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덮기 아까운, 가슴 먹먹한 문장들

우울한데 가슴이 뛰고, 한 장 한 장 더디게 넘기는 책이 있었다면 고등학교 시절 읽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지와 사랑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일까.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말랑말랑한 심상에 문장이 세차게 꽂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머리가 (쬐끔)커지면서 깨달음을 주고, 눈물도 뽑고, 눈도 빠지게 하는 책들을 만났지만 머리보다 가슴으로 각인되는, 저 질풍노도의 감성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책을 만나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서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하나의 훌륭한 '러브 스토리'지만 족히 "2톤"은 되는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는 어마어마하다. 생각이 이리저리 뻗어나간다. (나도 압축기가 필요해!)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써 내려가는 건 되려 조심스럽다.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이 책이 주는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관해 쓸 텐데. 나의 글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슬플 뿐.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 괴테

한탸가 마지막으로 만드는 '꾸러미' 위에 놓이는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 일론카. 소설 속 이름으로 이렇게나 마음 들끓은 적이 있었던가. 한탸, 만차, 그리고 일론카. 마라티/힌디어 그리고 산스크리트로 '죽이는 자, 기쁨, 연민, 축복' 등의 의미를 갖는 Haňta는 단지 우연일까. 만차 Manča, 일론카 Ilonka와 함께 나는 흐라발의 '고독' 속으로 가라앉는다.

만차 때문인지 (1차원적 사고라 책에 미안하지만) 돈키호테가 떠오르는데 한탸 스스로도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라고 일치감치 선언한다. 실제로 그는 자기 시대의 돈키호테였다. 


That one man scorned and covered with scars 

Still strove with his last ounce of courage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이룰 수 없는 꿈' 중


돈키호테는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한다. 한탸는 지상에서 온 아름다운 별을 만난다. 




읽을수록 읽고 싶은 책. 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책.
















1장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3장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쥐들의 하늘 역시 인간적이지 못하다. 나는 또 어떤가. 삼십오 년째 폐지를 꾸리고 있는 나는! 삼십오 년째 지하실에 살다시피 하면서 나 또한 쥐들을 닮게 되었고, 이젠 목욕이라면 질색이다.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 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책 한 권이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다.

5장
대충 쪼갠 장작개비들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모든 사고 이전에 존재하는 영원의 상징이며 어린아이의 웃음 같기도 한 불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무상의 불이며, 환멸에 젖은 행인은 더 이상 알아챌 수 없게 된 요소들의 생생한 표징이다.
불은 그녀 안에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없었다면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집시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도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인간적이었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마당에서 연을 태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6장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 새 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8장
폐지를 한아름씩 들어다 압축통을 채운 뒤 녹색 버튼을 힘껏 누른다. 머리 위에 펼쳐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생쥐의 눈 깊은 곳에서 발견한다. 그 순간 내 어린 집시 여자가 선잠에 빠진 나를 찾아온다.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
그 순간 내 집시 여자가 보인다. 끝내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어린 여자. ‘민둥산‘이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는 가을 하늘에 연을 날린다. 그녀가 연줄을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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