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슬픔
공광규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나이가 어느 새 마흔을 넘어섰다. 어릴 적 마흔을 넘은 선생님들과 동네 어른들을 보면서 저 나이가 되면 뭐든 잘하고 막힘이 없으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이뤄낸 완성됨을 의미하는 숫자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내가 맞이한 마흔은 여전히 바둥거리며 이루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 채 헤매며 서툴고 후회와 반성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이다. 짧고도 짧지 않은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내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일, 창피하고 후회스러운 순간,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결정 등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인생이지만 나의 인생을 글로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문득 문득 든다. 후회는 후회되는 대로, 대견함은 뿌듯함으로,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응어리는 터트려 상처딱지를 앉도록 스스로를 위로해주고 싶다. 그 때마다 자신의 시간을 담담히 글로 써내려가는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라는 그들이 참 부럽다. 글이든 그림이든, 소리든 동작이든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들이 말이다.

우리 아빠는 광부셨다. 저학력에 가진 기술 하나 없이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고, 밥벌이를 위해 시작한 것이 사촌형을 따라간 강원도 탄광촌이었다. 깜깜한 굴 속에 모자에 달린 렌턴에 의지하여 석탄을 캐며 젊은 시절을 보내셔야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옷 가지 몇 벌뿐 지켜 내야만 했던 자식만 넷.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서워도 싫어도 가야만 했던 지하 굴 속.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긴장을 잘 하며 소심한 우리 아빠. 지금도 여전히 은행. 병원. 관공서를 혼자 못 가신다. 엄마를 대동하거나 만만한 나를 불러서 가야 큰 소리 치고 너털웃음 지으며 여유있는 척 하며 일을 보신다. 그런 사람이 깜깜한 어둠을 뚫고 그 길을 갔을 때는 책임감이란 자동시스템에 전원이 켜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탄광이 폐광하고 도시로 올라온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아빠는 여전히 동굴을 못 들어가신다. 입구부터 시작된 어둠은 그가 천성적인 겁쟁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말씀으로는 지겹도록 들어가본 굴 안 봐도 그 속을 훤히 알기에 돈 주고는 안 들어간다 하시지만, 그의 굵은 손마디와 딱딱해진 손바닥에 서린 땀이 그가 그동안 짊어졌던 짐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웠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어린 자식들 앞에서 술마시고 맥없이 쓰러지며 한맺힌 울분과 눈물을 보여야만 다음 날 다시 갱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옛날, 왜 그리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만 했을까. 아빠는 왜 단단하고 무쇠같은 존재로만 있길 바래왔던가. 그의 눈물 한 번 닦아주지 못한 것이 이렇게 후회되고 죄송스러울지 그 때는 왜 몰랐을까.

-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늘 실패의 삶을 산다. 늘 결핍의 삶을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버지다. 48

오늘을 사는 그의 삶은 행복할까. 귀농하여 혼자 살면서 계절마다 택배 상자를 올려다보내며 잘 받았냐고 전화하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자식의 삶에 관여하고 사시는 지금 그는 행복할까. 암 수술을 받던 날, 수술 대기실로 들어갈 때 긴장해서 자식 목소리에 흔들리던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는데, 회복하고 나와서는 그 동안 못 잔 잠 다 잔 거 같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씀하신. 나의 아버지는 지금쯤이면 행복하실까.

정말 오랜만에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면서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전히 철부지 자식이며 여전히 내 곁에 건재해 주기만을 바라는 미운 자식으로만 곁에 있다는 것이 내 스스로 깊은 숨을 내쉬게 한다.

공광규님이 회상하는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시골집을 맞으면서 절로 나의 부모님과 어린 시절 힘들게 살면서도 나만의 꿈을 꾸던 그 곳이 떠올랐다. 몇해전 가족 여행 길에 찾아간 시골집은 이미 다 철거되고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집.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아이들은 집이 없어졌다는 그 말을 한참동안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공광규님이 시골집을 두고 모텔에서 자야만 했던 그 시간 모텔에서 울고. 여섯 식구 힘들다 하면서도 옹기종기 모여살았던 그 장소가 말끔히 사라진 그 시간, 나는 마음으로 깊이 울었다.

