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베르의 앵무새>, <용감한 친구들>로 인상 깊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부터 마셨던 고배를 설욕한, 부커상 수상작으로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하다. 개봉 소식을 듣고 읽어봐야겠다고 한 게 5년 전쯤인가? 참 오래도 걸렸다.
읽으면서 짐 브로드벤트와 샬롯 램플링의 모습이 문장 속에서 새롭게(덧대어) 피어났다. 토니와 베로니카의 나이 든 모습에만 그랬다는 게 희한하지만. 그런데 때때로 문장의 벽에 부딪혀 블랙아웃이 돼버린다. 소설과 영화상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덜그럭대는 글줄이 문제였다. 1부가 특히 그런데 천천히 소리 내 읽어 봐도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은 소설의 문체가 그렇다기보다 번역의 문제 아닐까 조심스레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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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 말은 어쩌면 다 그렇게 똑같지. 그러면 난 지금 설명하시는 게 어때요? 라고 받아치는데."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런 데다 우리 집안은, 부끄럽고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아는 한, 수수께끼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세상은 에이드리언처럼 수수께끼를 몰고 다니는 예민한 지성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살아남은 건 평균치 토니였다. 토니는 '자기보존 본능'으로 타인을 해석(이라기보단 넘겨짚기)한다. 잭 형님은 나를 무시했고 베로니카는 비열하게 날 이용했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이르면 잭이나 베로니카가 그랬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이드리언은? 정말로 "그는 유모차를 끄는 지옥 같은 삶이 두려웠던" 걸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삶과 기억, 시간과 역사 같은 거대한 담론은 차치하고 내로남불,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모르는 게 약이다 같은 일상 속 표현을 되뇌게 된다. 일상을 축적하고 시간 속을 살아 내지만 그 끝자락에서조차 아무것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가늠하지 못하는 것조차 모른 채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던가. 지지리도 감 못 잡는 이 남자의 복은 어디까지일까.
토니는 어떠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해서 둔감한 게 아니라 상황, 즉 맥락에 대한 감이 없는 인물이다. 한정된 정보만 주는 베로니카, 수수께끼 같은 에이드리언의 일기(일부)로 '평균치' 토니 웹스터 씨가 뭔가를 알아채리라 기대하긴 힘들다. 하지만 시종일관 진지하지 못한 토니의 태도엔 진저리가 나는 게 사실. 분위기 파악 좀…. 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난다. 젊어서는 혈기라지만 나이 먹고선 주책이다.
에이드리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는 돌연 격렬하게 말했다.
"영국인들이 진지해야 할 때 진지하지 않은 게 싫어. 정말 싫어."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적당히' 똑똑한 토니는 마침내 감을 잡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니셜 a와 함께 더 큰 혼란에 빠져든다.
산다는 것 자체가 혼란이다. 일방향의 거대한 혼란.
+ 인물별 스핀오프가 나와도 흥미로울 것 같다. 이 소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보다 토니의 1인칭 시점에서 보는 기억과 시간, 역사의 삼각관계다. 근데 난 자꾸 '일어난' 사건에 마음이 쏠린다(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게야...) 특히 베로니카 - 사라의 이야기가 그렇다. 높이 도약해서 머리칼로 얼굴이 뒤덮인 채 딱 한 번 춤을 추던 여자와, 뜨거운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넣던 여자의 ‘축적’이.
긴긴밤
나올 때 부터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울 것 같아서. 갈수록 슬픈(+동화) 얘기는 볼 엄두가 안 난다. '어린이 독자'가 아니라서 더 힘든 것이겠지. 같은 이유로 <도시 악어>도 좀 미루는 중이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늙어버린 내 영혼이여.)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나는 아직도 좋은 코끼리, 코뿔소가 되지 못했는데 긴긴밤을 지나 어느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