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지음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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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작가 은유의 신간으로, 시 번역가 7인의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산문이다. 시를 읽는 문화가 거의 없는 현 사회에서 시 번역은 애정이 없다면 지속하기 힘들고 잘할수록 투명해지는 노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나누기 위해 애쓰는 이들. 저자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수성'과 '자기 돌봄' 그리고 '감탄하는 능력'과 '운동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찾아낸다. 시 번역을 왜 하는지, 시를 왜 읽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국 인터뷰이들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AI가 소설을 쓰고 번역가를 대체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외침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상기한다. 더불어 번역은 단순한 활자의 변환이 아닌 문화의 이해, 의도의 이해, 마음의 이해를 동반하는 일이자 사랑과 감탄을 함께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편견을 깨기 위해 문학을 택했다는 안톤 허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오랜 시간 외국에 있으며 그들이 우리나라에 갖는 폭력적인 편견을 경험한 그는 굳이 문학을 통해 다양성을 강조한다. 장르문학, 퀴어문학, 여성문학을 내보냄으로써 한국 사람들도 다양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우리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너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피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거냐? 문학이 최고잖아요. 우리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아무리 과학 논문을 많이 내고, 삼성이 세계를 지배해도 아직까지 그런 편견을 갖는 걸 보면 다른 영역으로 우리를 보여줄 수밖에 없어요."(72쪽) 문학을 연장 삼아, 배제하고 왜곡하고 고정관념으로 사람을 대하는 케케묵은 차별 관념과 관행에 균열을 일으키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73쪽)는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일은 왜 이리도 즐거운 것일까? 평소 인터뷰를 찾아 읽는 편이다. 누군가 내게 취미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자신 있게 '인터뷰 읽기'라 답할 정도로 좋아한다. (따라서 다른 책들보다 인터뷰집을 조금 더 편애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잡지나 기사, 인터뷰집을 통해 만나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생각은 자연히 내 세계를 넓힌다. 닿지 못할 지점까지 혹은 닿을 생각조차 없던 지점까지 안내하는 타인의 말들. 그리고 마음들. 은유 작가와 7명의 시 번역가의 말과 마음 역시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읽는 내내, 사랑과 감탄의 언어를 만끽할 수 있어 기뻤다. 앞으로도 오래 이들과 함께 희박한 아름다움을 좇아 마침내 시에, 문학에 도착하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결 힘이 난다.


#책속의한줄 🔖

(10p.) 나는 한국 시 번역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사랑과 감탄의 언어를 원 없이 들었다. 스스로 '과몰입 성향'이라고 칭할 만큼 아름다운 걸 볼 자세와 감탄하는 능력을 장착한, "자기 힘에서 멀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눈앞에 존재했다.

(56p.) 모든 게 매끄러우면 다 읽고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근데 정보라 작가님 글은 읽다가 '이거 뭐지' 하고 다시 돌아가서 읽게 하는 약간의 저항이 있어요. 비단보다는 울 같은?

(61p.) "견디지 않았어요. 저는 번역을 그만뒀다고 생각했어요. (...) '나는 너희가 필요 없어'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증명했어요. 그때 쌓은 자본과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매일마다 문학 번역을 그만둘 준비가 돼 있어요."

(85p.) 그런데 내 주변에 여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모두 여성으로부터 오니까. (...) 그러니까 핑계를 댈 수가 없어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없었어, 나는 무지해, 이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호모포비아를 만나면 X같고 인종차별주의자를 만나면 X같지만 여성혐오주의자를 만나면 진짜 X같죠.

(110p.) 글이 늘려면 적절한 비판과 정확한 칭찬이 고루 필요하다. 문제는 내용보다 방식이다. 어떻게 말하느냐. 말하는 사람이 찌르기보다 듣는 사람이 찔려야 한다. 쓴 사람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쓴 것이고, 글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111p.) 무언가를 이겨내려면 그 힘은 공동체에서 온다.

