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예술하는 습관 - 위대한 창조의 순간을 만든 구체적 하루의 기록
메이슨 커리 지음, 이미정 옮김 / 걷는나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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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도 너무 짧다. 목차에서 몇 줄 더 붙인 정도랄까. 이렇다 보니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집필 취지가 퇴색하는, 박리다매 느낌마저 든다. 여성 예술가들이 어떻게 ˝자기 확신과 자기 관리의 위기˝를 극복하는지 채 알아 가기도 전에 내용이 끝나 버린다. 저자가 의도한 ˝훌륭한 사람들의 루틴˝에서 얻는 동기부여 역시 쉽지 않다. 
습관이란 것은 단발성이 아니다. 점이 하나하나 모여 선이 된, 시간의 축적인 만큼 예술가의 ‘습관‘을 서넛 페이지로 이해하기란 자칫 눈 감고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저자의 말처럼 여성 예술가의 창작하는 습관에서 “좌절과 타협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된다면 더더욱. 이렇다 보니 굳이 전작의 형식에 맞춰야 했을까 싶다. 차라리 작가의 수를 줄여 구체적인 창작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나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작품 연도 표기 오류나 몇몇 오탈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여성 예술가 저마다의 삶의 단면을 훑어본다는 데 의의를 둔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리라. 이 책은 습관을 주제별로 묶어 여러 작가를 소개하기에 관심이 가는 예술가를 발견하고 작품 세계를 알아가는 징검다리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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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틀렸다>

알라딘 사이트에서 어떤 연관으로 떴는지 모르겠는데...
이 책을 읽은지는 사실 꽤 되었다. 2년?, 3년 전쯤 되었나? 강렬한 표지와 제목, 저자에 끌려 보게 된 건데 논조 역시 표지만큼이나 과격하더군. 저자는 니체의 사상을 열렬히 지지하다 결국 돌아섰다고 한다. 속된 말로 ‘빠가 까를 만든다’는 식인데, 저자가 어떤 부분에서 니체가 '틀렸다’고 주장하는지 이해는 가면서도 비판의 수위가 ‘까가 더 까가 된’ 식이라 읽으면서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나 또한 과격하게 표현하자면)생떼+아전인수식인 저자의 주장에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 섣부른 오해만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했다.
독후 바로 쓰지 않은 , 위와 같은 불편함이 일개 독자인 나 역시 생떼 쓰기는 아닌가 하는 망설임(혹은 소심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자의 논조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앞으로도. 
눈이 띈 김에, 늦은 소회를 이제야 적는 이유다.





<잔혹한 어머니의 날>, <어제까지의 세계> 외
<어제까지의…>는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담아둔 지 꽤 됐는데 램프 에어인가, 무료 e북 대여로 올라와서 냉큼 다운로드. 또 오랜만에 추리 소설 읽고 싶어서 <잔혹한…>도 다운로드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는 거의 다 읽었는데 문제는…내용이 생각 안 난다는 거…읽은 지 좀 되긴 했지만, 이렇게 머리에 남아 있질 않다니…재밌게 읽었던 기억만 있을 뿐...<잔혹한…>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겠지? 이 외에도 무료 대여 몇 권 받아 두었다. 틈틈이 읽어야지.



<녹슨 도르레>
‘살인곰 서점의 사건 파일’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라니. 그리고 저 귀여운 표지라니. 읽어보고 싶다. 작가인 와카타케 나나미는 ‘코지' 미스터리의 여왕이라고. 이참에 새로운(?) 장르도 알게 되었구만. 요즘 코지하지 않은 책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날 뻔해서, 말 그대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전작 <조용한 무더위> 역시 호기심 이는 제목이다.


그리고 알라딘 e북 TTS

아주 성질 난다. 기능만 켜면 휴대폰이 펄펄 끓고 배터리 광탈…구형 아이패드에서도 잘 되던 기능인데 왜 최신 폰에서 이 모양인지. 아니면 아이폰이 이상한 건가. 여하튼 폰 자체의 말하기 기능을 쓰면 배터리도 안 닳고 열도 안 받는데 알라딘 TTS만 켜면 이러다 폰 폭발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업데이트해도 소용없고, 뭐가 문제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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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이론의 모든 것 - 프랑크푸르트학파부터 지구화론까지
앤서니 엘리엇 지음, 김봉석.박치현 옮김 / 앨피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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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이 책은 제목 그대로 20세기 이후 현대사회이론을 망라한다. 저자 앤서니 엘리엇은 호주 사회학자로 앤서니 기든스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방대한 목차를 보면서 든 생각. 이 한 권으로 많은 공부가 되겠구나, 그리고 과연 잘 소화할 수 있을까? 호기심으로 훑어보니 정보 전달 방식에서 요약과 리스트를 활용하여 독자가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개괄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 책은 현대사회이론의 모든 것을 알려주기보다, 모든 것을 알기 원하는 독자에게 나침반이 되어 준다. 모든 것을 알겠다는 건 욕심이고, 첫술에 배부를 리도 없는 법. 조금은 안심이다. 


