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제목 그대로 20세기 이후 현대사회이론을 망라한다. 저자 앤서니 엘리엇은 호주 사회학자로 앤서니 기든스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방대한 목차를 보면서 든 생각. 이 한 권으로 많은 공부가 되겠구나, 그리고 과연 잘 소화할 수 있을까? 호기심으로 훑어보니 정보 전달 방식에서 요약과 리스트를 활용하여 독자가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개괄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 책은 현대사회이론의 모든 것을 알려주기보다, 모든 것을 알기 원하는 독자에게 나침반이 되어 준다. 모든 것을 알겠다는 건 욕심이고, 첫술에 배부를 리도 없는 법. 조금은 안심이다.
예전에 <계몽의 변증법> 관련 저작 몇 권을 읽었는데, 글과 그림으로 '알기 쉽게' 썼다는 책조차도 나의 국어 실력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제대로 알아먹지 못한 슬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먼저 눈길이 간 건, 3장 중 <계몽의 변증법>과 9장 포스트/모더니티 담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미국 망명 중 쓴 <계몽의 변증법>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도한 독일 지식인의 절망이 짙게 깔려있다. 신화를 벗겨 낸 이성이 광기가 되어 전도된 가치를 생산하고, 사회는 또 다른 야만의 상태로 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저자 엘리엇 역시 근대 이성의 어두운 측면을 이야기하면서 나치즘,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스탈린주의를 묶어 개인의 특수성과 인간의 삶이 파괴된 예로 들었다. 그런데 나는 ‘히로시마’에서 뜨다 만 밥술처럼 헛헛함이 느껴진다. 나아가 서구적인 관점이 보인다면 한국 독자로서 너무 감정적인 반응일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폭 문제를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민간 살상을 목적으로 핵폭탄을 사용한 것은 도구적 이성이 인간 가치를 파괴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자기반성이 전무하고, 주류 정치 세력에 의해 우경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근대 이성이 전체주의,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만나 또 다른 야만 상태에 빠진 예로 나란히 들어간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일견 오리엔탈리즘도 엿보인다. 이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명징해진다.
자유
얼마 전 흥미로운 기고문을 봤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하여 '서구사회의 착각'을 비판한 칼럼이다. 요는 아시아에 대한 타자화가 서구사회에 코로나를 만연하게 했다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 Foreign Policy>에 실린 이 칼럼*은 서구 언론이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분석하면서 이를 서구사회에 적용하기 힘든 이유로 유교 문화와 인종적 특성을 든 것은 유구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날을 세운다. 이런 성향은 미국에서 특히 심한데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일부 미디어는 한국 사회는 공동체와 조화를 중시하는 반면 자유와 사생활 개념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보다 덜하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유럽과 미국에서 사재기를 하고, 의료 장비 부족을 겪고, 전 나라에 봉쇄령을 내리는 것이 자유와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기인한다는 것인가? 서구에서 시위까지 해 가며 그토록 부르짖는 개인의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서구의 세련된 대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인주의’가 등장한다. 이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개념화한 ‘유동적 근대성’과 맞닿아 보인다. 소비주의는 끊임없는 자아실현과 즉각적인 자아 재구성을 요구한다. 이 유동적 자아로 개인의 삶은 지구 전체로 확장하지만 동시에 축소화된 장비들로 정보화되어 다양한 감시 및 보안 체제에 묶이게 된다. 포린 폴리시 칼럼(FP)이 지적하듯 서구 시민 대다수는 구글과 페이스북을 포함한 거대 IT기업에 비/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삶의 환경은 범지구적으로 재구성된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는 더는 소설이 아니며, 오늘날 진정한 자유란 각종 장비에서 얼마나 멀어지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한국의 추적 시스템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FP).
효율과 이윤 추구가 미덕인 근대사회에서는 유사개인주의pseudo-individualism라는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노동윤리는 기업가적 개인주의에 잠식되어 사람들은 가면에 매달리게 된다. 개인은 겉보기엔 더없이 자유로워 보여도 경제가치의 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병리적 개인주의는 로버트 D. 퍼트넘의 주장처럼 "시민적 참여를 대체하고 상업화된 경쟁이 협동적 공동체를 집어삼키며, 거래 관계 같은 만남이 진정한 관계를 대체"하게 만든다(57). 앞서 뒤르켐은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자유가 집합적 가치와 희망을 실현하는 데 장애물만은 아니며 도덕적 연대를 통한 사회적 응집을 촉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위의 서구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뒤르켐은 틀렸다. 아노미를 극복할 희망으로 보았던 ‘집합의식’도 서구 사회에서 무의미했다.