(139p.) 재난 이전과 이후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현실, 구멍 뚫린 사회가 조용히 침몰하는 "죽음의 완만함"이 어쩌면 우리가 겪는 재난이고, 공포이고, 고통인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152p.) 나는 그가 ADHD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용기에 놀랐고, 질병과 함께 차질 없이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를 참조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와 노력에 감탄했다.

(170p.) 자기 인식은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되면 파도처럼 밀려온다.

(194P.) 한국어가 구멍이다. 애초에 있던 구멍을 우 좋게 찾은 게 아니라 그가 미세한 틈을 끈기 있게 파고들어 구멍으로 뚫어냈다. 태아처럼 밀고 나와 온몸으로 만들어낸 다른 세상을 향한 출구.

(246p.) 외국어로 소통하면 배려하는 공간이 넓어요. (...) 친구 사귈 때에 제3언어로 하는 게 제일 편안해요. 중립국에서 만나는 것 같아요. 평화지대.

(247p.) 이런 생각도 했어요. 아기들이 되게 빨리 울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냥 보통 사람들이 길에서 임계점이 지나자마자 울어버리면 어떤 풍경일까?

(248p.) 평생을 언어의 과잉 상태에서 살아가고 공부하던 사람이 언어의 기능이 축소된 상태에서 배우자를 만났고, 언어가 무용한 상태에서 아이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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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 프로젝트 -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
봉봉 지음 / 씨네21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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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다수 수상하고, 카카오웹툰에서 다양한 세계관과 작화를 선보여온 봉봉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특히나 기쁜 소식일 것이다.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페이크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만화로 만나볼 수 있다. 각 단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여운이 상당하다. 저자가 그려내는 기발한 상상력의 세계가 놀랍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현실과 판타지, 풍자와 통찰이 저자만의 매력적인 작화와 섞여 완성도 높은 이야기로 탄생했다.

일단.. 정말 재미있었다! 가끔 정해진 기한 내에 너무 많은 책을 읽어야 하면 활자 자체에 질리게 된다. 그럼에도 읽는 일을 멈추자니 허전하고, 새로운 이야기는 채우고 싶고.. 바로 그럴 때! 이런 만화를 읽으면 딱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핸드폰으로 웹툰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다. 책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자는 스릴러 장르 특유의 섬뜩함과 '서술트릭'을 절묘하게 사용한다. 소설 내에 글과 구성으로 트릭을 만들고, 동시에 힌트를 주며 독자를 속이는 추리소설의 한 장르가 바로 이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환기와 상기를 동시에 전한다.

<ANA> ㅣ 페이크 다큐멘터리, SF

최초로 인공 자궁을 통해 태어난 아기인 'ANA'. 아나를 활용한 화려한 감성마케팅으로 인공자궁은 불티나게 팔리고, 상용화된다. 모두가 인공자궁으로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미래. 그리고 그 미래의 명과 암이 실감 나게 그려진다. 일어날 법한 일들, 생각할 법한 사고들, 반응할 법한 사람들까지. 가장 와닿는 문장이 많은 단편이었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여러 번 곱씹으며 인간의 나아감에 대해 생각했다.

<웰다잉 프로젝트> ㅣ 블랙코미디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신개념 리얼리티 쇼 '웰다잉 프로젝트'. 한 마디로 죽기로 결심한 이들이 준비된 전문가들과 함께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자살 돕기 프로젝트.. 일 수도) 정말 이런 프로그램이 나온다면 국내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다가 아찔해졌다. 그리고 그 아찔한 미래를 저자는 실감나게 그려낸다. 현실이 짙게 반영된 블랙코미디에 마냥 웃을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붉은 여왕> ㅣ SF, 판타지

100년 전 개발된 외모 교정 유전자 시술이 전 세계 모두를 똑같은 얼굴로 태어나게 만들어 준 사회. 모두가 똑같이 아름답기에 누구나 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유토피아가 배경인 단편이다. 정말 이런 사회가 온다면 어떨까? 이야기처럼 모두가 외적인 기준에 대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해도, 인간은 아름다움을 욕망할까?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은 학습되는 것일지, 인간이 타고나는 것일지도 궁금해졌다. 더불어 Olivia Rodrigo의 최근 앨범 노래인 'pretty isn't pretty'가 떠올랐다. 사회적 미의 기준은 맞춰도 맞춰도 끝이 없고, 타고나는 것을 외면한 채 말도 안 되는 이상을 좇느라 고통받는 무수한 이들에게 노래와 함께 이 단편을 권하고 싶다. 잠시나마 이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자유로워지길.