예전에 <계몽의 변증법> 관련 저작 몇 권을 읽었는데, 글과 그림으로 '알기 쉽게' 썼다는 책조차도 나의 국어 실력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제대로 알아먹지 못한 슬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먼저 눈길이 간 건, 3장 중 <계몽의 변증법>과 9장 포스트/모더니티 담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미국 망명 중 쓴 <계몽의 변증법>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도한 독일 지식인의 절망이 짙게 깔려있다. 신화를 벗겨 낸 이성이 광기가 되어 전도된 가치를 생산하고, 사회는 또 다른 야만의 상태로 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저자 엘리엇 역시 근대 이성의 어두운 측면을 이야기하면서 나치즘,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스탈린주의를 묶어 개인의 특수성과 인간의 삶이 파괴된 예로 들었다. 그런데 나는 ‘히로시마’에서 뜨다 만 밥술처럼 헛헛함이 느껴진다. 나아가 서구적인 관점이 보인다면 한국 독자로서 너무 감정적인 반응일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폭 문제를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민간 살상을 목적으로 핵폭탄을 사용한 것은 도구적 이성이 인간 가치를 파괴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자기반성이 전무하고, 주류 정치 세력에 의해 우경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근대 이성이 전체주의,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만나 또 다른 야만 상태에 빠진 예로 나란히 들어간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일견 오리엔탈리즘도 엿보인다. 이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명징해진다.



자유

얼마 전 흥미로운 기고문을 봤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하여 '서구사회의 착각'을 비판한 칼럼이다. 요는 아시아에 대한 타자화가 서구사회에 코로나를 만연하게 했다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 Foreign Policy>에 실린 이 칼럼*은 서구 언론이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분석하면서 이를 서구사회에 적용하기 힘든 이유로 유교 문화와 인종적 특성을 든 것은 유구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날을 세운다. 이런 성향은 미국에서 특히 심한데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일부 미디어는 한국 사회는 공동체와 조화를 중시하는 반면 자유와 사생활 개념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보다 덜하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유럽과 미국에서 사재기를 하고, 의료 장비 부족을 겪고, 전 나라에 봉쇄령을 내리는 것이 자유와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기인한다는 것인가? 서구에서 시위까지 해 가며 그토록 부르짖는 개인의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서구의 세련된 대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인주의’가 등장한다. 이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개념화한 ‘유동적 근대성’과 맞닿아 보인다. 소비주의는 끊임없는 자아실현과 즉각적인 자아 재구성을 요구한다. 이 유동적 자아로 개인의 삶은 지구 전체로 확장하지만 동시에 축소화된 장비들로 정보화되어 다양한 감시 및 보안 체제에 묶이게 된다. 포린 폴리시 칼럼(FP)이 지적하듯 서구 시민 대다수는 구글과 페이스북을 포함한 거대 IT기업에 비/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삶의 환경은 범지구적으로 재구성된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는 더는 소설이 아니며, 오늘날 진정한 자유란 각종 장비에서 얼마나 멀어지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한국의 추적 시스템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FP).


효율과 이윤 추구가 미덕인 근대사회에서는 유사개인주의pseudo-individualism라는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노동윤리는 기업가적 개인주의에 잠식되어 사람들은 가면에 매달리게 된다. 개인은 겉보기엔 더없이 자유로워 보여도 경제가치의 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병리적 개인주의는 로버트 D. 퍼트넘의 주장처럼 "시민적 참여를 대체하고 상업화된 경쟁이 협동적 공동체를 집어삼키며, 거래 관계 같은 만남이 진정한 관계를 대체"하게 만든다(57). 앞서 뒤르켐은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자유가 집합적 가치와 희망을 실현하는 데 장애물만은 아니며 도덕적 연대를 통한 사회적 응집을 촉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위의 서구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뒤르켐은 틀렸다. 아노미를 극복할 희망으로 보았던 ‘집합의식’도 서구 사회에서 무의미했다.


