연은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합치자는 제안을 서로 한다. 봉은사 전철역명은 반대하지만 개신교 중심의 반동성애 운동 단체는 불교에도 손을 내민다. 동성애는 여기서 '공동의 적'으로 기능한다.

에릭 호퍼(Eric Hoffer)는 <맹신자들>에서 공동의 증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이용한 것은 동족의 독일인을 단합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유대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헝가리의 결연한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


동성애를 사랑이나 삶, 정체성이 아니라 성행위로만 다룰 때 정희진의 지적대로 간단하게 사회적 통념에 따라 도덕적 비난거리가 된다.  그리고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자 할 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우월성을 들이대는 것은 흔한 수법이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공존하다가도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성적 낙인이 동원된다. (-)

동성애는 죄이고, 윤리적 타락이고, 도덕적 방종이며, 멸망의 징조라는 주장은 우국충정이나 경건한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에이즈와 항문 성교, '남자 며느리'는 간단하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배치된 장치다. (-) 특히 개신교의 이런 정치 세력화가 '적'으로 해석된 '타자'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전쟁의 담론과 닮았다는 김진호의 지적은 인상적이다. 타자는 '개조의 대상'이며, 타자가 살아남으면 '개신교의 존재 자리까지 박탈해버릴 것이라는 피해 의식'이 교계 지도자들에게 팽배했다는 것이다. 물론, 1순위 적은 늘 '좌파'였지만 '종북 게이'라든지 좌파의 세 종류 중에서 특히 '더러운 좌파'라는 식으로 동성애와 좌파를 엮어 '적'의 자리에 안착시켜 놓았다.

모두가 함께 혐오해야 할 대상으로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 성적소수자가 표적이 된 것은 진심으로 동성애자를 싫어해서도, 성적소수자들이 힘이 없고 마음대로 짓밟아도 꼼짝 못할 만큼 만만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은 1990년대 후반부터 착실하게 그 성과를 쌓아왔다. 사회적 소수자 중에서도 가장 당사자성이 분명하고 일정 정도의 규모도 갖추었다. 개신교는 대중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이미지를 가진 생생한 '타자'이면서 격렬하고도 끈질기게 저항하는 이토록 훌륭한 '적'을 놓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2000년대 후반에 정치적 세력화를 꿈꾸는 개신교와 성적소수자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이 싸움은 어차피 피할 수 없고,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는 '식어버린 인두'다. 한때 낙인을 찍는 인두였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낙인 효과는 작동할지 몰라도 그 지글지글한 열기를 만들어냈던 비인간적 타자화의 논리는 이미 힘을 잃었다. 싸움은 더 치열해지겠지만,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주석들


1) (-) 시우, <혐오 없이, 혐오 앞에서, 혐오와 더불어: 한국 LGBT/퀴어 상황을 기록하는 노트 1>, <<문화과학>>, 2015년 겨울호(84호) (-)


7) 김진호, <'199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비판-사회적 영성화를 위하여>, <<korea journal>>, 2012년 가을호(제52권 1호), 한글 번역본(http://owal.tistory.com/335)


18)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이들이 2014년에 들고 나온 피켓에는 "세월호 선장=NCCK 목사/동성애 퀴어 음란죄=가톨릭과 신앙 일치, 배도죄"가 있었다. 2015년에는 "피땀 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가 주요 메시지였다. 또 퀴어 퍼레이드 반대에 앞장섰던 송춘길 목사는 WCC반대운동연대와 로마가톨릭.교황정체알리기운동연대의 조직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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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들뢰즈의 창 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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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글은 깨끗하고 말은 더럽다"고 언급하죠. 왜냐하면, 말은 듣는 사람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유혹(seduction)'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꼭 전달해야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귀를 열도록 유혹에도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죠.

집에 도둑이 들면 주위에 있는 무엇이라도 도구로 삼아 손에 들고 휘둘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직면한 절실한 문제가 우리 주변의 학문을 필연적인 도구로 만드는 것이지, 그 태생이나 기원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기호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미지의 어떤 것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바로 이 기호의 의미를 이렇게 흥미로운 방식으로 알려주죠. 가령 남녀 간의 연인 관계에서 절실하게 필연적으로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미지의 어떤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애인의 거짓말입니다.