여고시절. 문예창작반으로 동아리 활동을 하며 문학소녀의 꿈을 꿀 때가 있었다. 일주일에 몇 편의 시를 써서 선배에게 검사를 받고 수정을 하고 다시 쓰고 하며 나름의 글을 쓴다고 폼잡았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왜 고민하는 척, 왜 깊은 고민을 하는 척하며 글을 썼는지 지금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한정적인데 내가 마치 그들의 심정을 다 알고 있는 듯, 그들의 존재 이유를 다 아는 듯 글에 그 의미를 모두 담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걸 나보다 1살 많은 선배가 고쳐준다고 내 맘에 수많은 상처를 내주었다. 그때 썼던 시 중에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나그네'와 '새벽'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시 두편이다. 나그네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나였을텐데, 새벽을 맞이해보지도 못한 나였을텐데 무슨 힘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 시를 썼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모르겠는 그 두 편의 시가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수상의 기쁨으로 이어져 텅 비어있을 뻔한 생활기록부의 한 공간을 채워주었다. 지금은 어른 흉내낸 여고생의 척을 눈감아주신 결과로 받아들인다.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  눈과 비에 얇아지는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95. 수종사 풍경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매화꽃잎 위에 똥을 싸 놓고서는  /  그걸 매화향이라고 울길 때일 것입니다.    98. 병산습지

 

시를 배웠다. 시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해서 써서는 절대 공감을 얻을 수 없는 글이다. 그리고 그것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끼고 살펴볼 눈과 마음이 있어야만 글로 태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광규님의 '수종사 풍경과 병산습지'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그 속에서 참아내는 고통을 충분히 알고 있는 성인의 성숙됨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엄마를 따라 절에 가면서 처마끝에 매달려 낭랑한 소리를 내는 풍경이 참 좋다 했으면서도 그 속에 감춰진 고통을 몰랐으며, 바람이 몸을 때릴 때 참아내며 내는 그 소리를 좋다고만 한 내 귀와 마음은 또 얼마나 철부지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개구쟁이 수달네 아이들이 매화꽃잎에 똥을 싸놓았다. 그걸 매화향이라고 우긴다. 그걸 다 알고 있는 달이 함박웃음 떠뜨리면서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주고 우리는 그 매화꽃향을 맡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며, 매화꽃을 볼 때마다 어딘가에서 몰래 훔쳐보고 있을 수달네 개구쟁이를 찾아볼 것만 같다. 못 찾으면 그 날 밤 달님에게 어디에서 우릴 훔쳐보고 있었냐고 물어봐야할 것만 같다.

- 현실감과 생동감 있는 시를 쓰려면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물론 시인이라고 다 올바른 지식인은 아니지만 올바른 지식인이라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 인간을 살기 어렵게 하는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따져야 한다.  101

 시를 쓰는 일은 내 존재를 확인해가는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115~117

시는 시다. 이어지는 글로 해명할 수있는 산문과는 다르게 짧은 문장과 몇 단어로 읽는 이에게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공광규님의 시와 그 속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분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추구하는 삶이 어떤 빛깔인지 떠올려보게 된다. 또한 나의 느낌이 실제와 다르다하더라도 그 또한 글이 주는 또다른 매력이라고 수달형제들처럼 억지 웃음지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오랜만이다. 나의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나를 만나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책을 말이다. 공광규님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난 것이 처음이지만 마치 작가님의 삶을 모두 들여다본 듯한 착각이 일게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내가 잘 어루만지며 걸어가고 있는지, 느끼면서 주위를 살피며 살아가고 있는지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한다.

지난 달부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인문학' 강의를 듣고 있다. 부쩍 생각이 많아진 요즘, 공광규님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겨준다.

