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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슬픔
공광규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9월
평점 :
내 나이가 어느 새 마흔을 넘어섰다. 어릴 적 마흔을 넘은 선생님들과 동네 어른들을 보면서 저 나이가 되면 뭐든 잘하고 막힘이 없으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이뤄낸 완성됨을 의미하는 숫자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내가 맞이한 마흔은 여전히 바둥거리며 이루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 채 헤매며 서툴고 후회와 반성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이다. 짧고도 짧지 않은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내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일, 창피하고 후회스러운 순간,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결정 등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인생이지만 나의 인생을 글로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문득 문득 든다. 후회는 후회되는 대로, 대견함은 뿌듯함으로,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응어리는 터트려 상처딱지를 앉도록 스스로를 위로해주고 싶다. 그 때마다 자신의 시간을 담담히 글로 써내려가는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라는 그들이 참 부럽다. 글이든 그림이든, 소리든 동작이든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들이 말이다.
우리 아빠는 광부셨다. 저학력에 가진 기술 하나 없이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고, 밥벌이를 위해 시작한 것이 사촌형을 따라간 강원도 탄광촌이었다. 깜깜한 굴 속에 모자에 달린 렌턴에 의지하여 석탄을 캐며 젊은 시절을 보내셔야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옷 가지 몇 벌뿐 지켜 내야만 했던 자식만 넷.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서워도 싫어도 가야만 했던 지하 굴 속.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긴장을 잘 하며 소심한 우리 아빠. 지금도 여전히 은행. 병원. 관공서를 혼자 못 가신다. 엄마를 대동하거나 만만한 나를 불러서 가야 큰 소리 치고 너털웃음 지으며 여유있는 척 하며 일을 보신다. 그런 사람이 깜깜한 어둠을 뚫고 그 길을 갔을 때는 책임감이란 자동시스템에 전원이 켜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탄광이 폐광하고 도시로 올라온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아빠는 여전히 동굴을 못 들어가신다. 입구부터 시작된 어둠은 그가 천성적인 겁쟁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말씀으로는 지겹도록 들어가본 굴 안 봐도 그 속을 훤히 알기에 돈 주고는 안 들어간다 하시지만, 그의 굵은 손마디와 딱딱해진 손바닥에 서린 땀이 그가 그동안 짊어졌던 짐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웠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어린 자식들 앞에서 술마시고 맥없이 쓰러지며 한맺힌 울분과 눈물을 보여야만 다음 날 다시 갱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옛날, 왜 그리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만 했을까. 아빠는 왜 단단하고 무쇠같은 존재로만 있길 바래왔던가. 그의 눈물 한 번 닦아주지 못한 것이 이렇게 후회되고 죄송스러울지 그 때는 왜 몰랐을까.
-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늘 실패의 삶을 산다. 늘 결핍의 삶을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버지다. 48쪽
오늘을 사는 그의 삶은 행복할까. 귀농하여 혼자 살면서 계절마다 택배 상자를 올려다보내며 잘 받았냐고 전화하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자식의 삶에 관여하고 사시는 지금 그는 행복할까. 암 수술을 받던 날, 수술 대기실로 들어갈 때 긴장해서 자식 목소리에 흔들리던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는데, 회복하고 나와서는 그 동안 못 잔 잠 다 잔 거 같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씀하신. 나의 아버지는 지금쯤이면 행복하실까.
정말 오랜만에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면서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전히 철부지 자식이며 여전히 내 곁에 건재해 주기만을 바라는 미운 자식으로만 곁에 있다는 것이 내 스스로 깊은 숨을 내쉬게 한다.
공광규님이 회상하는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시골집을 맞으면서 절로 나의 부모님과 어린 시절 힘들게 살면서도 나만의 꿈을 꾸던 그 곳이 떠올랐다. 몇해전 가족 여행 길에 찾아간 시골집은 이미 다 철거되고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집.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아이들은 집이 없어졌다는 그 말을 한참동안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공광규님이 시골집을 두고 모텔에서 자야만 했던 그 시간 모텔에서 울고. 여섯 식구 힘들다 하면서도 옹기종기 모여살았던 그 장소가 말끔히 사라진 그 시간, 나는 마음으로 깊이 울었다.
