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오래도록 자리한 <신곡>이 있다. 다 읽기나 한 건지 가물가물하고 (다시)읽어봐야지, 연례행사 같은 다짐은 사라지기 일쑤. 700년도 넘은 고전은 내 책장 구석에서 유물이 돼버렸다. 

올해는 반드시 읽으리라 하는 책 중에 어김없이 (또) 들어간 <신곡>. 근데 미래타임즈에서 명화와 함께 본다는 컨셉으로 <신곡>이 편역되어 나왔다. 신간은 아니고 새단장을 한 것이다. 와, 이걸 봐야겠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쓴 데다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를 비롯해서 300여 점의 그림을 이야기에 맞게 구성했다니 구미가 안 당길 수 있나. 내 오랜 책과 환상의 짝꿍이 되어 줄 것 같다. 

근데 열린책들에서 도레의 삽화를 모두 실어 <신곡>이 나왔다. 작년 700주기를 기념해서 나온 개역 한정본에 도레의 삽화까지 더해져 천 쪽이 넘는다. 













4월은 추가 지출이 꽤 잡혀서... 그래서 책 예산은 0원인데... 도레의 삽화 135점이 다 들어 있다니...... 내 <신곡>은 너무 오래됐으니까 21세기 판본으로 구비하는 것도 좋겠...... 가만, 장바구니를 좀 보자...

......

이대로 4월은 잔인한 달이 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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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메인에 뜨는 거 보긴 했는데 아니, 루이즈 페니 어디서 본 이름 같다 했더니 아르망 경감 시리즈의 작가였구나. 언뜻 보고선 시사/사회 교양서적인 줄 알았는데 스릴러 소설?! 두 사람이 오랜 친구였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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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싯적 잡동사니를 발견했다. 윤동주, 이육사, T.S. 엘리엇, 릴케, 푸시킨의 시를 적어서 만든 책갈피와 카드 같은 건데, 기억으론 초등 5, 6학년에서 중 1 때 즈음 한창 만들었던 거 같다. 뭔가 오리고 색칠하고 써넣는 게 재밌어서 만든 거지 시를 좋아해서 책갈피로 만든 건 아니었다. 나는 문학소녀가 아니었...... 멋모르고 시를 적은 건 짧지만 멋있어서였을 거다. 아부지 책장을 뒤적일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은 건 시였다. 그러니까 내가 시를 탐독(?)했던 시기는 공작 놀이에 빠져 있던 초등학생 때란 얘기. 넘치는 호기심으로 시를 본 적이 이후론 없었던 것 같다.


마침 지나는 길에 알라딘 중고 매장에 들렀다. 오랜만에 쓱 구경이나 하자 싶었다. 올해 결심 중 하나는 이젠 — 그러니까 2월 이후로 — 책을 사지 않겠다는 거(였)다. 있는 종이+전자책 읽고, 빌려 보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에 읽을 책은 차고 넘친다는 논리다. 난 책은 좋아해도 다독가는 아니니까. 자금과 공간이 달려서라는 슬픈 변명은 하고 싶지 않...... 근데 알라딘 적립금 탈탈 털어서 '1권' 샀다. 정체 모를 호기심(+허영)으로 '현대 시집'을 산 것이다. 올해 계획은 깨졌다. 


<말도로르의 노래>. 고수들도 난해하다고 하는 현대 산문시다. 이 시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재봉틀과 우산이 해부대에서 어쩌구 하는 것뿐인데 이것도 대학 때 세미나로 달달 읽을 수밖에 없었던 책 덕분이다.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브르통이 내세운 가장 완전한 보기. 대체 해부대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뭘 어쨌단 말인가. 무슨 의미인지, 어떤 점이 엄청난 건지, 왜 '현대미술의 개념'이란 세미나를 굳이 실기 수업에서 해야 하는지 의아해서 더 각인돼버린 세미나. 교수님은 나중에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된다며 우릴 독려하셨다.


