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의 기초>

...초판이 1967년인 걸 몰랐네.
온갖 러닝앱이 난무하는 이때 이 책에 실린 12주차 프로그램을 스스로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고
초판일과 내용을 고려할 때 101 매뉴얼은 아니고 조깅을 시작한 이들이 읽어볼 만한 고전이 맞을 듯.



인상적인 문장

① 1킬로미터를 4분 21초(?!?!)보다 빠르게 뛰는 것은 조깅이 아니라 달리기다.
천천히 달리면 되는 줄 알았지 조깅과 달리기를 가르는 기준이 있는 것도 몰랐지만 4분 21초라니. 선수 수준 아닌가. 거북이 친구인 나에게만 놀라운 것인가.

② 훈련이지, 혹사가 아니다. 절대 전력을 다하지 말라.
12월 영상 1도인 어느 날 호기롭게 나갔다가 2/3 지점에서 긴급 후퇴. 햇빛 드는 코스는 괜찮았는데 해가 없는 곳으로 들어서서 맞바람까지 맞으니 동태가 됐다. 맞은편 달리는 어르신에게 경외의 눈빛을 보내고 오들오들 떨면서 돌아왔다.

미친 짓이었다. 요즘 들어 달리기할 때 관절도 전과 다른 느낌인데 자신을 너무 과신했다. 방구석에서 요가나 할 걸. 나에게 달리기는 훈련도 아니고 생존을 위한 '조금 빨리 걷기'일 뿐인데 혹사가 웬 말이냐.




<64>

밀크레프는 '천 겹'의 크레이프라는 이름처럼 크레이프를 얇게 켜켜이 쌓아 만드는 게 관건이다. 요코야마 히데오가 밀크레프를 만들면 정말 천 겹을 쌓아서 만들 것 같다. <64>가 그렇다. 천 겹의 소설. 그 밀도가 부담스러운 순간도 있지만 계층과 층위가 켜켜이 만나 하나의 종장을 이루는 촘촘함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을 매만져 소설을 내놓은 작가는 말한다. "제 스타일로 완성한 이야기의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천히 구경하십시오." 




📖
미카미는 구라마에의 보고서를 읽었다.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익명 발표의 어두운 일면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익명이라는 천이 뒤덮은 것은 기쿠니시 하나코의 이름이 아니라 메이카와 료지라는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는 증거였다.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고 해도, 평생 단 한 번 신문에 이름이 실릴 기회를, 그 기사를 본 누군가가 그의 죽음을 애도할 기회를, 익명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빼앗긴 것이다.


미카미는 보고서를 든 손을 힘없이 내렸다. 기자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그를 보고 있었다. 모든 눈동자가 미카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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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현경 홍보 담당관 미카미 모리유키는 형사부에서 홍보실로 발령난 것을 좌천이자 ‘낙인’으로 여기는 조직 내 경계인이다. 정보 유출에 민감한 형사들에게 미카미는 경찰 동료라기보다 외부인에 가깝고 홍보실 직원들에겐 어차피 때가 되면 본적으로 떠날 형사부 사람이다.

조직 내 엘리트 관료와의 갈등, 언론과의 대립, 거기에 고등학생 딸의 가출까지 일련의 사건에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는 미카미의 모습은 때론 자기 연민과 자조의 다름 아니다. 경찰 소설의 ‘멋있는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외모까지 대놓고 못생겼다고 나온다. 미카미를 쏙 빼닮은 딸은 신체이형장애를 겪다 집을 나갔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삶의 궤적은 가냘픈 철사처럼 구부러지고 펴지기를 반복하면서 방향을 잃고, 그럼에도 길을 찾고, 어지러운 모양만큼 생채기를 내지만 어느덧 새살도 돋는다.

이런 점에서 <64>는 성장 소설이라 할만하다. 쇼와 64년에 일어난 아동 유괴 살해 사건과 모방 범죄로 긴박하게 내달리는, 미스터리 소설의 짜릿함보다 경무과 조사관 후타와타리의 "흰자와 검은자가 평범하게 어우러진 눈"을 지긋이 바라보는 미카미의 담담함. 딸의 "생존의 조건"을 바라는 용기. <64>의 천 겹이 만들어 낸 클라이맥스는 이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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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권의 추리소설을 읽었다.