애인의 거짓말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당혹감, 배신감, 궁금함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 이면의 진실을 찾고자 나서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지식은 좋은 것이다. 참된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니 참된 것을 한 번 찾아보자' 이런 식으로 미리 준비된 마음가짐에 따라서 진실을 찾는 게 아닙니다. 마치 애인의 거짓말처럼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밖으로부터 강요받고서야 진실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욕망을 어떤 근본적인 것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채워 넣으려는 갈망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전형적인 플라톤 식 사고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초월적이고 모범적인 것을 상정하고 현재를 결핍된 상태로 가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들뢰즈는 욕망이 사실은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생산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엔 이런 욕망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의 삶을 살도록 하는 추동력이고 더 나아가, 사람들 간의 관계 또 세상을 바꿔가는 힘이죠.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5729



소크라테스가 '아테네라는 암소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등에 역할을 하겠다'고 얘기하고 나섰다가 아테나 시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 죽었던 기원전 수백 년 전부터 철학은 우리를 평균적인 일상성 속에 머물지 못하도록 우리를 괴롭히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의미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건 죽은 자들과 맞바꾼 모종의 등가물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한없이 죄스럽게 느껴집니다. 죽은 이들은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하는데, 왜 삶을 소유한 우리는 삶에다가 덤으로 의미나 교훈 같은 것을 죽은 이들에게서 또 빼앗아 가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야 할 자가 살아있기에 뭔가 깨달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체험이나 학습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구체적인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입장 차이를 넘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주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을 세월호 비극을 경험하고 추모함으로써 알게 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경험은 앞으로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정치적인 힘을 집단으로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 정도는 감히 드리고 싶습니다. 세월호 앞에서 사유가 움직인다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 때문에 움직인다고.



_서동욱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5731&ref=nav_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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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고종석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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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어느 날, 생브누아 거리

 

너는 내게 무얼 기다리느냐고 묻는군.

나는 대답한다, 모른다고.

기다리는 것.

바람의 변전變轉 속에서.

어쩌면 내일 나는 네게 또 편지를 쓸 거야.

 

우리는 이걸로 살 수 있어.

웃고 뒤이어 우는 걸로.

 

 

1894년 10월 14일

 

1914년 10월 14일. 여기서 제목은 저자에게 말고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 제목은 그러므로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 제목은 또 이걸 기다린다. 하나의 제목을, 하나의 시멘트를.

나는 숙명의 날짜에 바짝 다가서 있다.

그 날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날짜는 금빛 종이 위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남자의 금발 머리 위에 새겨져 있다.

어린아이의 머리.

나는, 난 이걸 믿는다. 나는 어린아이의 머리와 나란히 씌어진 것을 나를 넘어서 믿는다.

그것은 기록의 잉여다. 그것이 기록의 한 의미다.

그것은 또한 거길 스쳐지나간, 그 어린아이를 스쳐지나간 사랑의 향기다.

 

욕망의 미지未知를 죽도록 읽고 싶어했던, 한 어린아이의 몸내음을 맡았던 방향 없는 사랑.

독서 텍스트가 지워질 때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

 

 

10월 15일

 

나는 내게 꼭 들어맞는 자유 속에서 나 자신과 접촉하고 있다.

 

 

침묵, 그러고 나서

 

내게는 본보기가 있어본 적이 없다.

나는 복종하면서 불복종했다.

글을 쓸 때, 나는 삶 속에서와 같은 광기에 휩싸인다. 글을 쓸 때 나는 돌덩어리들을 다시 만난다. 『태양을 막는 방파제』의 돌들을.

 

 

1994년 12월 25일, 파리

 

어린아이들의 비가 내렸지, 햇빛 속에서.

행복과 함께.

 

 

3월 25일 토요일

 

수십 년이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 것이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세상의 이편에 있다.

죽는다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

삶의 어떤 순간에, 사물들은 끝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 사물들이 끝난다고.

바로 그렇다.

 

 

성 금요일

 

네 눈물 속에, 네 웃음 속에, 네 울음 속에

날 데려가렴.

 

 

같은 일요일

 

선한 신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너야. 넌 그걸 철석같이 믿어야 해, 너는.

 

 

6월 28일

 

사랑이라는 말은 존재해.

 

 

침묵, 그러고 나서

 

난 삶을 사랑해, 비록 여기 이런 식의 삶일지라도.

좋아, 난 말들을 찾아냈어.

 

 

침묵,그러고 나서

 

삶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아무도 그걸 모르지. 살려고 애써야 해.

죽음 속으로 뛰어들어선 안 돼.

이게 다야.