     



아득해진 로트레아몽 백작과 해부대, 재봉틀, 우산을 확실하게 소환하게 된 계기는 앙리 미쇼의 <주기적 광증의 사례> 때문이다. 애먼 착각으로 교양 과학서 쯤으로 생각해서 골랐는데 막상 포스트모던 시집이라 얼마나 황망했던지...... <주기적 광증의 사례>는 앙리 미쇼의 초기 시선집이다.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글을 쓰고, 언어로 존재하는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린 앙리 미쇼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가 바로 로트레아몽이다. 이쯤 되면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자장 안에서 로트레아몽의 영향력 밖에 놓인 작가가 있기나 할까 싶다. 


<주기적 광증의 사례>가 나오고 오래지 않아 <말도로르의 노래>가 새로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냅다 장바구니에 담았건만 나의 묵히기 신공으로 긴긴 침묵을 지키다 2022년 기어코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연히 알게 된 미쇼 덕에, 난데없이 들른 알라딘 중고 매장에서, 마침내 손에 넣은 <말도로르의 노래>. 기억 속 파편으로 떠돌던 해부대 위 재봉틀, 우산. 해묵은 호기심으로 책장을 뒤적인다. 대체 어떤 불꽃을 일으켰는지 이제 보게 될 터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 말이 틀린 건 아닌가 보다. 피와 살까진 아니지만 세포 1개 정도에 남은 배움 덕분에 해부대, 재봉틀, 우산을 잊지 않은(못한) 건지도 모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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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용감한 친구들>로 인상 깊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부터 마셨던 고배를 설욕한, 부커상 수상작으로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하다. 개봉 소식을 듣고 읽어봐야겠다고 한 게 5년 전쯤인가? 참 오래도 걸렸다. 


읽으면서 짐 브로드벤트와 샬롯 램플링의 모습이 문장 속에서 새롭게(덧대어) 피어났다. 토니와 베로니카의 나이 든 모습에만 그랬다는 게 희한하지만. 그런데 때때로 문장의 벽에 부딪혀 블랙아웃이 돼버린다. 소설과 영화상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덜그럭대는 글줄이 문제였다. 1부가 특히 그런데 천천히 소리 내 읽어 봐도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은 소설의 문체가 그렇다기보다 번역의 문제 아닐까 조심스레 짚어본다.



+ + +


"부모들 말은 어쩌면 다 그렇게 똑같지. 그러면 난 지금 설명하시는 게 어때요? 라고 받아치는데."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런 데다 우리 집안은, 부끄럽고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아는 한, 수수께끼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세상은 에이드리언처럼 수수께끼를 몰고 다니는 예민한 지성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살아남은 건 평균치 토니였다. 토니는 '자기보존 본능'으로 타인을 해석(이라기보단 넘겨짚기)한다. 잭 형님은 나를 무시했고 베로니카는 비열하게 날 이용했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이르면 잭이나 베로니카가 그랬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이드리언은? 정말로 "그는 유모차를 끄는 지옥 같은 삶이 두려웠던" 걸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삶과 기억, 시간과 역사 같은 거대한 담론은 차치하고 내로남불,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모르는 게 약이다 같은 일상 속 표현을 되뇌게 된다. 일상을 축적하고 시간 속을 살아 내지만 그 끝자락에서조차 아무것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가늠하지 못하는 것조차 모른 채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던가. 지지리도 감 못 잡는 이 남자의 복은 어디까지일까.


토니는 어떠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해서 둔감한 게 아니라 상황, 즉 맥락에 대한 감이 없는 인물이다. 한정된 정보만 주는 베로니카, 수수께끼 같은 에이드리언의 일기(일부)로 '평균치' 토니 웹스터 씨가 뭔가를 알아채리라 기대하긴 힘들다. 하지만 시종일관 진지하지 못한 토니의 태도엔 진저리가 나는 게 사실. 분위기 파악 좀…. 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난다. 젊어서는 혈기라지만 나이 먹고선 주책이다.


에이드리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는 돌연 격렬하게 말했다. 

"영국인들이 진지해야 할 때 진지하지 않은 게 싫어. 정말 싫어."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적당히' 똑똑한 토니는 마침내 감을 잡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니셜 a와 함께 더 큰 혼란에 빠져든다.