고릿적 아이패드 미니를 리더기 전용으로 탈바꿈하고, 눈도 침침하니 TTS를 활용해서 속독(?)도 하고 온갖 자투리 시간에 틀어 놓으니 여흥의 99.9%가 독서로 수렴되긴 했지만 내가 봐도 믿기지 않는군.

종이책의 물성을 찬양하던 나인데(그리고 여전히 그렇지만) 아이패드에 무광 필름 붙여서 글씨도 막 크게 크게! 해서 보니까 너무 좋더라는. 그리고 책에 '못생긴' 흔적 남기기를 싫어하는 나에게 깔끔한 하이라이트 표시와 메모는 너무 유용하다. 미니라 가볍기는 또 얼마나 가벼운지 핸드폰보다 가볍다. 해서 이북 리더기에도 혹했으나, 일단 미니가 숨을 다 할 때까지 버텨보기로. 


하지만 취침 때 듣는 건 개인적으로 별로였다. 웬만하면 머리 대면 자는 타입인데 책 듣다 솔솔 잠이 올라치면 얘기를 마저 들으려는 무의식의 발로인지 문득문득 깨는 바람에 잠들기까지의 시간이며 그 질이 뚝 떨어지는 느낌. 오디오북도 개인 취향으로는 불호에 가까운데 정제되고 극화된 면이 오히려 몰입을 어렵게 한다. 시리 친구들 같은 TTS가 적당히 읽어 주는 게 나은 듯. 영문이 나올 때 쓸데없이 정직한 발음과 '우크라'대학 같은 읽기는 화가 나긴 하지만.


올해 읽은 소설의 2/3는 추리소설이 차지하고, 추리소설의 2/5를 히가시노 게이고가 차지. 게이고 읽기에 지쳐서 틈틈이 다른 작품도 읽다 보니 (나만) 새롭게 발견한 작가도 있고 제법 보람찬 독서 생활을 했다. 재독도 있었는데 놀랍도록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끝까지 잘 읽었다.


노션으로 정리하니 이런 게 좋구나. 편의에 맞게 볼 수 있고 별 반 개도 주고. 내년 DB도 만들었다. 근데 신문물에 밝은 인간이 아니라 은근히 귀찮기도 하다. 글, 특히 인용이 블록 단위로 써지는 거 어떻게 안 되나. 해서 독서 관리 앱 하나 받아두긴 했다. 북플도 제대로 활용 안 하는 마당에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한 권 정도 더 읽을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딱 떨어지는 숫자가 좋으니까 90으로 마무리. 맘에 든다. 다독가가 된 것 같아 자화자찬 북 치고 장구 치고 후후후. 

    


간략한 소회 

① 중화권 작품

- 옌롄커

추리/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올해 별 다섯 개 책 중 하나가 <딩씨 마을의 꿈>이라 써본다. 

옌롄커 하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먼저 떠오르는데 맛있는 건 제일 나중에 먹는 나답게, 그러니까 붕어빵은 머리부터 먹는 나답게 묵혀두고 있었다. 그래서 읽은 게 <딩씨 마을의 꿈>. 읽다 보면 원문이 궁금해지는 작품이 있다. 중드 <삼국>을 보며 중국어를 배워볼까 하던 의욕이 십수 년 만에 고개를 들었다(가 금세 수그러졌지만). 중국어는 안 배워도 옌롄커는 좀 더 읽어 보련다. 아, 위화도 열심히 묵히고 있는데 내년에는 읽으리라.


📖

“웃음거리는 무슨, 목숨이 길든 짧든 어차피 한평생인 게야. 이제 와서 남 흉을 봐서 뭐하겠나.”

삼촌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금빛 관 안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심장이 터지고 폐부가 찢어지도록 부르짖었다. "할아버지,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빨리 와서 절 구해주세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도록 부르짖었다. (...) 그때 학교 전체와 딩씨 마을 전체, 평원 전체에 목이 찢어질 듯한 내 외침이 가득 울려 퍼졌다. 뜨겁게 말라버린 평원 위에 하늘과 땅을 뒤덮을 듯이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딩씨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학교 뒤쪽의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딩씨 마을의 꿈 中
















    


- 찬호께이

<13.67> 

알라딘 피드에 의하면 5년전 읽고 싶어했다나(뭐라고요?). 2022년 드디어 읽었다.