이외에도 버스를 하이재킹한 3인의 라이브방송 <마지막 비행> (블랙코미디), 햄스터가 내 도플갱어가 되어 함께 살아가게 된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드라마), 모든 것을 삼키는 변기를 숭상하는 괴짜 사이비 마을의 진실이 담긴 <신은 변기>(호러, 블랙코미디)가 수록되어 있다.

각 단편들은 질문을 남긴다. 이런 사회가 오면 어떻게 할래? 너는 이들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등.. 우리가 속한 현실, 그리고 다가올 미래. 혹은 이미 다가왔음에도 알아채지 못했을 무언가에 대해 물음표를 만들어 내는 것이 SF만의, 장르물만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많은 이들과 함께 읽고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책속의한줄 🔖

(43p.) 희망, 불경 그것은 변할 수 있어요. 인간은 어떤 기술을 사용하기에 따라 옳게 만들 수도, 나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45p.) 끝없이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류라는 종의 숙명. 기술을 사용하는 방향이 가까이서 보면 비틀거릴지언정 멀리서 보면 옳은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나아가길 바랄 뿐.

(46p.) 나는 아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24p.) 이것만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아름다워질 테니까. 다시 모두가 평범해지는 거야.

#웰다잉프로젝트 #봉봉 #씨네21북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7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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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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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 작가의 말 中 (단 한 사람, 최진영)


평소 너무나도 팬인 최진영 작가님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해가 지는 곳으로> 슬픔의 끝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이고, 사랑하는 이가 부재하는 세계의 적막을 기록한 <구의 증명>을 지나 이제는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독자를 반긴다. 저자의 여덟 번째 장편이다. 하니포터 7기 자격으로 가제본을 먼저 만났다. 전체 분량의 ⅓이 수록되어 있는 티저북을 읽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바로 다음 날 서점으로 달려갔다. 저자는 자신이 10여 년간 붙들고 지낸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소설로 전한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의 틈에서 피어나는 최진영식 사랑의 세계. 단숨에 빠져들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완독했다. 올해 최고의 소설을 넘어 인생 소설 등극이다.. 온 마음 다해 추천한다.

열여섯 살이 된 목화는 꿈속에서 사람을 살린다. 꿈에서 살린 사람은 현실 세계에서도 산다. 그러나 살림과 동시에 죽음을 목격해야만 한다. 목화는 수백수천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절대자가 지목한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이는 할머니 임천자와 엄마인 장미수를 거쳐 자신에게 전승된 '수명 중개'이며, 살리는 자의 숙명이다. 목화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판단을 미룬 채 우선 경험한다. 자신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 운명을 선택하기 위해.

소설을 읽으며 정말 많이 울었다. 감히 말해보자면 글의 깊이가 다르다. 정말이지 내가 상상치도 못한 문장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 문장들에 매 순간 저항 없이 마음이 울린다. 문장 사이마다 감정을 끼워두고 그 안에 갇히고 싶었다. 자꾸만 울리다가 기어코 넘쳐버리는 감정들을 전부 이야기 속에 던져 넣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싶었다. 이렇게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는 오랜만이다. 걷다가 밑동이 단단한 나무만 보아도 마음이 뭉클해질 것 같다..

나는 왜 사는가. 이 세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째서 살아야만 하는가. 여전히 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 소설 덕에 겨우 질문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254쪽) 그럼에도 삶이 무용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꺼내 읽고 싶다. 책갈피 해둔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다시 살고 싶어질 것 같다. 이 이야기에는 그런 힘이 있다. 덕분에 기꺼이 살고, 사랑하고 싶어졌다.