-사람들은 경쟁과 속도를 현대적 인간의 보편적 선으로 알고 있다. 같은 길을 빨리 가려고 대로에서 무리들과 경쟁한다. 그러다보니 부딪히고 막히고 싸우는 것이다. 차라리 나만의 오솔길을 가는 것이 편하고, 실제로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경쟁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90

나를 중심으로 뻗어간 나의 주변의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다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잘나고 멋진 나보다는 나를 가장 아끼는 나로 살면서 주변을 돌보면서 그들의 삶에 나다움을 심어주는 그런 나로 살아가고 싶다. 공광규님이 말한 나만의 오솔길. 나는 나만의 오솔길 위에 나다움을 키워내며 나로 인해 주변인들의 삶에 잠시나마 위안을 안겨주는 그 순간을 만들어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공광규님의 글을 읽은 동안 참 따뜻하고 위안을 받았다. 그 위안 속에 나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탄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펜은 칼보다 무섭다 했다. 당장 목을 겨누지는 못하지만 서서히 숨을 끊을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 준다. 그 고통은 삶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어 놓을 만큼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번 쓰여져 세상에 나오면  진실은 중요치 않다. 믿는자에 의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해명이란 진실은,  믿는자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 되어 억울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하고, 진실은 묻히고 또 다른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다.

 

내가 오늘 만난 이는 탄실이란다. 김명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너무나 낯선 이름에 정말? 우리나라에 여성 소설가가? 언제? 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에게 다가왔다. 너무나 낯선 이를 만나러 가는 첫 관문인 표지와 차례를 보면서 오랜 세월 우리에게 잊혀져 있어야만 했던 진실은 무엇일까라는 구체적인 의문이 시작되었다.

탄실에게는, 기생의 딸이자 첩의 딸이라는 시작점부터 그녀의 삶은 피폐화 되었다. 자신의 출생의 그늘을 지우기라도 하듯. 세상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열심히 공부했고, 자신을 따돌리고 외롭게 버려두는 현실에 맞서기 위해 자신을 규격화하여 가둬 두며 살았다. 따돌리고 비방하고 없는 소리 지껄여도 두 손 불끈 쥐고 해명의 가치도 없다는 듯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단단한 여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그 시대의 남성들에게 도전이라고 받아들여졌을까.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춰둔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고자 하는 이기심과 남자라는 이름 앞에 철저히 무너져내리는 여성을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탄실은 첫 순정을 빼앗기고 만다.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에게는 부정과 음침함, 색을 밝히는 신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가면에 가려진 그녀의 삶을 치욕과 모멸로 치부하기에 이른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던가. 탄실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한 그는 손익에 맞춰 새로운 인생을 걷지만, 탄실의 인생은 내리막길의 시작을 알린다.

탄실의 삶은 참 녹록치 않다. 잠깐의 반짝거림은 긴 어둠을 열어주고, 긴 어둠에서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녀를 더욱 잠식시켜 버린다. 탄실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더 공부하고 더 애쓰며 자신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려 애쓴다. 쉬지 않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문장 하나 낱말 하나에 의미를 살피며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의지는 번번히 허물어지고 갈 곳 없는 한없이 처량한 신세로 만들어준다. 글쟁이는 가난뱅이라고 했던가. 탄실의 가난은 글을 썼기 때문이었을까. 엄마와 이모. 동생들까지 나서서 그녀에게 용돈을 쥐어주지만 그녀는 항상 가난했다. 그리고 항상 새 일자라를 찾아 다녀야만 했다. 탄실은 항상 배움이라는 도피처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평양과 도쿄를 오가며 자신의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그녀의 삶은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며 그 속에서 그녀는 황폐해져갔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메말라가며 어떤 것이 사랑인지, 무엇을 사랑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채 서른이라는 나이를 맞이한다.