뒤르켐은 지구화 시대의 도래로 산업사회가 어떻게 작동할지 예견하지 못했지만, FP에서 지적한 서구 미디어 역시 현대사회의 이중성 — 이 책에서 각기 다른 이론을 빌어 수없이 등장하는 — 을 간과하고 있다. 뒤르켐은 개인 주체와 사회구조의 관계를 논하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경험 세계보다 높게 고양시키려는 욕구를 형성하도록 하고 동시에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사회”라고 했다(60). 한국에서 사재기가 없는 것은 개인 주체 없이 양처럼 온순해서가 아니며, 문자 그대로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팬데믹을 극복할 수 있는 '특정' 문화는 그 어디에도 없다(FP).



문화

글로벌 자본주의 작동 원리로 포스트모던 문화를 맥락화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논의는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제임슨은 19세기 말의 예술운동인 모더니즘이 미학의 영역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 영역으로 스며들어 포스트모더니티로 이행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196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인식은 개인 주체의 감각 붕괴로 이어졌다. 더욱이 80, 90년대 정보통신의 발달과 거대 미디어 기업의 성장은 경제를 초국적인 '문화적 감수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경제는 이미지와 정보로 좌우되고, 소비주의는 개인 주체와 정신구조마저 대상화해 버렸다. 개인의 자유는 시장과 쇼핑몰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느냐로 규정되면서 정체성은 이미지, 코드, 메시지, 정보로 채워지게 된다. 이러한 제임슨의 분석에서 중요한 물음이 생긴다 — “주체의 포스트모던화가 소비주의 확대와 유사개인주의 부상과 관련된다면, 그런 식의 자율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432)


제임슨이 보기에 과거-현재-미래의 연결 고리를 다양하게 해주는 능동적인 감각은 새로운 경제질서로 쇠퇴해 버렸다. 부유하는 주체와 파편화 된 시간을 역사의 그물망 안에서 다시 짤 필요가 있다. 개인 주체와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호 작용을 파악하기 위해 제임슨은 포스트모던 미학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주창한다. 이 흥미로운 시도는 언뜻 함께할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끌어들여 새로운 생활 방식을 고찰하고, 글로벌 시대의 다국가적 세계를 포착하여 정체성과 문화의 거리를 재상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국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단계인 포스트모더니즘 공간을 파악하고, 종국에는 "글로벌 자본주의로부터 분리되려는 인간 주체의 인지적, 감정적 역량"(432)을 다시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공간에는 확실히 '새로운 지도'가 필요해 보인다.


서울은 뉴욕, 런던, 파리 못지않은 메트로폴리탄이며 한국은 더는 고요한 동방의 어느 나라가 아니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도 유례없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정치, 경제의 소용돌이에 있다. 단선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같은 사회를 분석하는 데 “옛것의 기계적 반복이라든가 지난날에 분명한 국민국가, 또는 전통적인 시각이나 옛것의 모방”(제임슨 432)은 적절하지 않다. FP 칼럼은 한국의 코로나 방역 체계를 특정 문화를 전제로 한, 서구에는 적용하기 힘든 "아시아식 해결법"으로 보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보고 싶은 대로, 보던 대로 보는 것, 이는 아도르노가 지적한 대로 사회적 경험의 복잡성을 섹터로 분류해 버리고 도리어 인습적 태도를 촉진하는 점성술과 다를 바 없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정체성과 문화적 의미를 직선적 서사 구조로 환원하고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믿기 어려우며, 부당하고,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리오타르의 주장은 절대 과하지 않다.



극장

이 책에서 소개하는 보드리야르의 기고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를 보자. 1991년 1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를 쓴 이후 미국이 이라크 공습을 한 2월이 지나 3월, 보드리야르는 보란 듯이 이 기고문을 썼다. 이 논쟁적인 기고문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고 심지어 인간의 고통을 무시하는 듯한 논조에 학계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주목한 것은 미디어가 걸프전을 비현실적으로 즉, “하이퍼리얼하게 전유"하면서 생겨난 찌꺼기였다(424). 실체적인 대상 없이 컴퓨터 정밀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은 일방적이다. 나아가 미디어의 실시간 중계는 이를 무대화한다. 전쟁은 더이상 전쟁이 아니고 이미지와 숫자가 난무하는 정보의 흐름이 된다. 정신적 거리와 비례하는 도덕적 무관심으로 전쟁은 게임이나 스포츠 중계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런 양상은 “다시 말해, 시뮬라르크로 보면서 [현실에서] 거리를 두도록 한다”(425).