같은 삶이 주어졌어도 모두 다르게 산다. 세상은, 삶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상기한다. 자신의 운명과 절대자에 대해 할머니인 임천자는 기적이라 했고, 엄마인 장미수는 악마라고 했으나 목화는 '단 한 사람'이라 명명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을 사는 존재는 나라는 '단 한 사람'뿐이다. 그것은 신도 범접할 수 없는 오직 인간의 몫이다. 나는 단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책속의한줄 🔖

(10p.) 부족하다는 건 뭐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것.

(35p.)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심심할 수가 없다.

(39p.) 월화는 마음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유리잔이 사랑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랑을 전하기 위해 잔이 넘치도록 콸콸콸콸 쏟아붓는 대신 유리잔을 깨고 사랑의 상식을 없애버리는 사람. 월화의 사랑 표현은 종잡을 수 없었다. 외면과 집착, 증오와 헌신, 질투와 찬사, 무조건적인 지지와 의심이 공존했다.

(61p.)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

(64p.) 그러나 목화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숱한 가능성이 진실로 존재하는 각각의 세계를 상상했다. 왜냐하면 그와 비슷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으므로.

(77p.) 멀어지는 미수를 바라보며 복일은 생각했다. 저 사람 저러다 순식간에 가물어버리면 어쩌지. 징조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92p.) 평생 두려움을 만지고 살아 그것은 처음의 모양을 잃고 동글동글 작아졌다. 마음에 들끓던 용암은 긴 세월 조금씩 새어 나와 초라하게 식어버렸다. 산도 하늘도 흙도 신도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마치 자기와 한 몸 같았다.

(93p.) 복일에게 사랑은 심장이었다. 사랑이 멈추면 삶도 끝이었다. (...) 복일에게 미수는 바다였다. 자식들은 바다를 건너야 닿는 섬이었다. (...) 미수에게는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으로 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95p.) 천자처럼 순응하거나 미수처럼 저항하지 않고 목화는 판단을 미룬 채 우선 경험했다.

(100p.) 때로 목화는 "많이 죽었어"라는 말 외에는 꺼내지 못했다. 그럴 때 목수는 "한 명을 살렸다"라고 기록했다.

(104p.)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8p.) 목화는 엄마의 증오를 이해했다. 그 증오를 자기 몸에 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17p.) 그러니까......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 거죠. 목화는 남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말했다. 이유를 몰라도 좋은 건 좋은 거고. 목화가 말을 이었다. 왜 사는지 몰라도 계속 사는 것과 비슷하네요.

(132p.) 힘들면 세 번 정도 참아보고 그만두면 돼. 끌 사장이 덧붙였다. 세 번 참은 게 아까워서 네 번째도 참게 될 거야.

(136p.) 정원의 눈에 목화는 너무 가뿐해 보였다. 주렁주렁 짐을 이고 들고 하루하루 걸어가는 자기에 비해 목화는 마치 운동 삼아 조깅하듯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206p.)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존재만이 사람은 아니다. 그 외의 더 많은 의미가 모여 사람을 이룬다.

(207p.)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힘'이 사람의 세상에서는 중요하겠지만, 그 세상을 만들고 품은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219p.) 죽지 않는 신에게 목숨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무한한 목숨을 특정인에게만 나눠 주는 것이 어떻게 사랑의 증거가 된단 말인가.

(227p.) 장미수는 끝내 임천자와 화해할 수 없었다. 임천자는 장미수가 엄마를 계속 원망하고 미워하길 바랐다. 장미수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자신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후에야 장미수가 깨닫게 될 임천자의 사랑이었다.

(231p.) 목화는 선하면서 악한 사람을, 의롭고도 불의한 이를,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을 생각한다.