 

탄실의 삶을 들여보며, 그녀가 왜 실패를 거듭했어야 했는지, 왜 해명도 한 번 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투서도 한장 남기지 않았으며, 자신을 능멸한 남자들 집에 들어가 아내들에게 폭탄 발언조차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순간이 있었다. 탄실이 세상을 향해 소리치려는 그 시기 우리나라는 여성은 남성을 존중해야 하며, 남성의 죄를 덮어주는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 어떠한 진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밖에 되지 않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바닥이었다. 그 속에서도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을 쓰고 신문에 연재하며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여성의 사회 진출의 첫 문을 열어준 이임에 틀림없다. 그럼 탄실에게 친구는 어떤 존재였을까.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탄실의 도도함과 깊은 학식 그리고 당당함은 견제의 대상으로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일본과 치열한 투쟁의 시대였던만큼 누구에게나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남자들의 권력 앞에서 당당했던 그녀의 무너짐은 카타르시스적인 희열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나보다 잘 배웠다는 여자도 남자의 권력을 등에 업고 지내는 나약하고 부도덕하다는. 힘든 자신을 위로하려는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그 시대를 살았던 문학소녀이자 음악 감상을 취미로 가진 탄실은 미움의 대상이며, 어려운 처지의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의 대상이 된 사회의 희생양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나와 당당히 서고 싶어했던 탄실. 김명순.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남자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짓밟히고 짓이겨졌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세상이 그녀의 단단한 심지를 받아낼 준비가 되지 않아 그녀를 쓸쓸하게 등져야 했던 그 시대. 그녀는 그 때를 어떻게 기억하며 눈을 감았을까.

기생의 딸로 낳은 엄마를 엄마로 부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엄마의 이름조차 모른 채 살아간 자신의 지난 날을 되새기며 얼마나 깊은 상처 하나를 가슴에 묻었을까. 탄실을 만나는 내내 마음이 아리고 답답했다.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날개를 꺾어버린 그 순간, 그녀는 꺾인 날개를 젓고 또 저어 새로운 둥지를 찾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날고 또 날았다. 그러나 세상에 김명순. 이름 석자를 알리지 못한 채 날개를 접어야만 했다. 거짓을 진실로, 진실은 또 다른 결과로 만들어지는 세상의 이야기는 김명순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여성이라서, 흑인이라서, 장애인이라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약자라는 틀에 가두고 그들의 현실을 부각시키며 밟고 올라서려는 많은 이들에게 탄실의 억울한 누명과 힘들었던 삶은 되새김질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다.

 

세상이 아팠던 그 때 그 시절. 자신의 누추한 삶을 감추기 위한 희생이 필요했던 그 시절.

 

많은 이들의 시기와 괄시를 받으며 꿋꿋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살아냈던 탄실. 김명순 작가에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힘겨운 삶을 애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 레시피
테레사 드리스콜 지음, 공경희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한동안 남편이 식탁을 책임져 주었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들이 다양한 매체에 등장하고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레시피로 자극이 되었던 그 무렵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요리를 해 왔던 남편이 색다른 요리로 식탁을 채워주고, 두 아이를 조수로 임명하면서 함께 주방을 채워주니 지켜보는 내 맘도 안정되고, 식탁 앞에 앉은 두 아이의 표정 또한 달라졌다. 땀 흘리며 셰프 흉내를 낸 신랑도 매우 만족해 했다. 이것이 소박하고도 참 소중한 추억이며 일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두 아이의 곁에 얼마나 오래도록 이 모습으로 살아갈지 잘 모르겠거니와 지금과 같은 평온함이 언제까지 우리 곁에 함께 해 줄지 또한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사고 소식을 들으면서 혼자 남은 자식 또는 부모. 그들은 앞으로 얼마나 깊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야 빛을 볼 수 있을까 한없이 걱정스럽고 함께 죽음을 맞았다면 혼자 남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몰랐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하곤 했다. 그래서 한때 남편에게 우린 정말 사고로 떠나야 한다면 네 명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참 모질고 잔인한 말이긴 하지만 아이들이 혼자 견뎌내며 살아야 하는 그 시간을 누가 곁에서 봐 줄 것이며, 부모만 남는다 해도 두 아이를 떠나보내고 어떻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까 너무나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 때마다 남편은 말한다. 네 명이 다함께 살아남으면 된다고.