보드리야르의 담론은 그간 서구 미디어 — 특히 할리우드 — 를 통해  반복적으로 내재해오던 아시아에 대한 타자화, 대상화가 코로나19에서 어떻게 하이퍼리얼하게 전유되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유럽과 미국은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마치 “SF 영화를 보듯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FP)이라고 치부했다. 뉴스에서는 중국의 불투명하고 강압적인 대처를 비웃었고 사회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방관했다. 아시아의 바이러스는 절대 서구 세계를 침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시선은 19세기 제국주의의 또 다른 감각적 표면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글로벌 정보문화가 쏟아내는 외설성이다. 뉴스의 세계는 범지구적 재난, 비극, 정치적 사건에서 “역사적 맥락화와 더 큰 틀 안에서 공통의 의미를 자리매김하려는 시도"(422)를 제거하고 무한증식하는 스펙터클의 무대다.


소비주의 문화산업에 잠식되는 주체, 이는 일찍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언급한 바 있다. "[맥락을 제거한] 자잘한 정보와 [즉각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최신 오락의 범람은 사람을 영리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함정은, 정교해진 무대장치로 우리가 바보가 되는지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강렬하다. 히로시마를 폭격했을 때 시상이 떠오를 수는 있지만,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는 것에 대한 논제를 통해 시상이 떠오르지는 않는다는 하버마스의 말처럼. 하지만 우리는 이식되는 이미지에 함몰되어 “하이퍼리얼한 거울의 황무지”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현재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치른 끔찍한 사회적 비용이자 자기반성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세계’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서구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 전 세계적 사건으로 20세기 인류 이성의 전복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베트남 등 도구적 이성의 광기는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일본의 전쟁범죄는 ‘인류 지성의 반성’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다. 제국주의 일본은 나치 독일, 스탈린의 붉은 군대와 다르지 않다. 그 여파 역시 현재진행형이기에 "지난 세기 사회적, 역사적 재난"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히로시마와 더불어 일본의 전쟁범죄 — 난징대학살, 731부대, 위안부 문제 등 — 가 다중적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다뤄지길 바라 본다. “사회이론은 삶을 해치고 제약하며 삶에 억압을 가하고 피해를 입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시도”(586)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와 그 여파로 세계경제는 일순간 요동쳤고 대공황보다 더한 경제 불황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관계 역시 이전과 다른 국면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 같은 범지구적 사회 변화에 맞닥뜨릴 때 개인과 집단이 어디에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역사적 맥락과 시의성을 갖고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사태(와 제2차 세계대전 일부)를 상당 부분 포스트모더니즘 맥락에서 주목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양가성이 이성과 계몽주의의 "파산"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저자의 균형 잡힌 비판도 놓쳐서는 안 된다. 10장 ‘네트워크, 위험, 유동성’에서 문화와 지정학적 요소를 들어 바우만의 ‘유동적 근대성’을 비판하는 내용과 11장 '지구화'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굳이 ‘포스트모던적 지혜’라는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어떤 것이든 약속하는 목소리”를 의심하고 성찰하는 태도, 그리고 이런 태도 역시 불완전하고 초라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바우만 446). 그래서 현대사회이론과 그 비판을 망라하는 이 책은 바로, 지금 읽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 책에서 전제하는 ‘사회’ 즉, “21세기 초엽에 벌어진 인간 이주의 충격적인 흐름을 깨닫지 못하도록 잘 분리”된 사회는 ‘서구사회’다(17). 히로시마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지만, 저자가 공과 사의 연계를 강조한 것처럼 나는 문화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층위에서 히로시마를 보며 또 다른 사회적 관점과 관심을 열 수 있었다. 


21세기는 전쟁과 테러, 질병, 빈곤조차 실시간으로 무대화되는 눈부신 테크놀로지의 공간이다. 급기야 테크놀로지로 세계는 좁아지다 못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저자는 오늘날 시급한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현세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세대'라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거듭 든 생각은 우리는 형형색색으로 옷만 바꿔 입었을 뿐 여전히 19세기의 자장 안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변화를 설명하려고 이론가들이 고안해 낸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은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의 담론과 다름없다. 제임슨의 비판(428)으로 비유하면 '현재'는 세계적 규모의 '근대 우세종'일지 모른다. 우리는 또 다른 층위의 근대성에 머물러 있다. 현재의 무자비한 속도와 질서 있는 파편화를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탈근대 postmodernity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