이게 내가 해야 할 모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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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몸 테마와 운동 2
트레이시 워 편저, 아멜리아 존스 개관, 심철웅 옮김 / 미메시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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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멜라 갤러리에서 가진 첫 번째 상업적 개인전에서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는 갤러리 공간 안에 자신을 가두었다. 일반인들은 문간과 거리 쪽에 있는 창문을 통해서만 퍼포먼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꿀과 금빛 잎사귀로 뒤덮은 채, 죽은 토끼를 안고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는 죽은 토끼를 갤러리 벽에 걸린 그림 쪽으로 안고 가서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토끼의 앞발을 그림에 걸치게 한 채, 그림의 기원과 의도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그림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토끼에게 설명했다. ......토끼는 완고한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많은 사람들에 비해 이해력이 더 높다. ......나는 토끼에게 그림이 의미하는 진정 중요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저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면 될 뿐이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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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남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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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경리 여직원인 자닌은 보러 갔다. "우리 곁을 떠나시겠군요...... 이젠 부자이시니까요....... 정말 이 동네에 머무르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당신처럼 어수룩하고 외로운 분이 어디서 사시려고?...... 아, 그렇지. 가정부를 둘 수 있으시겠네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한동안 그녀는 내 가슴속에서 쥘리에트를 대신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녀는 장시간 계산대에 붙어 있도록 길들여져 움직일 줄을 몰랐고 비만증만 더해갔다. 자닌은 내가 남들과 다르게 볼품없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난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난 우리 시대의 모든 인간처럼 회의적이고, 꿈도 사는 목적도 없으며, 삶이 피곤하여 쉽사리 지쳐버리니 가능한 한 적게 일하고(달리 방도가 없으니), 이 회한과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술과 좋은 음식을 즐긴다.



뤼시엔은 자리를 뜨며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후회하는 듯이. (-) 우리는 서로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우리의 사랑이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상상할 만큼 순진했다. (-)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사랑은 태산도 넘고 무쇠도 부수며 온갖 장애를 넘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우리가 집어치우고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무능 때문이다. '위대한 사랑'은 포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

 

 

(-) 영화를 본 후에는 잠깐 산책을 했다. 멍하니 진열장을 바라보다가 여자들을 보려고 조금 정신을 차려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가끔 영화를 한 편 더 보러 가기도 했는데, 대개 범죄영화였다. 혹은 선술집 테라스에서 맥주를 한두 잔 비웠다.

살짝 심심했다. 일요일 오후보다 쓸쓸한 것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젊은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가고, 배가 부른 아내가 유모차를 밀고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을 죽여버리든가 내가 죽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맥주 서너 잔째부터는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워졌고, 심지어 유쾌해지기까지 했다. (-)

 

 

"일요일 어떻게 보냈어? 재미있었나?"

"너무 웃어서 배꼽이 아플 지경이야."

자크는 유부남이었다. 그는 마누라와 함께 영화관 가는 것을 싫어했다. 혼자서 아니면 다른 여자와 가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혼자 가는 것이 싫었는데, 막상 화면 앞에서는 그것도 잊어버렸다. 나는 내가 본 영화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는 움직이는 그림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쫓고 쫓기고, 서로 싸우고, 큰 소리를 내며 총으로 서로 죽이는 걸 보았다. 자크는 영화를 선별했다. 아무거나 보러 가지 않았다.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본 영화에 대해 내게 길게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도 나만큼이나 지루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털어놓지는 않았어도 말이다. (-)



나는 반항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체념하지도 않았다. 무엇을 체념해야 할지, 또는 기쁘게 살려면 어떤 사회를 설계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슬픈 편도 즐거운 편도 아니었으며, 그저 머리에서 발끝까지 거기 있었다. 이런저런 사회가 무엇을 한다 해도 이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일 뿐이라는 세계관에 사로잡힌 채. (-) 그렇지만 나도 두세 번쯤 반항심을 느낀 적이 있었다. 때로는 사업상의 식사 후에 익명의 사원이나 이사회의 나리들이 사무실을 감사하러 오는 일도 있었다. 이는 이십사 시간 전에 예고됐다. 우리는 쓸고, 닦고, 수염도 단정히 바싹 깎고, 빳빳이 다림질된 작업복을 입은 채 나리들을 기다렸다. (-) 그들은 우리에게 인사말을 건네지도, 우리의 인사에 답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보관 기록과 서류를 검토하고 사장의 설명을 들었다. (-)

그들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자크 뒤퐁이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저들을 먹여 살리는 거야. 우리의 땀과 고생이 저들을 살찌우는 거라고."

자크 뒤퐁의 단언은 표현 그대로라면 조금 과장되었다. 그나 나나 나름대로 편하게 앉아 살았을 뿐 땀 흘려 일한 적은 없었으니까 내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자들 얼굴이 불콰한 꼴로 봐서 머지않아 뇌일혈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크 뒤퐁과 나는 무엇인가? 두 인간, 30억 마리의 다른 벌레들 사이에 낀 두 마리의 가련한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리들도 우리 부류의 30억 마리 중 예닐곱일 따름이다. 그들을 누구로,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사회가 바뀌건 말건 나는 그 부산물일 뿐이었다.