마지막 서너 장이 모든 것을 말하는 작품.

"일처리가 심하게 융통성이 없고 선임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그가 어떻게 '천리안'으로 거듭날 수 있었나. 그의 마지막은 진한 아이러니를 더한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

반전에 의한 반전을 위한 반전이 너무 많다. 

<13.67>처럼 수미상응이 돋보이는 형사물로 시마다 소지의 말처럼 "21세기 본격추리라는 새로운 용어와 창작 방법"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애정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

나는 여자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맹세했다. 당신들을 위해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콧속으로 피비린내와는 거리가 먼 향긋한 체취가 스며들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느릿느릿 나를 향했다. 네 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수고해요."

고운 입술이 벌어지더니 웃음을 머금고서 내게 말했다. 

- 서장 中



<마술 피리>

호프만 박사의 오른팔(+왼팔) 한스의 활약으로 즐거운 일독을 했으나 고전/전래 동화에 흥미가 없으면 그닥 매력있는 서사는 아닐 듯.


<디오게네스 변주곡>

마지막 작품 포함 몇몇을 제외하면 다소 심심하지만 음악으로 단편을 정리한, 컨셉 앨범 비스무리한 아이디어는 높이 사고 싶다. 찬호께이의 구성 능력이 돋보이는 단편집.



수미상관식 구성이나 낱 것을 컨셉에 맞게 (재)배열하여 전체 서사를 극적으로 만드는 게 찬호께이의 특기인 것 같다. 그리고 작품 속 음악, 영화, 드라마를 보면 이 작가, 나랑 은근히 취향이 비슷한가? <디오게네스 변주곡>의 경우 음악이 없었으면 별 하나 뺐다.... 반면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같은 이유로 별 반개 더 주고 싶은데 알라딘에선 할 수가 없네.

















- 쯔진천

<동트기 힘든 긴 밤>

얼개는 알고 있어서 예의 사회 비판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한 인간을 이토록 끈질기게 했나. 작은 공명심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떤 것'이 되어 한 인간의 삶에 뿌리내린다. 적자지심, 그것은 신념이라기엔 무모하고 오기라기엔 냉철하다. 여운에 젖어 뒤적여 본 소설의 정체는 반전 그 자체. 중국 작가의 행보를 이역만리 방구석에서 속속들이 알 길은 없으나 감흥이 식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몇 번의 재심 끝에 겨우 출간됐다는 건 중의법이었나? 한국에서 드라마화할 계획이었나 본데 이래저래 흐지부지된 듯. 현재는 어찌 됐나 싶지만 굳이 찾아볼 여력은 없...


<무증거 범죄>

두 '천재'의 대결 구도라는 점에서 작위적인 연출은 어쩔 수 없지만, 허무한 종장은 되려 현실적이다.


<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

가볍게 웃자고 읽었는데 생각 외로 탄탄하다. 개인적으로 <동트기 힘든 긴 밤>, <무증거 범죄>보다 구성이 나았다. 취향 저격의 풍자, B급 유머의 A급 완급 조절이 일품.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는데 술술 읽히는 것은 물론 플롯, 묘사, 캐릭터 구축 전반에서 반 수 위 같기도. 세 작품 밖에 안 읽기는 했지만. 생소한 중화권 현대 문학, 그중에도 추리소설은 찬호께이, 레이미 이름 정도만 알았지 그야말로 무지의 영역이었다. 좋은 작품으로 2022년이 즐거웠고 쯔진천 읽기(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볼 때)는 올해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히가시노 게이고 40+1

2022년을 추리소설의 해로 만들어 준 장본인. 이유는 기억도 안 나는데 올해 히가시노 게이고 모아 읽기나 해보지 싶어 한두 권 읽다 보니 이 지경이 돼버렸네. 화수분 게이고답게 아직 읽을 책이 남았지만, 당분간은 안(못) 읽는 것으로.

왜 [40+1]인가 하면 <눈보라 체이스>는 완독을 안 해서(방치 중).


