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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권의 추리소설을 읽었다.
고릿적 아이패드 미니를 리더기 전용으로 탈바꿈하고, 눈도 침침하니 TTS를 활용해서 속독(?)도 하고 온갖 자투리 시간에 틀어 놓으니 여흥의 99.9%가 독서로 수렴되긴 했지만 내가 봐도 믿기지 않는군.
종이책의 물성을 찬양하던 나인데(그리고 여전히 그렇지만) 아이패드에 무광 필름 붙여서 글씨도 막 크게 크게! 해서 보니까 너무 좋더라는. 그리고 책에 '못생긴' 흔적 남기기를 싫어하는 나에게 깔끔한 하이라이트 표시와 메모는 너무 유용하다. 미니라 가볍기는 또 얼마나 가벼운지 핸드폰보다 가볍다. 해서 이북 리더기에도 혹했으나, 일단 미니가 숨을 다 할 때까지 버텨보기로.
하지만 취침 때 듣는 건 개인적으로 별로였다. 웬만하면 머리 대면 자는 타입인데 책 듣다 솔솔 잠이 올라치면 얘기를 마저 들으려는 무의식의 발로인지 문득문득 깨는 바람에 잠들기까지의 시간이며 그 질이 뚝 떨어지는 느낌. 오디오북도 개인 취향으로는 불호에 가까운데 정제되고 극화된 면이 오히려 몰입을 어렵게 한다. 시리 친구들 같은 TTS가 적당히 읽어 주는 게 나은 듯. 영문이 나올 때 쓸데없이 정직한 발음과 '우크라'대학 같은 읽기는 화가 나긴 하지만.
올해 읽은 소설의 2/3는 추리소설이 차지하고, 추리소설의 2/5를 히가시노 게이고가 차지. 게이고 읽기에 지쳐서 틈틈이 다른 작품도 읽다 보니 (나만) 새롭게 발견한 작가도 있고 제법 보람찬 독서 생활을 했다. 재독도 있었는데 놀랍도록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끝까지 잘 읽었다.
노션으로 정리하니 이런 게 좋구나. 편의에 맞게 볼 수 있고 별 반 개도 주고. 내년 DB도 만들었다. 근데 신문물에 밝은 인간이 아니라 은근히 귀찮기도 하다. 글, 특히 인용이 블록 단위로 써지는 거 어떻게 안 되나. 해서 독서 관리 앱 하나 받아두긴 했다. 북플도 제대로 활용 안 하는 마당에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한 권 정도 더 읽을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딱 떨어지는 숫자가 좋으니까 90으로 마무리. 맘에 든다. 다독가가 된 것 같아 자화자찬 북 치고 장구 치고 후후후.
간략한 소회
① 중화권 작품
- 옌롄커
추리/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올해 별 다섯 개 책 중 하나가 <딩씨 마을의 꿈>이라 써본다.
옌롄커 하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먼저 떠오르는데 맛있는 건 제일 나중에 먹는 나답게, 그러니까 붕어빵은 머리부터 먹는 나답게 묵혀두고 있었다. 그래서 읽은 게 <딩씨 마을의 꿈>. 읽다 보면 원문이 궁금해지는 작품이 있다. 중드 <삼국>을 보며 중국어를 배워볼까 하던 의욕이 십수 년 만에 고개를 들었다(가 금세 수그러졌지만). 중국어는 안 배워도 옌롄커는 좀 더 읽어 보련다. 아, 위화도 열심히 묵히고 있는데 내년에는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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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거리는 무슨, 목숨이 길든 짧든 어차피 한평생인 게야. 이제 와서 남 흉을 봐서 뭐하겠나.”
삼촌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금빛 관 안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심장이 터지고 폐부가 찢어지도록 부르짖었다. "할아버지,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빨리 와서 절 구해주세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도록 부르짖었다. (...) 그때 학교 전체와 딩씨 마을 전체, 평원 전체에 목이 찢어질 듯한 내 외침이 가득 울려 퍼졌다. 뜨겁게 말라버린 평원 위에 하늘과 땅을 뒤덮을 듯이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딩씨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학교 뒤쪽의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딩씨 마을의 꿈 中
- 찬호께이
<13.67>
알라딘 피드에 의하면 5년전 읽고 싶어했다나(뭐라고요?). 2022년 드디어 읽었다.
마지막 서너 장이 모든 것을 말하는 작품.
"일처리가 심하게 융통성이 없고 선임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그가 어떻게 '천리안'으로 거듭날 수 있었나. 그의 마지막은 진한 아이러니를 더한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
반전에 의한 반전을 위한 반전이 너무 많다.
<13.67>처럼 수미상응이 돋보이는 형사물로 시마다 소지의 말처럼 "21세기 본격추리라는 새로운 용어와 창작 방법"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애정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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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맹세했다. 당신들을 위해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콧속으로 피비린내와는 거리가 먼 향긋한 체취가 스며들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느릿느릿 나를 향했다. 네 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수고해요."