 

인생레시피』란 제목과 더불어 책소개 글을 보면서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그 뒷이야기를 미리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은 반가움과 걱정스러움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원하지 않았던,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죽음이라는 문을 열어야만 했던 엄마 엘레노어. 그녀는 평범한 일상 생활 가운데 가슴에 멍울이 잡히는 아찔한 순간을 맞는다.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녀의 삶을 또다른 방향으로 안내하게 한다. 여덟살 어린 딸을 두고 엄마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결코 나약한 모습으로 남지 않으려 노력하고  무너져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곤 딸에게 엄마가 꼭 필요할 때, 엄마의 부재로 힘겨움도 가슴으로 끌어안으려 할 때를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 동안 딸과 함께 해 왔던 요리와 그녀의 엄마를 통해 배운 요리들의 레시피를 쓴다. 레시피와 함께 딸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에 얽힌 추억 그리고 엄마가 너의 곁에 있음을 알리며, 함께 있어 주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을 담담하게 글로 남겨두었다. 그 편지는 딸 멜리사가 스물다섯살이 되던 해에 전달된다.

 

죽음을 앞둔 엄마가 딸에게 쓰는 편지, 얼마나 애닳고 아팠을까. 자신에게 찾아온 암덩어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며, 그 결과를 부정하고 싶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어린 나이에 엄마의 빈자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딸에 대한 미안함과 성장통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혼자 경험해 나가야 하는 그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함에 또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싶어 엘레노어의 담담한 편지글에 더 마음이 아파왔다.

그리고 여덟살 멜리사가 스물다섯살이 되어 엄마의 편지가 담긴 책을 받고 먹먹해 하는 모습과 아빠와 남자친구에게 보이지 않으며 숨죽여 한장한장 넘길 때 멜리사의 감정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내내 함께 숨죽여 읽게 되었다.

엘레노어가 떠난 빈자리는 남은 자들에게는 너무나 힘겹다.

남편 맥스는 사랑을 하고 싶고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하다.  다시 사랑을 한다는 것이 두려운 현실로 다가오며 먼저 등을 돌리고 엘레노어와 했던 그 사랑의 빛을 찾아 가슴을 열려고 한다. 혼자 남은 남편의 외로운 사랑에는 용기가 없다.

딸 멜리사는 남자친구의 프러포즈 순간이 두렵다. 한 남자의 부인이 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된다는 미래의 시계가 멜리사를 두렵게 한다. 타인을 향한 따스한 눈빛이 서툴고 자신의 감정 표현이 어색한 멜리사를 보면서 엄마의 사랑이 세상에 대한 자신감마저 잃게 한 건 아닌가 싶었다.

 

'가족'이란 구성원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을 채우고 있을 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 부모라는 사람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며, 자식이란 나의 핏줄들이 우리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을 거라는. 그러나 가족 구성원 하나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가운데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리면 남은 자들의 혼란은 안정이라는 시간을 찾지 못한 채 오래도록 깨진 믿음으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엘레노어의 남편도 딸도 빈자리로 인한 상처로 새로운 삶에 첫발을 떼기를 두려워한다. 결정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상처가 너무나 확대되어 자신을 내려다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엘레노어의 편지를 보며 멜리사가 과거를 회상해보고, 아빠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볼 때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그들이 살아갈 내일은 상처가 추억이 되고, 추억이 현실이 되어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생레시피』 속에 담긴 엘레노어의 담담한 표현과 요리에 담긴 맛과 의미를 통해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같이의 의미로만 단정지을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 부족하고 서툰 사랑으로 서로를 조율해가는 그 사람이 진정한  내 사람이며, '엄마'라는 이름표를 지어준 두 아이에게 세상의 두려움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사람이다. 나는 함께 하는 이들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인생으로 발전시키며 서로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살아가고 싶어졌다. 그들에게 나는 '함께'하는 인생으로 살아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년 전의 기도
오노 마사쓰구 지음, 양억관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년 전의 기도 / 오노 마사쓰구 글 / 양억관 옮김

