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철학의 최전선 -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주제와 그 사유의 지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박성관 옮김 / 이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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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이 오기 전 날아오르는 부엉이 

이 책은 현대 철학의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다. 정의론, 승인론, 자연주의, 마음 철학, 새로운 실재론. 시작은 존 롤스(1921~2002)이고 끝은 마르쿠스 가브리엘(1980~)이다. 그야말로 '현대 철학'의 '최전선'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아오른다"는 말이 있다.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로 철학은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다. 철학(지혜)적 판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거리두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철학을 알아가는 건 황혼이 오기도 전에 날개를 편 부엉이 같달까. 밤과 달리 굼뜨고 눈도 덜 뜨인 부엉이. 


<현대 철학의 최전선>은 개론서지만 각 장의 테마를 요약정리하거나 사상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논의의 지점을 짚어 가며 다음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이정표에 가깝다. 철학의 역사만큼 수많은 철학자의 주장과 반론이 쏟아져 나온다. 아마르티아 센, 화이트헤드, 딜타이 등 언급하는 수준으로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이에 저자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물줄기를 스스로 헤쳐 가길 요구하며 이 책은 '이것으로 끝!' 하는 입문서가 아님을 미리부터 밝힌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섯 가지 사상 중에서도 자연주의, 마음 철학, 새로운 실재론은 강 인공지능이라는 화두와 맞물려 가장 '핫'한 주제다. 하나의 영역 안에서도 다양한 논의와 접근을 다루는 실로 끓는 솥단지 같다.




> 한 길 사람의 마음을 알기까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알기 어려우면 두세 길도 아니고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속담이 생겼을까. 한 길은 거의 3미터로 어찌 보면 꽤 깊다. 실상 한 길은커녕 한 치의 사람 속, 앞날도 모르는 게 우리 아닌가. 4장에서는 애매한 말의 용법을 바로잡아 통일 과학적 세계를 세우고자 한 빈 학단부터 자연주의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다. 50페이지도 채 안 되지만 밀도가 상당하다. 


특히 진화론적 관점에서 심-신의 관계와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는 데니얼 데닛의 논의가 흥미롭다. 자유의지에 관해 데닛은 미래는 현재에서 미리 결정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를 시뮬레이션하기에는 뇌의 정보 처리 장치와 언어를 비롯한 각종 외부 장치의 한계, 그리고 너무나도 복잡한 주변 환경과의 관계 때문에 모두를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는 이유다. 


5장 마음 철학에서는 마음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다양한 전략과 그 비판을 개괄한다. 마음이 의식을 가진 뇌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마음)에 '단순히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것 이상의 실체가 있는가, 바로 데카르트가 미완의 과제로 남긴 그 의문(168)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데닛과 존 설의 논쟁은 이 책의 종장인 새로운 실재론까지 그 영향을 드리운다. 엘런 튜링에 의해 재점화된 강 인공지능 문제는 마음 철학의 핵심이다. 존 설은 의식은 뇌의 기본 작용으로 발생한다는 물리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하지만 행동주의와 기능주의에 반대하며 강 인공지능을 부정한다. 특히 지향성에서 그러한데 이에 대한 '중국어 방' 사고 실험이 유명하다. 문장에는 대상이나 사태에 대한 우리의 지향성이 담기기 마련이다.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장이 표상하는 타인의 지향성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AI는 중국어 규칙 프로그램을 '실체화'할 뿐 지각, 이해, 학습 등 인간의 다양한 의식 형태의 근저에 있는 지향성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존 설의 주장이다.


존 설의 '중국어 방'에 대응하여 데닛은 '다원적 초고'-'팬더모니엄'이라는 의식 모델을 제안한다. 다원적 초고란 학교나 직장에서 협업 툴을 사용하여 다수의 참여자가 하나의 원안을 다듬어 가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팬더모니엄은 '진정한 자기'에 반하는 개념으로, 역할이 확정되지 않은 수많은 도깨비(뇌 내 모듈)가 병렬 분산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중국어 방'이 참이면 인간의 뇌 역시 생물학적 조작이 이루어질 뿐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된다.     


데닛은 합리적인 행위체로서 대상이나 시스템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면 지향성이 있다고 본다. 그의 관점으로는 존 설이 주장하는 1인칭 존재론과 결합한 지향성은 무의미하다. 단일한 자기 이야기는 허구이며 그때그때 말하기를 통해 자기는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데릭 파핏의 경우 장기적인 변화라는 퍼스팩티브(197)로 동일성 불변이라는 기존 윤리의 틀을 재고하는 "자기로부터의 해방"까지 제창한다.


