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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6년 8월
평점 :
펜은 칼보다 무섭다 했다. 당장 목을 겨누지는 못하지만 서서히 숨을 끊을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 준다. 그 고통은 삶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어 놓을 만큼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번 쓰여져 세상에 나오면 진실은 중요치 않다. 믿는자에 의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해명이란 진실은, 믿는자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 되어 억울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하고, 진실은 묻히고 또 다른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다.
내가 오늘 만난 이는 탄실이란다. 김명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너무나 낯선 이름에 정말? 우리나라에 여성 소설가가? 언제? 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에게 다가왔다. 너무나 낯선 이를 만나러 가는 첫 관문인 표지와 차례를 보면서 오랜 세월 우리에게 잊혀져 있어야만 했던 진실은 무엇일까라는 구체적인 의문이 시작되었다.
탄실에게는, 기생의 딸이자 첩의 딸이라는 시작점부터 그녀의 삶은 피폐화 되었다. 자신의 출생의 그늘을 지우기라도 하듯. 세상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열심히 공부했고, 자신을 따돌리고 외롭게 버려두는 현실에 맞서기 위해 자신을 규격화하여 가둬 두며 살았다. 따돌리고 비방하고 없는 소리 지껄여도 두 손 불끈 쥐고 해명의 가치도 없다는 듯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단단한 여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그 시대의 남성들에게 도전이라고 받아들여졌을까.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춰둔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고자 하는 이기심과 남자라는 이름 앞에 철저히 무너져내리는 여성을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탄실은 첫 순정을 빼앗기고 만다.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에게는 부정과 음침함, 색을 밝히는 신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가면에 가려진 그녀의 삶을 치욕과 모멸로 치부하기에 이른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던가. 탄실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한 그는 손익에 맞춰 새로운 인생을 걷지만, 탄실의 인생은 내리막길의 시작을 알린다.
탄실의 삶은 참 녹록치 않다. 잠깐의 반짝거림은 긴 어둠을 열어주고, 긴 어둠에서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녀를 더욱 잠식시켜 버린다. 탄실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더 공부하고 더 애쓰며 자신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려 애쓴다. 쉬지 않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문장 하나 낱말 하나에 의미를 살피며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의지는 번번히 허물어지고 갈 곳 없는 한없이 처량한 신세로 만들어준다. 글쟁이는 가난뱅이라고 했던가. 탄실의 가난은 글을 썼기 때문이었을까. 엄마와 이모. 동생들까지 나서서 그녀에게 용돈을 쥐어주지만 그녀는 항상 가난했다. 그리고 항상 새 일자라를 찾아 다녀야만 했다. 탄실은 항상 배움이라는 도피처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평양과 도쿄를 오가며 자신의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그녀의 삶은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며 그 속에서 그녀는 황폐해져갔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메말라가며 어떤 것이 사랑인지, 무엇을 사랑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채 서른이라는 나이를 맞이한다.
탄실의 삶을 들여보며, 그녀가 왜 실패를 거듭했어야 했는지, 왜 해명도 한 번 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투서도 한장 남기지 않았으며, 자신을 능멸한 남자들 집에 들어가 아내들에게 폭탄 발언조차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순간이 있었다. 탄실이 세상을 향해 소리치려는 그 시기 우리나라는 여성은 남성을 존중해야 하며, 남성의 죄를 덮어주는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 어떠한 진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밖에 되지 않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바닥이었다. 그 속에서도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을 쓰고 신문에 연재하며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여성의 사회 진출의 첫 문을 열어준 이임에 틀림없다. 그럼 탄실에게 친구는 어떤 존재였을까.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탄실의 도도함과 깊은 학식 그리고 당당함은 견제의 대상으로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일본과 치열한 투쟁의 시대였던만큼 누구에게나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남자들의 권력 앞에서 당당했던 그녀의 무너짐은 카타르시스적인 희열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나보다 잘 배웠다는 여자도 남자의 권력을 등에 업고 지내는 나약하고 부도덕하다는. 힘든 자신을 위로하려는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그 시대를 살았던 문학소녀이자 음악 감상을 취미로 가진 탄실은 미움의 대상이며, 어려운 처지의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의 대상이 된 사회의 희생양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나와 당당히 서고 싶어했던 탄실. 김명순.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남자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짓밟히고 짓이겨졌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세상이 그녀의 단단한 심지를 받아낼 준비가 되지 않아 그녀를 쓸쓸하게 등져야 했던 그 시대. 그녀는 그 때를 어떻게 기억하며 눈을 감았을까.
기생의 딸로 낳은 엄마를 엄마로 부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엄마의 이름조차 모른 채 살아간 자신의 지난 날을 되새기며 얼마나 깊은 상처 하나를 가슴에 묻었을까. 탄실을 만나는 내내 마음이 아리고 답답했다.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날개를 꺾어버린 그 순간, 그녀는 꺾인 날개를 젓고 또 저어 새로운 둥지를 찾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날고 또 날았다. 그러나 세상에 김명순. 이름 석자를 알리지 못한 채 날개를 접어야만 했다. 거짓을 진실로, 진실은 또 다른 결과로 만들어지는 세상의 이야기는 김명순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여성이라서, 흑인이라서, 장애인이라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약자라는 틀에 가두고 그들의 현실을 부각시키며 밟고 올라서려는 많은 이들에게 탄실의 억울한 누명과 힘들었던 삶은 되새김질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다.
세상이 아팠던 그 때 그 시절. 자신의 누추한 삶을 감추기 위한 희생이 필요했던 그 시절.
많은 이들의 시기와 괄시를 받으며 꿋꿋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살아냈던 탄실. 김명순 작가에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힘겨운 삶을 애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