(254p.) 10여 년간 붙들고 지낸 여러 질문이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쓴 문장과 단어가 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질문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255p.) 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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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의 힘 - 세상을 다르게 감지하는 특별한 재능
젠 그랜만.안드레 솔로 지음, 고영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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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유독 두통이 심했다. 매 순간 긴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집에 오면 기진맥진 되는 날도 잦았다. 친구들이나 가족들,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맡은 일을 모두 척척 잘 해내고 싶은 마음, 모두에게 친절하고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까지. 언제나 타인을 중심으로 두고 면밀히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리고 그 마음만큼 들어차지 않은 때에는 스스로 크게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매일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들 이렇게 두통에 시달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도, 마음, 두려움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알게 되지(288쪽) 도 않는다. 이제는 내가 꽤나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에 비해 조금 더 피곤하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싫은지. 예민하지 않은 척을 하는 것까지가 두통을 만드는 한 세트다. 왜일까? 왜 예민함은 부정적인 기질로 느껴질까?

저자는 이렇듯, 예민함이 고쳐야 하는 무언가로 느껴지는 문화에 대해 반기를 든다. 미국 최대 ‘예민’ 상담 플랫폼 SR(Sensitive Refuge)의 창립자인 저자는 본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플랫폼의 다양한 상담 사례를 더해 독자가 어떤 부분에 예민한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체크리스트를 제시한다.(출판사 서평中) 그리고 예민함은 성격적 결함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마치 내성적이라는 단어가 한때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모두에게 외향성을 강조했던 것처럼, 예민함 역시 과하게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8장:예민한 사람의 업무능력]과 [9장:예민함이 필요한 사회]에 대해 쓰인 목차가 인상 깊었다. 실생활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꿀팁(?)이 가득하다. 그중 인지적인 뇌를 활성화하여 이성과 감성을 분리하는 방법은 평소에도 노력하던 부분이라 신기했다. 평소 감각으로 하던 행위를 텍스트를 읽으며 다시금 정리하니 명확해진다. 이제는 제대로 감정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분열되고, 서두르며, 지나치게 과도한 이 세상에서 절실히 필요한 예민한 사람들의 관점, 센서티브 웨이에 대해서도 다시 짚어주어 이해가 쉬웠다.

예민함은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예민한 사람들만이 세상을 감지하는 특별한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예민함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가, "저는 매우 예민해요."라는 말이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79p.) 지금까지 무엇이 예민함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단서를 살펴봤다. 어린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 예민해졌을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지원을 아끼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경우에도, 모든 혜택을 흡수할 수 있도록 더 예민해질 수도 있다.

(82p.) 예민한 사람들은 가장 완벽한 조건이 아니면 시들어 버리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다. 오히려 한 방울의 영양분도 놓치지 않고, 사랑스런 꽃들로 가득 찰 때까지 계속해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다육 식물과 유사하다.

(93p.) 구달은 예민함의 가장 강력한 선물 중 하나인 공감을 보여준다.

(111p.) 깊은 감정은 아마도 가장 오해받는 재능일 것이다.

(288p.) 사람들의 의도, 마음, 두려움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알게 돼요.

(289p.) 나의 예민함을 받아들이는 또 다른 중요한 단계는 "왜 그렇게 예민해?"는 비난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292p.) 우리가 예민함을 수용할 때, 즉 강인함 신화보다 센서티브 웨이를 선택하는 것은 사회의 모든 부분에 혁명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예민함의힘 #젠그랜만 #안드레솔로

#예민함의힘 #젠그랜만 #안드레솔로 #21세기북스 #필독단2기 #자기계발

#심리 #책스타그램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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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한국 - 랩 스타로 추앙하거나 힙찔이로 경멸하거나
김봉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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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만 읽기에는 괜스레 꺼려지는 책'을 골라, 함께 읽고 나누는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해당 모임에서 이 책은 출간 예정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모임 구성원들 중 누구도 힙합을 즐겨 듣지 않기 때문..! 딱 우리 모임 취지에 맞는 도서라 생각해서, 바로 이번 달 도서로 선정해 함께 읽었다. #하니포터 로서 누구보다 빠르게 도서를 받아볼 수 있어 더더욱 영광-✨

+) 출판학교에서 인쇄소 견학을 갔을 때, 출간 전인 이 도서를 먼저 만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운명이다.. 생각하고 더욱 즐겁게 읽었다.