◎ 원탁의 서평단



* 컬럼 전문 <Confucianism Isn’t Helping Beat the Corona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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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인공지능을 만든 생각들의 역사와 철학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2
잭 코플랜드 지음, 박영대 옮김, 김재인 감수 / 에디토리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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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장은 던져졌다 


손안의 비서 — 시리와 빅스비, 알렉사  와 이야기하고, 허공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이들이 더는 기괴하게만 보이지 않는 요즘이다.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이 시작됐고 사회 전반에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고자 박차를 가한다. 한 대기업에서는 로봇업무자동화 시스템 8대가 249명의 몫을 해낸다. 이는 237명이 연간 총 3만9000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업무다. '알 파트장'이라고 불리는 이 인공지능은 사내 네트워크에 정식으로 '동료'로 등록되어 다른 직원과 협업이 가능하다.


알파고가 바둑 명예 9단에 등극하면서 인공지능에서 장밋빛 미래를 보는 이들과 더불어 그 이면을 우려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체스와 달리 바둑에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던 호언장담은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기계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기계가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의식이란 무엇일까? 이 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에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저자인 잭 코플랜드는 심리철학, 언어철학, 논리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글을 쓰는 학자이자 튜링 연구 전문가다. 그가 이 책을 쓴 건 1993년이다. 4반세기 전 인공지능의 현실은 어땠을까? 그리고 다가올 다음 세기를 맞이하며 어떤 전망을 그렸을까? 저자는 컴퓨터가 마침내 체스판에서 인간 정신을 이기는 때가 되면, 하나의 강력한 상징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69). 인공지능 딥 블루가 체스 세계 챔피언을 꺾은 지 20년이 흘러 '알 사범' 알파고는 68승 1패라는 화려한 전적을 남기며 2017년 은퇴했다. 듣도 보도 못한 알파고의 포석은 이제 많은 바둑 기사가 즐겨 쓰는 수법이 되었고 인간 기사들은 알파고의 후배들과 대국 훈련을 한다.


이 책의 원제는 <인공지능: 철학적 입문>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첨병과도 같은 '인공지능'과 '철학'이 제목에 나란히 있는 것을 보라(입문이라는 말은 일단 제처두자). 코플랜드는 직관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들을 들어, 일반적인 사유 방식이 모든 사례에 적용할 수 있을만큼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만, 분명 저자는 평이한 문장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썼다고 했는데?(데카르트 곱이 대체 뭐지...) 머리속이 혼란하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스핑크스를 마주하는 것처럼 긴장과 흥분으로 저자의 논지를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십중팔구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만나게 된다. 그렇다, 독자는 사고실험을 해야 한다. 


모든 사고실험에 개념상의 오류는 없다. 그렇다고 근거도 없다. 저자의 말대로 '만약'이라는 거대한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뿐. 이 구덩이를 잘 헤쳐갈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며 독자는 생각의 지평을 사정없이 늘리고, 쥐어짜고, 거꾸러뜨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도전장은 던져졌다.



생각하는 존재 컴퓨터? 컴퓨터! 


18세기 줄리앙 드 라 메트리가 "인간은 시계다”라고 했을 때 당신은 분노했다. 나를 시계 따위와 비교하다니! 근 2세기가 흘러 '당신은 컴퓨터 같네요'라는 말은 셈이 신속 정확하다는 뜻이며, 당신도 라 메트리 시대와 같은 분노로 치를 떨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 알파고군요!' 2020년의 어느 날 이런 소리에 당신은 '아이고, 아니죠'라며 손사래를 칠 테지만 한편으로 뿌듯해할지 모른다. 나의 지능과 지식은 인간을 넘어선다! 심지어 어떤 이들 — 과학자나 미래학자를 포함하여 — 은 기계가 되기를 원한다.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논지는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는 다시 인간은 생각하는 컴퓨터인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4장 '기호체계 가설'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기호 유형이 복합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이론에서 인간의 뇌는 글자 그대로 컴퓨터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컴퓨터를 제외한 인공물은 생각할 수 없다는 강한 기호체계 가설은 SF 영화만큼이나 흥미롭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컴퓨터다(180). 입력 장치와 지식 저장소에 따라 내부 처리와 출력 방식은 꽤 차이가 나겠지만. 