게이고식 블랙 '유모어'에 엄지척을 준다면, '겨울 스포츠 시리즈'는 내 취향의 극단. (스키장에서 굴러 내려오는 몸뚱이라 그런지) 기술 설명 이런 거 흥미 하나도 없고, 일어나는 사건에도 별 감흥이 없고, 전개도 궁금하지 않다. 스노보드 마니아인 작가는 애정을 담아 쓴 것이겠지만. <조인 계획>은 그럭저럭 읽었다. 스키 실력을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름다운 흉기>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장편소설 살인 사건>>에서 역설하듯 어렵지 않고 군더더기 없다는 게 게이고의 장점. 가볍지 않은 소재도 쉽게 쉽게 쓴다. 역으로 말하면 깊이가 덜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광설이나 tmi 없이 게이고만큼 담백하게 써내는 작가를 꼽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형사/탐정이 등장해야 미스터리 읽는 맛이 나는데 ― 오가와라 반조 경감은 구닥다리라고 신랄하게 까지만 ―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가가 시리즈'가 끝나다니 아쉽다(덩달아 슈헤이도 못 본다). 왠지 양산화되고 식상하다 느낌이 들다가도 <신참자> 같은 작품은 왜 게이고가 롱런하는 작가인지 알게 해준다. 

























올해를 보람차게 해 준 히가시노 게이고로 이번 정리 마무리. 

나머지는 2023년을 기약하는 것으로. 



📚2022 추리소설의 해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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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독>

먼저 읽었던 <우물과 탄광>이 고단함 속 온기라면 <어리석은 자의 독>은 그야말로 막장의 처절함이랄까. 60년대 폐광촌을 시작으로 반세기 시대 조류에 쓸리고 발버둥 치는 인간 군상을 곱씹게 된다. 

1963년 지쿠호 미이케 탄광 사고가 추리 소설의 얼개에 담겨 각 인물의 '주판알'과 '독'은 저마다의 업을 짓는다. 미카와 갱 탄진 사고는 전후 최악의 탄광 사고라고 한다. 사고 40년이 지나 피해 보상 소송은 마무리됐지만 에너지 전환 정책과 맞물려 소리 없이 밀려난 폐광 노동자들은 여전히 일산화탄소 중독 후유증에 시달렸다.

소설 속 한 문장이지만 지쿠호에는 한국인, 조선적이 많았다. 식민지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이들이 터를 이룬 것이다. 이 때문인지 폐광촌 이야기는 더욱 마음을 짓누른다. 60년대 미이케 노동 투쟁은 총노동의 패배로 끝났지만 전후 일본 노동 안전 운동의 분기점이 된다. 하지만 이조차 남의 일인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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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항공기 사고가 일어난 지 30년이 되는 해라는 뉴스는 TV에서도 여러 번 나왔다. 성대한 위령제가 열렸고 유족과 일본항공 사원, 지역 주민들이 그날을 애도했다. 단독기 사고로는 세계 최다인 520명이 목숨을 잃은 그야말로 끔찍한 사고였다. 매년 사고가 일어난 날이 다가오면 사람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뉴스가 꼭 나온다. 절대 잊을 수 없고 두 번 다시 같은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호소했다. 그것은 옳은 동시에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사망자 수에 필적할 정도의 희생자를 낸 탄광 사고가 과거 자주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1963년 일어난 미쓰이미이케미카와 탄광 탄진 폭발 사고 때는 458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살아남은 이들은 일산화탄소 중독증 환자가 되어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에 시달렸고 내 아버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1965년에는 미쓰이야미노 탄광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희생자는 237명. 지하 갱도에서 일어난 탄광 사고로 수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사망했지만 그런 일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일본항공기 사고보다 고작 4년 전 일어난 호쿠탄유바리 탄광의 가스 유출 사고 때는 갱내 화재를 진화하려는 광부들을 그대로 남겨 두고 갱도에 물을 쏟아 부었다. 갱도를 수몰시키는 방법은 살 수 있는 사람도 전부 내팽개치는 것이었다. 지하에 있는 광부들은 불길과 물길로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시신을 찾은 건 사고가 일어난 지 반년이 흘러서였고 최종 사망자는 93명을 기록했다. 이후 나라에서 석탄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자 땅 밑에서 일어난 사고들은 모조리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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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관통하는 시대 흐름과 '껍데기'라는 인물은 <13.67>의 어떤 이를 떠오르게 한다. 추리 소설로는 다소 아쉬운 면면이 있지만 비단 추리물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도 맞닿아있다.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