뒤르켐은 지구화 시대의 도래로 산업사회가 어떻게 작동할지 예견하지 못했지만, FP에서 지적한 서구 미디어 역시 현대사회의 이중성 — 이 책에서 각기 다른 이론을 빌어 수없이 등장하는 — 을 간과하고 있다. 뒤르켐은 개인 주체와 사회구조의 관계를 논하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경험 세계보다 높게 고양시키려는 욕구를 형성하도록 하고 동시에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사회”라고 했다(60). 한국에서 사재기가 없는 것은 개인 주체 없이 양처럼 온순해서가 아니며, 문자 그대로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팬데믹을 극복할 수 있는 '특정' 문화는 그 어디에도 없다(FP).
문화
글로벌 자본주의 작동 원리로 포스트모던 문화를 맥락화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논의는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제임슨은 19세기 말의 예술운동인 모더니즘이 미학의 영역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 영역으로 스며들어 포스트모더니티로 이행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196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인식은 개인 주체의 감각 붕괴로 이어졌다. 더욱이 80, 90년대 정보통신의 발달과 거대 미디어 기업의 성장은 경제를 초국적인 '문화적 감수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경제는 이미지와 정보로 좌우되고, 소비주의는 개인 주체와 정신구조마저 대상화해 버렸다. 개인의 자유는 시장과 쇼핑몰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느냐로 규정되면서 정체성은 이미지, 코드, 메시지, 정보로 채워지게 된다. 이러한 제임슨의 분석에서 중요한 물음이 생긴다 — “주체의 포스트모던화가 소비주의 확대와 유사개인주의 부상과 관련된다면, 그런 식의 자율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432)
제임슨이 보기에 과거-현재-미래의 연결 고리를 다양하게 해주는 능동적인 감각은 새로운 경제질서로 쇠퇴해 버렸다. 부유하는 주체와 파편화 된 시간을 역사의 그물망 안에서 다시 짤 필요가 있다. 개인 주체와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호 작용을 파악하기 위해 제임슨은 포스트모던 미학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주창한다. 이 흥미로운 시도는 언뜻 함께할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끌어들여 새로운 생활 방식을 고찰하고, 글로벌 시대의 다국가적 세계를 포착하여 정체성과 문화의 거리를 재상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국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단계인 포스트모더니즘 공간을 파악하고, 종국에는 "글로벌 자본주의로부터 분리되려는 인간 주체의 인지적, 감정적 역량"(432)을 다시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공간에는 확실히 '새로운 지도'가 필요해 보인다.
서울은 뉴욕, 런던, 파리 못지않은 메트로폴리탄이며 한국은 더는 고요한 동방의 어느 나라가 아니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도 유례없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정치, 경제의 소용돌이에 있다. 단선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같은 사회를 분석하는 데 “옛것의 기계적 반복이라든가 지난날에 분명한 국민국가, 또는 전통적인 시각이나 옛것의 모방”(제임슨 432)은 적절하지 않다. FP 칼럼은 한국의 코로나 방역 체계를 특정 문화를 전제로 한, 서구에는 적용하기 힘든 "아시아식 해결법"으로 보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보고 싶은 대로, 보던 대로 보는 것, 이는 아도르노가 지적한 대로 사회적 경험의 복잡성을 섹터로 분류해 버리고 도리어 인습적 태도를 촉진하는 점성술과 다를 바 없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정체성과 문화적 의미를 직선적 서사 구조로 환원하고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믿기 어려우며, 부당하고,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리오타르의 주장은 절대 과하지 않다.
극장
이 책에서 소개하는 보드리야르의 기고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를 보자. 1991년 1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를 쓴 이후 미국이 이라크 공습을 한 2월이 지나 3월, 보드리야르는 보란 듯이 이 기고문을 썼다. 이 논쟁적인 기고문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고 심지어 인간의 고통을 무시하는 듯한 논조에 학계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주목한 것은 미디어가 걸프전을 비현실적으로 즉, “하이퍼리얼하게 전유"하면서 생겨난 찌꺼기였다(424). 실체적인 대상 없이 컴퓨터 정밀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은 일방적이다. 나아가 미디어의 실시간 중계는 이를 무대화한다. 전쟁은 더이상 전쟁이 아니고 이미지와 숫자가 난무하는 정보의 흐름이 된다. 정신적 거리와 비례하는 도덕적 무관심으로 전쟁은 게임이나 스포츠 중계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런 양상은 “다시 말해, 시뮬라르크로 보면서 [현실에서] 거리를 두도록 한다”(425).