산다는 것 자체가 혼란이다. 일방향의 거대한 혼란. 



+ 인물별 스핀오프가 나와도 흥미로울 것 같다. 이 소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보다 토니의 1인칭 시점에서 보는 기억과 시간, 역사의 삼각관계다. 근데 난 자꾸 '일어난' 사건에 마음이 쏠린다(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게야...) 특히 베로니카 - 사라의 이야기가 그렇다. 높이 도약해서 머리칼로 얼굴이 뒤덮인 채 딱 한 번 춤을 추던 여자와, 뜨거운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넣던 여자의 ‘축적’이.






긴긴밤 

나올 때 부터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울 것 같아서. 갈수록 슬픈(+동화) 얘기는 볼 엄두가 안 난다. '어린이 독자'가 아니라서 더 힘든 것이겠지. 같은 이유로 <도시 악어>도 좀 미루는 중이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늙어버린 내 영혼이여.)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나는 아직도 좋은 코끼리, 코뿔소가 되지 못했는데 긴긴밤을 지나 어느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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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기 아까운, 가슴 먹먹한 문장들

우울한데 가슴이 뛰고, 한 장 한 장 더디게 넘기는 책이 있었다면 고등학교 시절 읽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지와 사랑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일까.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말랑말랑한 심상에 문장이 세차게 꽂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머리가 (쬐끔)커지면서 깨달음을 주고, 눈물도 뽑고, 눈도 빠지게 하는 책들을 만났지만 머리보다 가슴으로 각인되는, 저 질풍노도의 감성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책을 만나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서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하나의 훌륭한 '러브 스토리'지만 족히 "2톤"은 되는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는 어마어마하다. 생각이 이리저리 뻗어나간다. (나도 압축기가 필요해!)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써 내려가는 건 되려 조심스럽다.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이 책이 주는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관해 쓸 텐데. 나의 글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슬플 뿐.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 괴테

한탸가 마지막으로 만드는 '꾸러미' 위에 놓이는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 일론카. 소설 속 이름으로 이렇게나 마음 들끓은 적이 있었던가. 한탸, 만차, 그리고 일론카. 마라티/힌디어 그리고 산스크리트로 '죽이는 자, 기쁨, 연민, 축복' 등의 의미를 갖는 Haňta는 단지 우연일까. 만차 Manča, 일론카 Ilonka와 함께 나는 흐라발의 '고독' 속으로 가라앉는다.

만차 때문인지 (1차원적 사고라 책에 미안하지만) 돈키호테가 떠오르는데 한탸 스스로도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라고 일치감치 선언한다. 실제로 그는 자기 시대의 돈키호테였다. 


That one man scorned and covered with scars 

Still strove with his last ounce of courage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이룰 수 없는 꿈' 중


돈키호테는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한다. 한탸는 지상에서 온 아름다운 별을 만난다. 




읽을수록 읽고 싶은 책. 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책.
















1장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3장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쥐들의 하늘 역시 인간적이지 못하다. 나는 또 어떤가. 삼십오 년째 폐지를 꾸리고 있는 나는! 삼십오 년째 지하실에 살다시피 하면서 나 또한 쥐들을 닮게 되었고, 이젠 목욕이라면 질색이다.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 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책 한 권이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다.

5장
대충 쪼갠 장작개비들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모든 사고 이전에 존재하는 영원의 상징이며 어린아이의 웃음 같기도 한 불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무상의 불이며, 환멸에 젖은 행인은 더 이상 알아챌 수 없게 된 요소들의 생생한 표징이다.
불은 그녀 안에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없었다면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집시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도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인간적이었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마당에서 연을 태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6장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 새 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8장
폐지를 한아름씩 들어다 압축통을 채운 뒤 녹색 버튼을 힘껏 누른다. 머리 위에 펼쳐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생쥐의 눈 깊은 곳에서 발견한다. 그 순간 내 어린 집시 여자가 선잠에 빠진 나를 찾아온다.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
그 순간 내 집시 여자가 보인다. 끝내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어린 여자. ‘민둥산‘이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는 가을 하늘에 연을 날린다. 그녀가 연줄을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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