의식을 둘러싼 공방에서 또 하나의 축은 퀄리아다. 기본적으로 물리주의에 반대하는 토머스 네이글의 경우 '박쥐의 의식' 사고 실험을 통해 경험의 주관적 성격은 1인칭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 1인칭 관점에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 퀄리아라는 한편, 물리주의 측에서는 '메리의 방'을 통해 퀄리아는 불필요한 것, '날 것으로의 감각'이라고 본다. 폴 처칠랜드는 퀄리아라는 어휘는 신경 과학 용어로 대체될 것이라고 한다. 데닛은 지향성 논의에서 처럼 퀄리아는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성향 복합체'로 사용자 환상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 매트릭스 '네오'와 신실재론

마음 철학, 어렵지만 흥미롭다. 생각의 가지를 뻗다 보니 <AI>, <그녀>, <블레이드 러너>, <아이 로봇>등 몇몇 영화가 떠오른다. 특히 <아이, 로봇>은 오래전에 봐서 기억은 희미하지만 로봇 서니의 대사는 (짧기도 해서) 기억에 남는다. "Can you?" — 형사인 스푸너가 용의자인 로봇 서니를 취조하면서 로봇이 교향곡을 만들고, 빈 캠퍼스를 그림으로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냐고 묻자 서니가 한 대답이다. 스푸너의 질문은 인간만이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의도였는데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문현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신실존주의 Neo-Existentialism의 'Neo'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를 함의하고 시스템에 저항하는 네오의 태도와 매력을 이 사상에 담았다고 한다. 직관적이다. 영화에 빗대어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는 게 참신하기도 하고.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상가가 독일의 젊은 철학자 가브리엘이다. 그는 기능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마음'과, 역사(문화)에 의해 형성된 '정신'을 구별한다. 마음=뇌라는 물리주의적 견해는 자연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마음=정신이라는 신실존주의는 개별 인간들이 실존을 살아가는 자세를 중시한다.


가브리엘의 사상은 신존재론에 기반한다. 신존재론 혹은 사변적 실재론은 칸트 이래 상관주의와 실재를 상대화하려는 포스트모던에 반기를 들고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을 '초월'하는 실재에 대해 사유한다. 이 안에서도 다양한 접근이 존재한다. 퀑탱 메이야수는 실재를 주체로부터 분리하는, 특히 인간의 의식을 배제한 실재 파악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수학과 자연 과학의 냉철한 논리를 전제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메이야수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며 화이트헤드에 들뢰즈(대상과의 '만남')와 칸트(미학 논의)를 맞대어 사물들의 생생한 활동을 밝히는 미적 실재론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좀 더 밀어붙이는 것이 그레이엄 하먼일 것이다. 하먼은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의 이론을 수정하여 '객체 지향 존재론'을 피력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결정하는 주체로서 인간을 특권화했는데 하먼은 여기서부터 문제를 제기하며 인식 주체 없이 대상 상호 간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사극을 통한 시간(대치), 공간(매혹), 본질(인과), 형상(이론)의 네 가지 패턴이 기본이다. 하먼은 주체가 세계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기준으로 사유해 온 기존 철학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객체 지향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던 이분법에서 벗어나 미학에서도 새로운 구도를 제시한다. 이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아이, 로봇>에서 스푸너는 인간 감상자와 비인간 작품을 구분 짓는 '인간 예술 인식'을 (로봇을 혐오하는 캐릭터답게) 보여준다.




> 철학책을 읽는 이유

<아이, 로봇>의 원작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로봇 3원칙'이라는 개념으로도 유명해서 현실에서 인공지능 개발 윤리를 이야기 할 때 한 번은 언급되곤 한다. 그만큼 강 인공지능은 더 이상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을 '인간'을 폐기하려는 시도로 보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가브리엘의 주장이 여운을 더한다. 


[인간-비인간], [인간-그 밖의 것]의 경계가 꿈틀대고 있다. 언젠간 새로운 선 — 사고의 틀 — 이 그려질 것이고 가브리엘이 말하는 Neo나 <블레이드 러너>, <아이 로봇> 같은 영화는 더 이상 SF가 아니라 사실주의, 어쩌면 다큐멘터리가 될지 모른다. 여기서 철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에도 정색하고 성찰하는 일 말이다(13). 레이 커즈와일의 말처럼 마음과 존재의 문제는 아무리 실험으로 입증한다고 해도 철학적 가정이 없으면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 이래로 형이상학인 철학이 어떤 실천인지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지만 정의론과 승인론 역시 존재와 자유의지, AI라는 우리 시대의 윤리 문제와 맞물려 있다. 자유, 평등, 연대에 기초한 공론장을 활성화하고 끊임없이 메타 의미장(253)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대 철학은 어쩌면 해가 채 지기 전 날개를 편 부엉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현실이 닥치기 전에 사태를 인식하고 여명을 알리는 갈리아의 수탉인 것도 분명하다. 


철학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들 한다. 철학은 우리 삶과 직결돼 있기보다 유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경제 상식은 알아야 하지만 철학 상식 좀 모른다고 손해 날 것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는 철학은 경제학이나 법학 같은 정책학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철학이 탁상공론이니 운운해도 신경 쓰지 말라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철학하는 자신을 재인식했다고 한다. 


<현대 철학의 최전선>은 좋은 개론서지만 쉽지 않은 책이다. 넓지만 얕지 않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래도 한낮의 부엉이처럼 더듬더듬 현대 철학의 주요 지점을 좇다 보면 어느새 수탉의 울음도 듣게 될 것이다.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한 지혜"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려운 철학책을 읽는 이유 아닐까. 




+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고 주관에 따라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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