존 폰 노이만은 중앙처리장치에서 순차적 방식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컴퓨터를 고안하면서 컴퓨터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부모 세대는 저물고 자식 세대는 변하기 마련 아닌가. 이제 비(non)노이만형 컴퓨터는 병렬 및 분산 처리 방식으로 인간 신경망을 모사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코플랜드는 “100년 안에 컴퓨터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뇌를 컴퓨터라 하더라도 반박에 부딪힐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리라” 확신한다(425). 하지만 우리가 언어 공동체로서 컴퓨터라는 '의미'를 끊임없이 다듬어야 하는 의무도 강조한다. 20세기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인간 이해 능력과 판단 형식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의 진보는 단순히 우리가 새로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을 항상 거듭 새롭게 배워나가면서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테세우스의 배(125)를 통해 공동체에서 언어의 합의가 인공지능에 관해 어떤 관념과 개념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의식의 영역까지 확장한다.


한편 일부 미디어가 인공지능을 다루는 데는 볼멘소리를 낸다. 정보는커녕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떠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능형' 운운하는 미디어의 과대광고 — 이젠 어느 정도 사실이 되어버린 문구 — 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는 4차 사업혁명의 물결에 올라탄 우리 역시 명심해야 하는 바다. 이어지는 맥락에서 한스 모라벡의 주장 역시 과장과 속임수의 경계를 오간다고 꼬집는데 코플랜드는 과학자는 책임감을 느끼고 주요 기술혁신이 사회를 어디로 이끄는지 전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211). 어찌 됐든 모라벡의 예측은 현재 빠르게 현실이 되어 가는 듯하다. 2040년(특이점에 근접해 있다!) 모라벡의 예측이 과연 어느 과녁에 꽂힐지 두고 볼 일이다.



똑똑하지만 상식은 없는 친구 


모라벡의 비전에 "공상적인 과장"이라며 날을 세웠어도 코플랜드는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현상학적 구분과 생물학적 구분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짚는다. "대규모의 적응성"을 바탕으로 행동 지향성을 갖는, 즉 행위 하는 존재는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현재 서로에게,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동물에게만 적용하는 용어와 카테고리를 인공물로 확장할지에 대한 결정이다(282).


"최고의 고양이 모형은 고양이다." 사이버네틱스 분야를 창시한 노버트 위너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적절한 인간 모형이 될 수 있을까? 앨런 튜링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저자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미션은 확실해졌다. 인간을 잘 알고 싶다면 인간을 닮은 인공물, 인간형 인공지능을 만들어라.


인간의 의식 작용과 거의 일치하는 인공물에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까다로운 것이 바로 지식 문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는 것이 곧 힘 아니던가. 더글러스 레넛이 주도한 CYC 프로젝트는 백과사전 Encyclopaedia에서 이름은 따왔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젝트는 존재론, 인식론, 논리라는 철학 영역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었는데 레넛은 CYC를 대규모 "존재론적 공학"이라고 한 바 있다(224). CYC는 심리치료사 일라이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레넛이 CYC는 전자 백과사전이 아니라고 강조했음에도 미시세계에서 표식 붙이기를 하는 전문가 시스템의 한계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의 지식 모델은 색인된 목록이 아니다. 이 똑똑한 친구가 "더 넓고 덜 질서정연한"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넛은 지식에는 반드시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상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상식은 인간이 보기엔 어처구니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CYC를 손수 코딩하는 사람은 마치 그 옛날 라 메트리가 인간을 시계에 비유했던 것처럼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기호체계 가설에 기반한 CYC는 1994년 일종의 자가학습이 가능한 '교차점'을 지나, 2001년이 되면 인간 수준의 지식을 갖춘 시스템으로 완성되는 데 목표를 두었다. 2001년 목표는 실패했다. 평균적인 성인의 지식을 따라잡으려면 CYC는 적어도 2190년까지 학습해야 한다. 작고 작은 우리의 두뇌가 새삼 신비롭기만 하다.


상식과 더불어 '잊어버릴 줄' 안다는 것 역시 이 신비의 영역일 것이다. 똑똑한 컴퓨터는 인간과 다르게 망각하지 않는다. 강제로 코드를 뽑거나 고장 내지 않는 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기억의 조각들이 떠돌다 느닷없이, 한꺼번에 맞춰지기도 한다. 이 작은 뇌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때때로 착각하고, 실수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망각하기'는 더 넓고 덜 질서정연한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컴퓨터와는 다른 인간 특유의 적응성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


"나의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지요." 

호르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이레네오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순간까지도 모조리 기억하는 그는 마치 기호체계 가설의 현신인 양, 글자 그대로 두개골 속에 슈퍼컴퓨터가 들어 있다. 소설의 화자는 푸네스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기억한다’라는 단어는 '신성한 동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사람 — 이미 죽었지만 —  오직 푸네스 뿐이라고 말한다. 