고운 입술이 벌어지더니 웃음을 머금고서 내게 말했다.
- 서장 中
<마술 피리>
호프만 박사의 오른팔(+왼팔) 한스의 활약으로 즐거운 일독을 했으나 고전/전래 동화에 흥미가 없으면 그닥 매력있는 서사는 아닐 듯.
<디오게네스 변주곡>
마지막 작품 포함 몇몇을 제외하면 다소 심심하지만 음악으로 단편을 정리한, 컨셉 앨범 비스무리한 아이디어는 높이 사고 싶다. 찬호께이의 구성 능력이 돋보이는 단편집.
수미상관식 구성이나 낱 것을 컨셉에 맞게 (재)배열하여 전체 서사를 극적으로 만드는 게 찬호께이의 특기인 것 같다. 그리고 작품 속 음악, 영화, 드라마를 보면 이 작가, 나랑 은근히 취향이 비슷한가? <디오게네스 변주곡>의 경우 음악이 없었으면 별 하나 뺐다.... 반면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같은 이유로 별 반개 더 주고 싶은데 알라딘에선 할 수가 없네.
- 쯔진천
<동트기 힘든 긴 밤>
얼개는 알고 있어서 예의 사회 비판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한 인간을 이토록 끈질기게 했나. 작은 공명심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떤 것'이 되어 한 인간의 삶에 뿌리내린다. 적자지심, 그것은 신념이라기엔 무모하고 오기라기엔 냉철하다. 여운에 젖어 뒤적여 본 소설의 정체는 반전 그 자체. 중국 작가의 행보를 이역만리 방구석에서 속속들이 알 길은 없으나 감흥이 식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몇 번의 재심 끝에 겨우 출간됐다는 건 중의법이었나? 한국에서 드라마화할 계획이었나 본데 이래저래 흐지부지된 듯. 현재는 어찌 됐나 싶지만 굳이 찾아볼 여력은 없...
<무증거 범죄>
두 '천재'의 대결 구도라는 점에서 작위적인 연출은 어쩔 수 없지만, 허무한 종장은 되려 현실적이다.
<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
가볍게 웃자고 읽었는데 생각 외로 탄탄하다. 개인적으로 <동트기 힘든 긴 밤>, <무증거 범죄>보다 구성이 나았다. 취향 저격의 풍자, B급 유머의 A급 완급 조절이 일품.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는데 술술 읽히는 것은 물론 플롯, 묘사, 캐릭터 구축 전반에서 반 수 위 같기도. 세 작품 밖에 안 읽기는 했지만. 생소한 중화권 현대 문학, 그중에도 추리소설은 찬호께이, 레이미 이름 정도만 알았지 그야말로 무지의 영역이었다. 좋은 작품으로 2022년이 즐거웠고 쯔진천 읽기(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볼 때)는 올해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히가시노 게이고 40+1
2022년을 추리소설의 해로 만들어 준 장본인. 이유는 기억도 안 나는데 올해 히가시노 게이고 모아 읽기나 해보지 싶어 한두 권 읽다 보니 이 지경이 돼버렸네. 화수분 게이고답게 아직 읽을 책이 남았지만, 당분간은 안(못) 읽는 것으로.
왜 [40+1]인가 하면 <눈보라 체이스>는 완독을 안 해서(방치 중).
게이고식 블랙 '유모어'에 엄지척을 준다면, '겨울 스포츠 시리즈'는 내 취향의 극단. (스키장에서 굴러 내려오는 몸뚱이라 그런지) 기술 설명 이런 거 흥미 하나도 없고, 일어나는 사건에도 별 감흥이 없고, 전개도 궁금하지 않다. 스노보드 마니아인 작가는 애정을 담아 쓴 것이겠지만. <조인 계획>은 그럭저럭 읽었다. 스키 실력을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름다운 흉기>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장편소설 살인 사건>>에서 역설하듯 어렵지 않고 군더더기 없다는 게 게이고의 장점. 가볍지 않은 소재도 쉽게 쉽게 쓴다. 역으로 말하면 깊이가 덜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광설이나 tmi 없이 게이고만큼 담백하게 써내는 작가를 꼽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형사/탐정이 등장해야 미스터리 읽는 맛이 나는데 ― 오가와라 반조 경감은 구닥다리라고 신랄하게 까지만 ―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가가 시리즈'가 끝나다니 아쉽다(덩달아 슈헤이도 못 본다). 왠지 양산화되고 식상하다 느낌이 들다가도 <신참자> 같은 작품은 왜 게이고가 롱런하는 작가인지 알게 해준다.
올해를 보람차게 해 준 히가시노 게이고로 이번 정리 마무리.
나머지는 2023년을 기약하는 것으로.
📚2022 추리소설의 해 vol.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