사실 초반 내용을 읽어나갈 때에는 조금 당황했다. 저자의 힙합을 향한 사랑과 애정이 너무 활활 불타고 있어서, 약간 내가 그 열기에 그을리는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힙합에 대해 전혀 무지한 나로서는 그 온도가 조금 뜨겁다고 느껴졌다.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외치며 누구가를 그을리지는 않았는지.. (테일러스위프트 좋다고 윤하 좋다고 아이유 좋다고 말이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힙합의 배경지식이 부족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100% 이해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기회가 된다면 저자가 들려주는 힙합을 오마카세처럼 하나씩 들어본 뒤에, 관련 논쟁들에 대해 판단해 보고 싶다. 줏대 있게.

그럼에도 결국 차가운 사람보다는 이렇게 뜨거운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 훨씬 기쁘다. 냉소하는 사람보다는 기꺼이 마음을 뜨겁게 끓일 줄 아는 사람. 설령 넘친대도. 그 넘치는 것을 두려워 않는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한 '하강 지향' 공감에서 벗어나야 한다(146쪽)는 내용은 특히 인상 깊었다. '나도 안 할 거니까 너도 해내지 마. 올라가지 말고 이 자리에 같이 있자'가 본질인 말을 공감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는 것. 한창 그런 말이 유행이었던 때가 떠올랐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어, 나는 끝났어, 어차피 해도 안돼 등..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바꾸기 어려운 현실에 탄생한 유행어라는 점이 더욱 씁쓸하다. 자조적인 절망이 하나의 유행이라니. 그러나 이는 공감이 아니다. 위로가 될 수도 없다.

쉬운 선택을 지양하려 한다. 냉소하는 거, 포기하는 거, 비관하는 거, 깊이 사랑하지 않고 그냥 얕게 발만 걸치는 거. 앞으로는 이와 같은 하강 지향의 달콤한 유혹이 있을 때마다, 힙합을 떠올리겠다. 저자와 같이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뜨거움을 유지하면서 내 삶에도 '힙합'을 더해보겠다. 힙합을 일상적으로 듣고 어릴 때부터 봐온 앞으로의 세대의 변화가 기대 된다. 상승 지향의 세대가 되기를, 이들의 유행에 '힙합'이 있기를 바란다. '너 힙합이네'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의 밈으로 자리하길!


#책속의한줄 🔖

(80p.) 음악은 기본적으로 '삶의 사운드트랙'이고 힙합은 어떤 음악보다 다양한 감정 그릇을 가지고 있기에

(112p.) 그러나 힙합에서 중요한 건 공감보다 '영감'이다. 힙합에서 공감을 얻어 가는 건 자유지만 영감을 공감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건 오류에 가깝다. 맞다. 힙합은 영감을 나누길 원한다.

(118p.) 태도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애송이 시절에도 어떤 거물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는 용기, 지금은 이룬 것 하나 없지만 앞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되겠다는 포부와 호언장담, 호전적이고 자존감 충만한 그의 태도가 힙합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함마드 알리에 대한 내용 中)

(118p.) 힙합은 삶을 그대로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늘 삶보다 크 것을 말해온 음악이기도 하다.

(146p.) '하강 지향' 공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도 안 할 거니까 너도 해내지 마. 올라가지 말고 이 자리에 같이 있자'가 본질인 말을 공감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158p.)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더 나아지기 위한 긍정적인 자기 암시와 동기 부여로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힙합이다.

(190p.) 이제 여성 래퍼들은 억지로 센 척을 하다가 역풍을 맞지 않아도 되고 윤미래를 기술적으로 뛰어넘을 필요도 없다. 대신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문화를 음악에 투영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패션을 입으면 된다. 이제 여성 래퍼들은 자기를 유지하며 힙합을 할 수 있다. 자기를 유지하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힙합과한국 #김봉현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7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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