"칠판에 그려놓은 원, 직각삼각형, 마름모와 같은 것들이 우리가 완벽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그런 형상들이다. 이레네오에게는 말의 곤두선 갈기들, 언덕 위의 가축떼들,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불길, 그리고 그것의 셀 수 없이 많은 재들, 긴 임종의 밤 동안 수없이 바뀌는 망자의 얼굴들을 가지고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수의 별을 보았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시계 같은 푸네스”의 사고 능력에는 회의를  품는다. 푸네스의 기억에는 개념화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푸네스는 정면에서 보는 개와 2/3 지점에서 보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화자는 이를 두고 푸네스가 플라톤적인 사고, 추론을 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면에서 보든, 측면에서 보든, 다양한 견종을 다른 날에 걸쳐 여러 번 보든 모두 '개'라고 인식한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에게 요청한다. 한 번 들었던 것은 정확하게 반복할 수 없고, 그래서 간접화법으로는 자신이 푸네스를 만나서 느낀 경외감을 제대로 전하긴 힘들겠지만, 부디 상상력을 발휘해달라고. 우리에겐 푸네스 같은 능력이 없다. 그래서 화자의 말을 통해 푸네스의 의식 세계를 상상해 볼 뿐이다. 어쩌면 이 말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하는 보르헤스의 당부가 아닐까? 


보르헤스는 책을 제외한 모든 매체가 인간 육체의 확장이라고 했다. 현미경은 시력을, 전화기는 목소리를 확장한 것이다. 하지만 책은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했다. 시력을 잃은 그가 시각이 지배적인 매체인 책을 인간 지성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꼽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보르헤스는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억 속에 산다고 했다. 우리는 과거 속에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며 그 중간, 기억과 망각 사이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 연구는 모 아니면 도인 아버지 세대를 지나 병렬분산처리(PDP) 방식으로 거듭 성과를 내고 있다. 20세기에는 민달팽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지만, 산발적인 병렬 활동은 역치를 통해 ON과 OFF 사이를 무수히 오가며 놀라운 학습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PDP 역시 우리의 작은 뇌를 희미하게 비출 뿐이다. (개념적으로)생각하는 기계는 과연 상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우리 감각의 지향점


인공지능 연구의 첫 황금기인 1960년대.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인간 육체의 확장뿐 아니라 정신의 확장이라고 했다. 차기 미디어가 무엇이 되건, 의식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맥루언은 ‘지구촌'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전자 기술은 인간 중추신경계의 연장이며 지구의 집단적인 신경 회로가 24시간 돌아가면서 준지각력이 있는 무형의 거대 메타 커뮤니티라고 정의했다. 또한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곧바로 패턴을 찾아내서 이를 구조화하려 한다. 예술가의 일은 패턴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구조화를 '네트워크 하기'로 이해하면 이는 빅데이터의 정보 처리 방식과 다름없다. 맥루언의 비전은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초연결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생활 패턴은 사람이 아닌 빅데이터로 재구성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맥루언의 신묘한 통찰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이 같은 비전을 그렸냐는 것이다.


맥루언의 주장은 과학적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에 충격을 넘어 광대, 사기꾼이라는 비웃음까지 샀다. 그는 시골 출신(캐나다는 당시엔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영문학자고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중세 종교 개혁의 문건,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모더니즘의 수사학 등을 연구해서 다음 세기 미디어의 전망을 예측했다. 같은 맥락에서 코플랜드의 고찰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며 고대(그리고 외계의) 수수께끼와 여러 사고 실험으로 머리를 싸매게 된다. 저자는 책의 원제처럼 인공지능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이 책의 독법은 인공지능 기술이 아닌 ‘인간’을 좀 더 잘,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사고 과정이다.


조지프 와이젠바움은 심리상담 프로그램 일라이자를 만들고 뜻하지 않은 효과에 의문을 품는다. 왜 인간을 모델로 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야만 할까? 아이처럼 유년기가 있고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기관으로 세계를 감각해서 궁극적으로 인간 사유의 전 영역을 고려하는 로봇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말이다(52). 우리는 기술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것뿐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표본으로 인간 존재를 더 잘 이해하고, 삶을 가치 있게 하고, 시대에 따른 개념 구조를 공동체의 합의로 끊임없이 다듬어가는 것이 인공지능 연구의 바탕이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초연결, 빅데이터, VR/AR 등 미래 기술이 사방에서 화두인 요즘이다. 너도나도 5G 시대를 선도한다고 외쳐댄다. 사회가 기술 진보를 쫓아 숨 가쁘게 달려가는 한편 지능형, 스마트 운운하는 떠버리 미디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코플랜드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최소한 알맹이와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의 눈과 귀가 머물 곳은 어디일까? 맥루언은 <미디어는 마사지다>에서 말한다.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공물과 공생을 넘어, 상생의 시대를 맞고자 하는 인류가 되새겨 볼 만한 말이다. 