여고시절. 문예창작반으로 동아리 활동을 하며 문학소녀의 꿈을 꿀 때가 있었다. 일주일에 몇 편의 시를 써서 선배에게 검사를 받고 수정을 하고 다시 쓰고 하며 나름의 글을 쓴다고 폼잡았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왜 고민하는 척, 왜 깊은 고민을 하는 척하며 글을 썼는지 지금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한정적인데 내가 마치 그들의 심정을 다 알고 있는 듯, 그들의 존재 이유를 다 아는 듯 글에 그 의미를 모두 담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걸 나보다 1살 많은 선배가 고쳐준다고 내 맘에 수많은 상처를 내주었다. 그때 썼던 시 중에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나그네'와 '새벽'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시 두편이다. 나그네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나였을텐데, 새벽을 맞이해보지도 못한 나였을텐데 무슨 힘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 시를 썼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모르겠는 그 두 편의 시가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수상의 기쁨으로 이어져 텅 비어있을 뻔한 생활기록부의 한 공간을 채워주었다. 지금은 어른 흉내낸 여고생의 척을 눈감아주신 결과로 받아들인다.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 눈과 비에 얇아지는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95쪽. 수종사 풍경 中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매화꽃잎 위에 똥을 싸 놓고서는 / 그걸 매화향이라고 울길 때일 것입니다. 98쪽. 병산습지 中
시를 배웠다. 시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해서 써서는 절대 공감을 얻을 수 없는 글이다. 그리고 그것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끼고 살펴볼 눈과 마음이 있어야만 글로 태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광규님의 '수종사 풍경과 병산습지'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그 속에서 참아내는 고통을 충분히 알고 있는 성인의 성숙됨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엄마를 따라 절에 가면서 처마끝에 매달려 낭랑한 소리를 내는 풍경이 참 좋다 했으면서도 그 속에 감춰진 고통을 몰랐으며, 바람이 몸을 때릴 때 참아내며 내는 그 소리를 좋다고만 한 내 귀와 마음은 또 얼마나 철부지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개구쟁이 수달네 아이들이 매화꽃잎에 똥을 싸놓았다. 그걸 매화향이라고 우긴다. 그걸 다 알고 있는 달이 함박웃음 떠뜨리면서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주고 우리는 그 매화꽃향을 맡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며, 매화꽃을 볼 때마다 어딘가에서 몰래 훔쳐보고 있을 수달네 개구쟁이를 찾아볼 것만 같다. 못 찾으면 그 날 밤 달님에게 어디에서 우릴 훔쳐보고 있었냐고 물어봐야할 것만 같다.
- 현실감과 생동감 있는 시를 쓰려면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물론 시인이라고 다 올바른 지식인은 아니지만 올바른 지식인이라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 인간을 살기 어렵게 하는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따져야 한다. 101쪽
- 시를 쓰는 일은 내 존재를 확인해가는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115~117쪽
시는 시다. 이어지는 글로 해명할 수있는 산문과는 다르게 짧은 문장과 몇 단어로 읽는 이에게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공광규님의 시와 그 속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분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추구하는 삶이 어떤 빛깔인지 떠올려보게 된다. 또한 나의 느낌이 실제와 다르다하더라도 그 또한 글이 주는 또다른 매력이라고 수달형제들처럼 억지 웃음지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오랜만이다. 나의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나를 만나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책을 말이다. 공광규님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난 것이 처음이지만 마치 작가님의 삶을 모두 들여다본 듯한 착각이 일게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내가 잘 어루만지며 걸어가고 있는지, 느끼면서 주위를 살피며 살아가고 있는지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한다.
지난 달부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인문학' 강의를 듣고 있다. 부쩍 생각이 많아진 요즘, 공광규님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겨준다.
-사람들은 경쟁과 속도를 현대적 인간의 보편적 선으로 알고 있다. 같은 길을 빨리 가려고 대로에서 무리들과 경쟁한다. 그러다보니 부딪히고 막히고 싸우는 것이다. 차라리 나만의 오솔길을 가는 것이 편하고, 실제로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경쟁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90쪽
나를 중심으로 뻗어간 나의 주변의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다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잘나고 멋진 나보다는 나를 가장 아끼는 나로 살면서 주변을 돌보면서 그들의 삶에 나다움을 심어주는 그런 나로 살아가고 싶다. 공광규님이 말한 나만의 오솔길. 나는 나만의 오솔길 위에 나다움을 키워내며 나로 인해 주변인들의 삶에 잠시나마 위안을 안겨주는 그 순간을 만들어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공광규님의 글을 읽은 동안 참 따뜻하고 위안을 받았다. 그 위안 속에 나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