 

 

폭염으로 지쳐갈 쯤 만난 9년 전의 기도는 나에게 청량함으로 첫 느낌을 전달했다. 바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이 마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는 듯한 신기함과 하얗게 일어나는 구름이 책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느낄 수 있어 반가움으로 책장을 펼칠 수 있었다.

 

9년 전의 기도를 통해 만난 사나에는,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고 한 아이의 엄마이며 부모의 딸이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고 믿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닥칠지 내다보지 못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배신했고 사나에의 곁은 배신한 사랑과 닮은 케빈이 지켜준다. 사나에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케빈이 있기에 삶을 내려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지키고 이겨내야 하는 것만이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나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경험하는 많이 일들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다만 케빈에게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지렁이를 지켜보고 지렁이가 제 힘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만이 엄마인 사나에가 유일하게 해낼 수 있는 일임을.

 

케빈은 사나에만큼이나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숨기는 것도 모두 힘든 일 중 하나이다.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 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나에는 너무나 외롭고 지친다. 그 때마다 사나에에게 직언을 남기는 어머님의 말씀에 사나에는 더 이상은 도망갈 곳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나에가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을 때조차 지금의 이 행복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라는 말로 찬물을 끼얹는 어머니의 대사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 찬물의 대사는 곧 현실이 되어 사나에는 떠난 이의 뒷모습조차 보지 못한 채 남겨진다. 사나에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얼마나 외롭고 지쳤을까, 삶이라는 레이스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케빈을 향하는 에너지가 고갈되면 어쩌나, 책을 읽는 내내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견딜 수 있는 힘은 케빈도 부모도 아니다.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 주는 밋짱 언니이다. 밋짱 언니에게도 아들이 하나있다. 밋짱 언니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의 길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현재와 9년 전의 여행길,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는 것만 같은 9년 전의 기도의 이야기 방식은 낯설음과 함께 잠시의 쉼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문장 하나하나에 힘을 싣고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정 변화에 글쓴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배제시켰다. 안타까울 수도, 펑펑 울 수도, 목청껏 소리를 질러 내뿜을 수도 있는데 항상 감정을 낮추고 그 감정의 울먹임을 독자에게 맡겼다.

 

- 기뻐해야 할지 절망해야 할지, 아니면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파도 소리는 너무도 중립적이었다. (79)

- 사지를 버둥거릴 때마다 등껍질이 모래 속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그게 아래서 무너지는 모래 쓸리는 소리는 부드러운 파도 소리엘 지워져 들리지 않는다. 설령 이 쇠약해진 바다거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눈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해도 파도 소리에 지워지고 말았으리라. (118)

 

감정의 높고 낮음의 선을 모두 파도가 지켜주고 있다. 그러나 파도는 너무나 이성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다. 항상 그 자리에서 바라봐주고 지켜주면서 절대 성내지도 그렇다고 수긍하지도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다고만 한다. 이것이 아마 슬픔을 이겨내는 많은 이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위로해주는 작가만의 힘이며, 최고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청량하고 잔잔한 책 표지가 주는 반가움의 첫인상은 책장을 넘기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문장에 쓰인 단어에서 쓰인 잔잔함은 문장이 끝마칠 때 내 마음 속은 회오리와 같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것이 9년 전의 기도의 작가 오노 마사쓰구의 표현 방법이며, 그의 향기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으로 기억될 한 작품을 만난 시간, 지금의 이 느낌을 잊지 않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에게나 생명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존귀한 생명 앞에 우리는 비약한 존재이며 지키려고 애쓴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힘으로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 앞에 숙연하며 자세를 낮추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의학드라마를 좋아하고, 의사가 직업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환상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그들에 대한 동경심에서 일 수도 있다. 난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이 만들어가는 수많은 만남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일으키는 그 순간이 좋다. 의사와 환자, 의사와 보호자, 환자와 보호자, 의사와 의사가 만들어내는 일상 같은 이야기들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경이롭고 인간적이며, 이상보다는 현실을 인정해 나가는 과정을 조금은 안정된 맘으로 지켜볼 수 있다. 의사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 이성적이고 냉정하며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을 거라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몇 달 전, 신문에 실린 오열하는 의사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이 맡아 진료하던 환자가 죽어 고통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나는 의사의 뒷모습에서 가운 속에 감춰진 그들의 고뇌와 책임감 그리고 환자를 바라보는 인간적인 눈빛을 보게 되었고, 그 동안 얼마나 깊은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함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도달하여 끊임없이 분투하며 우리가 만들어가는 점근선(漸近線)은 믿을 수 있다. (141)