콧바람 내뿜으며 술술 읽거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책장을 탁 덮거나. 물론 난 전자다. 한데 (한국인의 피 때문인지 쓸데없는 예민함인지) 다나카 서장이 몰두하는 프라모델 종류는 은근히 거슬린다. 이런 찜찜함에 별 하나 뺀다. 결국 '잃어버린 것'을 찾지 못하는 걸 보면 엘리트 관료주의를 풍자하는 고도의 장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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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뭐가 ‘좋았어!’라는 거야? 이 사람들은 들개가 아니야. 미친개야!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이 들개들, 자신의 주먹이 으깨져라 후려치다니……. 전혀 제어가 안 되고 있어. 역시 미친개야. 나와는 태생이 달라.


아버지도 들개였어. 


역시 관료다워! 대단하다, 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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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락의 아내>

자기 고백에 온도가 있다면 톨락의 그것은 노르웨이의 겨울보다 차가울 듯하다. 그의 이야기에 자꾸 몸서리가 쳐지는 건 내가 추위를 싫어하는 탓이겠지.

간결한 호흡으로 무미건조함과 애수를 넘나들며 이토록 찝찔한 내용을 담아내는 작가의 공력이 만만치 않겠다 싶은데 저자 소개를 보니 노르웨이 대표 작가인 모양이다. 번역된 작품으로 동화 몇 편이 있는데 <톨락의 아내>가 보여주는 특유의 형식과 필치는 이런 이력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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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곁에는 잉에보르그도 없다. 내 삶의 작은 불빛이 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나. 변하지 않은 나. 듣고 있나?


왜 모두들 내게서 세상을 빼앗아 가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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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고 모아 읽기'라는 번듯한(!) 이유라지만 올해는 (추리) 소설 편중의 해였다. 소설 한두 권 읽은 해도 있더니 이놈의 독서 편식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게으름도. 정리는 도대체 언제쯤 할 수 있으려나. (하기는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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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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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과 괴담과 우화의 삼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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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의 최전선 -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주제와 그 사유의 지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박성관 옮김 / 이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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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이 오기 전 날아오르는 부엉이 

이 책은 현대 철학의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다. 정의론, 승인론, 자연주의, 마음 철학, 새로운 실재론. 시작은 존 롤스(1921~2002)이고 끝은 마르쿠스 가브리엘(1980~)이다. 그야말로 '현대 철학'의 '최전선'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아오른다"는 말이 있다.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로 철학은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다. 철학(지혜)적 판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거리두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철학을 알아가는 건 황혼이 오기도 전에 날개를 편 부엉이 같달까. 밤과 달리 굼뜨고 눈도 덜 뜨인 부엉이. 


<현대 철학의 최전선>은 개론서지만 각 장의 테마를 요약정리하거나 사상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논의의 지점을 짚어 가며 다음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이정표에 가깝다. 철학의 역사만큼 수많은 철학자의 주장과 반론이 쏟아져 나온다. 아마르티아 센, 화이트헤드, 딜타이 등 언급하는 수준으로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이에 저자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물줄기를 스스로 헤쳐 가길 요구하며 이 책은 '이것으로 끝!' 하는 입문서가 아님을 미리부터 밝힌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섯 가지 사상 중에서도 자연주의, 마음 철학, 새로운 실재론은 강 인공지능이라는 화두와 맞물려 가장 '핫'한 주제다. 하나의 영역 안에서도 다양한 논의와 접근을 다루는 실로 끓는 솥단지 같다.




> 한 길 사람의 마음을 알기까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알기 어려우면 두세 길도 아니고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속담이 생겼을까. 한 길은 거의 3미터로 어찌 보면 꽤 깊다. 실상 한 길은커녕 한 치의 사람 속, 앞날도 모르는 게 우리 아닌가. 4장에서는 애매한 말의 용법을 바로잡아 통일 과학적 세계를 세우고자 한 빈 학단부터 자연주의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다. 50페이지도 채 안 되지만 밀도가 상당하다. 