(-) 호텔에서 보낸 마지막 날들은 기쁜 동시에 우수에 찬 나날이었다. 모든 과거, 자닌과 쥘리에트와 뤼시엔, 회사에 가느라 매일 지나다니던 거리, 술집, 이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인생은 아름답다. 사무실의 먼지와 쓸데없는 서류 나부랭이 사이에서 보낸 삶. 꼽추 노파 청소부가 무척 애를 쓰건만 일손이 부족해서 저녁에 퇴근해 돌아갈 때까지 헝클어진 채 있곤 하던 호텔 침대. 아침마다 일어나기, 출근부가 여태 있기를 바라며 미친듯이 회사까지 달려가던 일. 지각하지 않아서 출근부에 서명할 수 있었을 때의 환희, 출근부를 걷어가고 삼십 초 후에 도착했을 때의 격분. 이 모든 것이 뒤늦게 발견한 행복으로 보였다. 먼지와 혼잡한 길, 나처럼 일터로 모여들던 사람들, 수많은 잿빛 얼굴들, 우리 각자가 자기도 모르는 채 간직하고 있는, 구름에 지나지 않은 태양을 감춘 얼굴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었다. 과거란 항상 아름답고 다정하며 그리운 법인데 이를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에게는 장래의 가능성 같은 것이 필요하다. (-)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후회하니, 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증명해준다.



감자튀김을 곁들인 청어가 도착해 일종의 몽상에서 나를 끄집어냈다. 보졸레 포도주가 나오자 나는 한 잔을 채웠다. 잔을 입에 대기 직전 구름이 열리더니, 백색 식탁보, 접시, 청어, 술병에 햇살이 홍수를 이룬다. 단숨에 잔을 들이켜니 마치 태양도 내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듯하다. (-) 나는 아직 젊고, 내 인생에 햇살 드는 나날은 아직도 않이 남아 있으리라. 고개를 돌려 식사중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른 빛 속에서 사는 다른 인간들이다. 다시 접시에 코를 박았다. 아무런 식욕도 없이 습관적으로 식사하러 왔는데, 햇빛 때문인지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 커피를 마신 후에 생크림을 얹은 초콜릿 케이크를 시켰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앉아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한 번도 못 본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무척 좋았다. (-) 집에 들어서니 또다시 긴 여행에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수위 아주머니가 커튼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곤 다시 닫는다. 계단을 오르는데 3층에서 한 부인이 강아지를 끌고 나왔다. 개는 나를 보고 짖어댔다. 그녀는 개를 향해 "필루슈, 가만있어"라고 말하더니 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짖지만 곧 익숙해져요."

"괜찮습니다, 부인. 괜찮아요."



나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대낮이 더 나았다. 어두워지면 불안해졌다. (-) 거리가 어두워 반쯤 암흑인데도 나에게 안도감을 주던 웅성대는 군중이 기억난다. (-) 두려워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든 것이.(-) 나아졌다. 일종의 쾌활함이랄까. 자주 이렇게 유쾌해지고 갑자기 행복해지지만, 이런 느낌은 그리 강하지 않아서 곧 사라진다. 내게는 슬픔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지만,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이란 내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을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을 응시하는 것. 아주, 아주 주의깊게 바라보면 갑자기 이 세상 모든 것을 마치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해졌다.

 

 

내가 보았던 모든 길과 도시, 거리, 그리고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나는 이 세상에 던져졌고, 그런 사실을 마치 난생처음 안 사람처럼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끔 느끼곤 하던 세상의 이런 생소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것은 나 그리고 우리가 습관에 따라 으레 해왔던 배우나 엑스트라 역할에서 벗어나, 세상에 에워싸여 있으나 세상 속에 있지 않은 사람, 마치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떨어져 더이상 참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 불안감이 사라졌다. (-) 왜냐하면 이 보편적 기계와 이 사람들, 이 거리들과 이 움직임들은 매번 추하지 않으면 아름답고, 좋지 않으면 나쁘고, 유리하지 않으면 불리하고, 위험하지 않으면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일종의 도덕적 중립을 얻기에 이르렀다. 혹은 미학적 중립을. '그들은' 더이상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나는 식당 안에서 그들이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모든 것이 덧없는 환영일 뿐이며 일종의 무(無)의 환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거리에, 일종의 거리, 일종의 공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나머지는 구분할 수 없는 '이 모든 것들'이었다. (-)

 

 

(-) 나는 파란 꿈은 두세 번밖에 꾸지 않은 것 같다. 파란 꿈이란 밝은 햇살 속에서 도망치듯 꺼져가는 바람과 그림자만 느낄 수 있는 새벽녘에 꾸는,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할 수 없어서 안타까운 꿈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이 걸레처럼 찢어져 사라져버린다. 괴롭지 않으려면 체념해야 한다. 나는 체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산다. 그리고 자주 그럭저럭 체념하는 데 성공했다. 진실하고 깊은 체념은 아니었다. 가끔 화가 치밀기도 한다. (-)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앞으로도 배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 벽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나는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무지 속에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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