#원탁의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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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인상적인 묘사 중 하나.

팡글로스는 온통 부스럼이 나고 퀭한 눈에 코끝은 문드러지고 이는 새까만 거지꼴이 되어 캉디드와 재회한다. 그 고상하던 철학자가 처참한 몰골로 지독하게 기침을 해대며 그때마다 번번이 이를 뱉어 내다니! 한데 저 몰골이 되고도 여전히 예정조화설을 신봉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으니 측은하기보다 우스꽝스러워 실소가 절로 난다. 아, 볼테르는 어쩜 이렇게 글을 재밌게 썼을까! 팡글로스는 당시 유럽에 퍼져있던 마구잡이식 낙관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교수형에 열십자 절개 등 온갖 시련을 겪고도 대철학자 팡글로스는 '예정 조화'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개념이기 때문에 부인하지 않겠다고 강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최선을 향해 나아간다."        


처음엔 열린책들로 읽었는데 다른 판본도 몇 가지 읽어보니 저 대목, 사랑의 원인과 결과 및 충족 이유로 불쌍한 지경이 된 팡글로스를 묘사한 번역이 살짝 다르다. 특히 팡글로스가 기침으로 괴로워하면서 그때마다 이를 뱉어낸다/침을 뱉어낸다 두 가지 번역으로 나뉘는데 부북스와 열린책들은 이를 뱉는다고 쓴 반면 문학동네, 한울 등 다른 몇몇 판본은 침을 뱉는다고 표현했다.



불어

Le lendemain, en se promenant, il rencontra un gueux tout couvert de pustules, les yeux morts, le bout du nez rongé, la bouche de travers, les dents noires, et parlant de la gorge, tourmenté d'une toux violente, et crachant une dent à chaque effort.


영어(구텐베르크)

The next day, as he took a walk, he met a beggar all covered with scabs, his eyes diseased, the end of his nose eaten away, his mouth distorted, his teeth black, choking in his throat, tormented with a violent cough, and spitting out a tooth at each effort.


영어(펭귄 드롭 캡스)

The next day, as he was taking a walk he met a beggar covered with sores; his eyes were lifeless, the tip of his nose had been eaten away, his mouth was twisted, his teeth were black, his voice was hoarse, he was racked by a violent cough, and he spat out a tooth with every spasm.


한글(열린책들)

다음날 그는 산책길에 한 거지를 만났다. 그의 몸은 종기투성이였고 눈은 푹 꺼진 데다 코끝은 문드러지고 입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이빨은 온통 새카맣고 말을 할 때면 코를 킁킁거리고 때로 지독하게 기침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이빨을 한 개씩 뱉어내었다. 


한글(문학동네)

다음날 캉디드는 산책을 하다가 거지 하나를 만났다. 그 거지는 종기가 잔뜩 나고 눈빛은 퀭하고 코끝은 빨갛고 입은 비뚤어지고 이빨은 누렇고 목구멍에서 그렁그렁 소리가 나고 심한 기침으로 괴로워하더니 그때마다 침을 뱉어냈다.



불어 crachant는 잘 모르겠지만, 영문 spit은 자동사로 쓰인 것 같지 않은데 왜 한글 번역은 두 가지로 갈리는 걸까? 외형 묘사는 의역이라고 본다면 이해가 되지만(그래도 시꺼먼 이와 문드러진 코끝이 더 극적이긴 하다) 이를 뱉는 것과 침을 뱉는 건 차이가 있는데. 연민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지경이라면 더더욱. 하기야 불영 번역도 역자마다 다를 테니 두 불영 번역을 갖고 비교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볼테르라면 이를 뱉는다고 표현했을 거 같다. 


극적인 표현이 다소 아쉽긴 해도 ‘에덴동산’과 ‘정원’의 상관관계를 살린 번역과 <미크로메가스>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 끌려 문학동네 버전을 종이책으로 구매했다. 간결하고 강렬해서 술술 읽히는 <캉디드>. 난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하지만 촌철살인을 날리는 블랙 유머가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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