보드리야르의 담론은 그간 서구 미디어 — 특히 할리우드 — 를 통해 반복적으로 내재해오던 아시아에 대한 타자화, 대상화가 코로나19에서 어떻게 하이퍼리얼하게 전유되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유럽과 미국은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마치 “SF 영화를 보듯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FP)이라고 치부했다. 뉴스에서는 중국의 불투명하고 강압적인 대처를 비웃었고 사회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방관했다. 아시아의 바이러스는 절대 서구 세계를 침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시선은 19세기 제국주의의 또 다른 감각적 표면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글로벌 정보문화가 쏟아내는 외설성이다. 뉴스의 세계는 범지구적 재난, 비극, 정치적 사건에서 “역사적 맥락화와 더 큰 틀 안에서 공통의 의미를 자리매김하려는 시도"(422)를 제거하고 무한증식하는 스펙터클의 무대다.
소비주의 문화산업에 잠식되는 주체, 이는 일찍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언급한 바 있다. "[맥락을 제거한] 자잘한 정보와 [즉각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최신 오락의 범람은 사람을 영리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함정은, 정교해진 무대장치로 우리가 바보가 되는지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강렬하다. 히로시마를 폭격했을 때 시상이 떠오를 수는 있지만,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는 것에 대한 논제를 통해 시상이 떠오르지는 않는다는 하버마스의 말처럼. 하지만 우리는 이식되는 이미지에 함몰되어 “하이퍼리얼한 거울의 황무지”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현재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치른 끔찍한 사회적 비용이자 자기반성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세계’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서구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 전 세계적 사건으로 20세기 인류 이성의 전복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베트남 등 도구적 이성의 광기는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일본의 전쟁범죄는 ‘인류 지성의 반성’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다. 제국주의 일본은 나치 독일, 스탈린의 붉은 군대와 다르지 않다. 그 여파 역시 현재진행형이기에 "지난 세기 사회적, 역사적 재난"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히로시마와 더불어 일본의 전쟁범죄 — 난징대학살, 731부대, 위안부 문제 등 — 가 다중적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다뤄지길 바라 본다. “사회이론은 삶을 해치고 제약하며 삶에 억압을 가하고 피해를 입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시도”(586)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와 그 여파로 세계경제는 일순간 요동쳤고 대공황보다 더한 경제 불황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관계 역시 이전과 다른 국면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 같은 범지구적 사회 변화에 맞닥뜨릴 때 개인과 집단이 어디에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역사적 맥락과 시의성을 갖고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사태(와 제2차 세계대전 일부)를 상당 부분 포스트모더니즘 맥락에서 주목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양가성이 이성과 계몽주의의 "파산"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저자의 균형 잡힌 비판도 놓쳐서는 안 된다. 10장 ‘네트워크, 위험, 유동성’에서 문화와 지정학적 요소를 들어 바우만의 ‘유동적 근대성’을 비판하는 내용과 11장 '지구화'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굳이 ‘포스트모던적 지혜’라는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어떤 것이든 약속하는 목소리”를 의심하고 성찰하는 태도, 그리고 이런 태도 역시 불완전하고 초라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바우만 446). 그래서 현대사회이론과 그 비판을 망라하는 이 책은 바로, 지금 읽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 책에서 전제하는 ‘사회’ 즉, “21세기 초엽에 벌어진 인간 이주의 충격적인 흐름을 깨닫지 못하도록 잘 분리”된 사회는 ‘서구사회’다(17). 히로시마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지만, 저자가 공과 사의 연계를 강조한 것처럼 나는 문화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층위에서 히로시마를 보며 또 다른 사회적 관점과 관심을 열 수 있었다.
21세기는 전쟁과 테러, 질병, 빈곤조차 실시간으로 무대화되는 눈부신 테크놀로지의 공간이다. 급기야 테크놀로지로 세계는 좁아지다 못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저자는 오늘날 시급한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현세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세대'라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거듭 든 생각은 우리는 형형색색으로 옷만 바꿔 입었을 뿐 여전히 19세기의 자장 안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변화를 설명하려고 이론가들이 고안해 낸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은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의 담론과 다름없다. 제임슨의 비판(428)으로 비유하면 '현재'는 세계적 규모의 '근대 우세종'일지 모른다. 우리는 또 다른 층위의 근대성에 머물러 있다. 현재의 무자비한 속도와 질서 있는 파편화를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탈근대 postmodernity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
◎ 원탁의 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