특히 진화론적 관점에서 심-신의 관계와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는 데니얼 데닛의 논의가 흥미롭다. 자유의지에 관해 데닛은 미래는 현재에서 미리 결정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를 시뮬레이션하기에는 뇌의 정보 처리 장치와 언어를 비롯한 각종 외부 장치의 한계, 그리고 너무나도 복잡한 주변 환경과의 관계 때문에 모두를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는 이유다. 


5장 마음 철학에서는 마음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다양한 전략과 그 비판을 개괄한다. 마음이 의식을 가진 뇌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마음)에 '단순히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것 이상의 실체가 있는가, 바로 데카르트가 미완의 과제로 남긴 그 의문(168)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데닛과 존 설의 논쟁은 이 책의 종장인 새로운 실재론까지 그 영향을 드리운다. 엘런 튜링에 의해 재점화된 강 인공지능 문제는 마음 철학의 핵심이다. 존 설은 의식은 뇌의 기본 작용으로 발생한다는 물리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하지만 행동주의와 기능주의에 반대하며 강 인공지능을 부정한다. 특히 지향성에서 그러한데 이에 대한 '중국어 방' 사고 실험이 유명하다. 문장에는 대상이나 사태에 대한 우리의 지향성이 담기기 마련이다.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장이 표상하는 타인의 지향성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AI는 중국어 규칙 프로그램을 '실체화'할 뿐 지각, 이해, 학습 등 인간의 다양한 의식 형태의 근저에 있는 지향성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존 설의 주장이다.


존 설의 '중국어 방'에 대응하여 데닛은 '다원적 초고'-'팬더모니엄'이라는 의식 모델을 제안한다. 다원적 초고란 학교나 직장에서 협업 툴을 사용하여 다수의 참여자가 하나의 원안을 다듬어 가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팬더모니엄은 '진정한 자기'에 반하는 개념으로, 역할이 확정되지 않은 수많은 도깨비(뇌 내 모듈)가 병렬 분산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중국어 방'이 참이면 인간의 뇌 역시 생물학적 조작이 이루어질 뿐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된다.     


데닛은 합리적인 행위체로서 대상이나 시스템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면 지향성이 있다고 본다. 그의 관점으로는 존 설이 주장하는 1인칭 존재론과 결합한 지향성은 무의미하다. 단일한 자기 이야기는 허구이며 그때그때 말하기를 통해 자기는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데릭 파핏의 경우 장기적인 변화라는 퍼스팩티브(197)로 동일성 불변이라는 기존 윤리의 틀을 재고하는 "자기로부터의 해방"까지 제창한다.


의식을 둘러싼 공방에서 또 하나의 축은 퀄리아다. 기본적으로 물리주의에 반대하는 토머스 네이글의 경우 '박쥐의 의식' 사고 실험을 통해 경험의 주관적 성격은 1인칭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 1인칭 관점에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 퀄리아라는 한편, 물리주의 측에서는 '메리의 방'을 통해 퀄리아는 불필요한 것, '날 것으로의 감각'이라고 본다. 폴 처칠랜드는 퀄리아라는 어휘는 신경 과학 용어로 대체될 것이라고 한다. 데닛은 지향성 논의에서 처럼 퀄리아는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성향 복합체'로 사용자 환상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 매트릭스 '네오'와 신실재론

마음 철학, 어렵지만 흥미롭다. 생각의 가지를 뻗다 보니 <AI>, <그녀>, <블레이드 러너>, <아이 로봇>등 몇몇 영화가 떠오른다. 특히 <아이, 로봇>은 오래전에 봐서 기억은 희미하지만 로봇 서니의 대사는 (짧기도 해서) 기억에 남는다. "Can you?" — 형사인 스푸너가 용의자인 로봇 서니를 취조하면서 로봇이 교향곡을 만들고, 빈 캠퍼스를 그림으로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냐고 묻자 서니가 한 대답이다. 스푸너의 질문은 인간만이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의도였는데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문현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신실존주의 Neo-Existentialism의 'Neo'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를 함의하고 시스템에 저항하는 네오의 태도와 매력을 이 사상에 담았다고 한다. 직관적이다. 영화에 빗대어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는 게 참신하기도 하고.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상가가 독일의 젊은 철학자 가브리엘이다. 그는 기능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마음'과, 역사(문화)에 의해 형성된 '정신'을 구별한다. 마음=뇌라는 물리주의적 견해는 자연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마음=정신이라는 신실존주의는 개별 인간들이 실존을 살아가는 자세를 중시한다.


