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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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 작가의 말 中 (단 한 사람, 최진영)


평소 너무나도 팬인 최진영 작가님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해가 지는 곳으로> 슬픔의 끝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이고, 사랑하는 이가 부재하는 세계의 적막을 기록한 <구의 증명>을 지나 이제는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독자를 반긴다. 저자의 여덟 번째 장편이다. 하니포터 7기 자격으로 가제본을 먼저 만났다. 전체 분량의 ⅓이 수록되어 있는 티저북을 읽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바로 다음 날 서점으로 달려갔다. 저자는 자신이 10여 년간 붙들고 지낸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소설로 전한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의 틈에서 피어나는 최진영식 사랑의 세계. 단숨에 빠져들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완독했다. 올해 최고의 소설을 넘어 인생 소설 등극이다.. 온 마음 다해 추천한다.

열여섯 살이 된 목화는 꿈속에서 사람을 살린다. 꿈에서 살린 사람은 현실 세계에서도 산다. 그러나 살림과 동시에 죽음을 목격해야만 한다. 목화는 수백수천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절대자가 지목한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이는 할머니 임천자와 엄마인 장미수를 거쳐 자신에게 전승된 '수명 중개'이며, 살리는 자의 숙명이다. 목화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판단을 미룬 채 우선 경험한다. 자신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 운명을 선택하기 위해.

소설을 읽으며 정말 많이 울었다. 감히 말해보자면 글의 깊이가 다르다. 정말이지 내가 상상치도 못한 문장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 문장들에 매 순간 저항 없이 마음이 울린다. 문장 사이마다 감정을 끼워두고 그 안에 갇히고 싶었다. 자꾸만 울리다가 기어코 넘쳐버리는 감정들을 전부 이야기 속에 던져 넣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싶었다. 이렇게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는 오랜만이다. 걷다가 밑동이 단단한 나무만 보아도 마음이 뭉클해질 것 같다..

나는 왜 사는가. 이 세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째서 살아야만 하는가. 여전히 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 소설 덕에 겨우 질문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254쪽) 그럼에도 삶이 무용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꺼내 읽고 싶다. 책갈피 해둔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다시 살고 싶어질 것 같다. 이 이야기에는 그런 힘이 있다. 덕분에 기꺼이 살고, 사랑하고 싶어졌다.

같은 삶이 주어졌어도 모두 다르게 산다. 세상은, 삶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상기한다. 자신의 운명과 절대자에 대해 할머니인 임천자는 기적이라 했고, 엄마인 장미수는 악마라고 했으나 목화는 '단 한 사람'이라 명명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을 사는 존재는 나라는 '단 한 사람'뿐이다. 그것은 신도 범접할 수 없는 오직 인간의 몫이다. 나는 단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책속의한줄 🔖

(10p.) 부족하다는 건 뭐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것.

(35p.)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심심할 수가 없다.

(39p.) 월화는 마음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유리잔이 사랑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랑을 전하기 위해 잔이 넘치도록 콸콸콸콸 쏟아붓는 대신 유리잔을 깨고 사랑의 상식을 없애버리는 사람. 월화의 사랑 표현은 종잡을 수 없었다. 외면과 집착, 증오와 헌신, 질투와 찬사, 무조건적인 지지와 의심이 공존했다.

(61p.)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

(64p.) 그러나 목화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숱한 가능성이 진실로 존재하는 각각의 세계를 상상했다. 왜냐하면 그와 비슷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으므로.

(77p.) 멀어지는 미수를 바라보며 복일은 생각했다. 저 사람 저러다 순식간에 가물어버리면 어쩌지. 징조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92p.) 평생 두려움을 만지고 살아 그것은 처음의 모양을 잃고 동글동글 작아졌다. 마음에 들끓던 용암은 긴 세월 조금씩 새어 나와 초라하게 식어버렸다. 산도 하늘도 흙도 신도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마치 자기와 한 몸 같았다.

(93p.) 복일에게 사랑은 심장이었다. 사랑이 멈추면 삶도 끝이었다. (...) 복일에게 미수는 바다였다. 자식들은 바다를 건너야 닿는 섬이었다. (...) 미수에게는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으로 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95p.) 천자처럼 순응하거나 미수처럼 저항하지 않고 목화는 판단을 미룬 채 우선 경험했다.

(100p.) 때로 목화는 "많이 죽었어"라는 말 외에는 꺼내지 못했다. 그럴 때 목수는 "한 명을 살렸다"라고 기록했다.

(104p.)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8p.) 목화는 엄마의 증오를 이해했다. 그 증오를 자기 몸에 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17p.) 그러니까......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 거죠. 목화는 남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말했다. 이유를 몰라도 좋은 건 좋은 거고. 목화가 말을 이었다. 왜 사는지 몰라도 계속 사는 것과 비슷하네요.

(132p.) 힘들면 세 번 정도 참아보고 그만두면 돼. 끌 사장이 덧붙였다. 세 번 참은 게 아까워서 네 번째도 참게 될 거야.

(136p.) 정원의 눈에 목화는 너무 가뿐해 보였다. 주렁주렁 짐을 이고 들고 하루하루 걸어가는 자기에 비해 목화는 마치 운동 삼아 조깅하듯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206p.)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존재만이 사람은 아니다. 그 외의 더 많은 의미가 모여 사람을 이룬다.

(207p.)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힘'이 사람의 세상에서는 중요하겠지만, 그 세상을 만들고 품은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219p.) 죽지 않는 신에게 목숨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무한한 목숨을 특정인에게만 나눠 주는 것이 어떻게 사랑의 증거가 된단 말인가.

(227p.) 장미수는 끝내 임천자와 화해할 수 없었다. 임천자는 장미수가 엄마를 계속 원망하고 미워하길 바랐다. 장미수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자신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후에야 장미수가 깨닫게 될 임천자의 사랑이었다.

(231p.) 목화는 선하면서 악한 사람을, 의롭고도 불의한 이를,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을 생각한다.

(254p.) 10여 년간 붙들고 지낸 여러 질문이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쓴 문장과 단어가 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질문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255p.) 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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