 

-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환자를 예전의 삶으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붕괴된 환자와 그 가족을 품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하여 그들의 실존적 상황을 직면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새롭게 배운 의사의 의무이다. (196)

 

나는 오늘 의사들의 속마음을 여실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의사를 만났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뿐 아니라 철학과 문학, 과학까지 의학과 관련된 학문에 온 정성을 기울여 배우고 익히며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의사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때로는 자신감 넘치며 타인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나눔에 항상 적극적이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뛰어넘지 못할, 누구도 넘으려고 하지 않는 장애 앞에서 당당하고 장애물이 가진 진실을 스스로 파헤치며 쉽게 고개 숙이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도전과 배짱은 아내와 그의 딸 그리고 가족들과 동료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숨결이 바람 될 때책 소개를 보며 글쓴이이자 글의 주인공인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그 순간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 두려워 책장을 넘기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누구나 죽음 앞에 설 것이고,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지켜보는 것은 쉽고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다.

 

폴은 미래를 꿈꾸며 당당한 걸음을 옮길 때 이라는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장애물을 만난다. 그는 자신의 몸 안에 키워진 장애물을 탐색하고 치료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수술을 하고, 혼자 남을 아내에 대한 걱정과 2세의 출산, 그의 평생 꿈이라고 여기고 있던 글쓰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일궈간다.

 

-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할 테니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178)

 

폴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자신의 삶에 장애가 된 암과 맞서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 을 순회 방문객으로 비유하며 지금 현재도 살아있다고 인정하며 삶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긍정적 사고와 삶에 대한 의지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게 느껴진다.

 

폴은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자신의 선택과 가족들의 인정이 그를 편안하고 다행스럽게 그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여전히 존엄사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이고,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죽음을 앞에 둔 이가 자신의 죽음을 경건히 받아들이고 그 죽음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시간 정도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가족들에게 그들이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환자가 어떤 미래를 원할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편안한 죽음을 원할까, 아니면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액체가 들어가고 나오는 여러 주머니들과 끈을 매달고 연명하는 삶을 원할까. (112)

 

폴은 남겨두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8개월 딸 그리고 가족과 동료들. 그들은 폴이 그들 옆에 좀 더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폴은 선택했다. 치열하게 장애와 맞섰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문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폴은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준비됨을 선포하고 아내의 품에서 깊은 잠을 빠져 든다. 폴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마무리 지었고, 가족들에게 아름다운 추억하나로 기억될 수 있는 모습으로 곁을 떠났다.

 

-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중략]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94)

 

의사에서 환자로 갑자기 바뀐 입장이 된 폴. 그는 용감했다. 그리고 용기 있게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책임져 갔다. 하늘을 원망하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투쟁도 그는 하지 않았다. 그의 용기와 긍정적 사고.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와 주변을 보살피는 따스함이 참 부러웠다.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앞으로의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주었다.

폴의 이야기는 분명, 살아가는 힘든 순간 옳음에 대한 믿음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함께 할 수 있었던 며칠 참 감사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