가브리엘의 사상은 신존재론에 기반한다. 신존재론 혹은 사변적 실재론은 칸트 이래 상관주의와 실재를 상대화하려는 포스트모던에 반기를 들고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을 '초월'하는 실재에 대해 사유한다. 이 안에서도 다양한 접근이 존재한다. 퀑탱 메이야수는 실재를 주체로부터 분리하는, 특히 인간의 의식을 배제한 실재 파악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수학과 자연 과학의 냉철한 논리를 전제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메이야수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며 화이트헤드에 들뢰즈(대상과의 '만남')와 칸트(미학 논의)를 맞대어 사물들의 생생한 활동을 밝히는 미적 실재론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좀 더 밀어붙이는 것이 그레이엄 하먼일 것이다. 하먼은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의 이론을 수정하여 '객체 지향 존재론'을 피력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결정하는 주체로서 인간을 특권화했는데 하먼은 여기서부터 문제를 제기하며 인식 주체 없이 대상 상호 간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사극을 통한 시간(대치), 공간(매혹), 본질(인과), 형상(이론)의 네 가지 패턴이 기본이다. 하먼은 주체가 세계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기준으로 사유해 온 기존 철학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객체 지향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던 이분법에서 벗어나 미학에서도 새로운 구도를 제시한다. 이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아이, 로봇>에서 스푸너는 인간 감상자와 비인간 작품을 구분 짓는 '인간 예술 인식'을 (로봇을 혐오하는 캐릭터답게) 보여준다.




> 철학책을 읽는 이유

<아이, 로봇>의 원작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로봇 3원칙'이라는 개념으로도 유명해서 현실에서 인공지능 개발 윤리를 이야기 할 때 한 번은 언급되곤 한다. 그만큼 강 인공지능은 더 이상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을 '인간'을 폐기하려는 시도로 보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가브리엘의 주장이 여운을 더한다. 


[인간-비인간], [인간-그 밖의 것]의 경계가 꿈틀대고 있다. 언젠간 새로운 선 — 사고의 틀 — 이 그려질 것이고 가브리엘이 말하는 Neo나 <블레이드 러너>, <아이 로봇> 같은 영화는 더 이상 SF가 아니라 사실주의, 어쩌면 다큐멘터리가 될지 모른다. 여기서 철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에도 정색하고 성찰하는 일 말이다(13). 레이 커즈와일의 말처럼 마음과 존재의 문제는 아무리 실험으로 입증한다고 해도 철학적 가정이 없으면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 이래로 형이상학인 철학이 어떤 실천인지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지만 정의론과 승인론 역시 존재와 자유의지, AI라는 우리 시대의 윤리 문제와 맞물려 있다. 자유, 평등, 연대에 기초한 공론장을 활성화하고 끊임없이 메타 의미장(253)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대 철학은 어쩌면 해가 채 지기 전 날개를 편 부엉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현실이 닥치기 전에 사태를 인식하고 여명을 알리는 갈리아의 수탉인 것도 분명하다. 


철학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들 한다. 철학은 우리 삶과 직결돼 있기보다 유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경제 상식은 알아야 하지만 철학 상식 좀 모른다고 손해 날 것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는 철학은 경제학이나 법학 같은 정책학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철학이 탁상공론이니 운운해도 신경 쓰지 말라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철학하는 자신을 재인식했다고 한다. 


<현대 철학의 최전선>은 좋은 개론서지만 쉽지 않은 책이다. 넓지만 얕지 않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래도 한낮의 부엉이처럼 더듬더듬 현대 철학의 주요 지점을 좇다 보면 어느새 수탉의 울음도 듣게 될 것이다.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한 지혜"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려운 철학책을 읽는 이유 아닐까. 




+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고 주관에 따라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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