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 2호 : 물질의 삶 교차 2
신광복 외 지음 / 읻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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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분과를 가로지르는 지식의 교차로
읻다의 본격 서평 무크지 《교차》

‘이로써 책을 통해 축적된 사유가 서평을 매개로 맞부딪치는 지적 교류의 장을 지향한다.’

2021년 읻다에서 창간한 《교차》는 학술서 중심의 서평이 담긴 서평지입니다. 제가 남기는 것과 같은 얼렁뚱땅 단순 기록의 서평이 아니라,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책을 읽고 쓰는 논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학부생 막학기 때로 돌아가기 체험이 가능합니다. 🥹👍🏻 사실 서평 무크지라길래 가벼운 마음으로 재밌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대단한 오산이었죠! 덕분에 스스로의 무식을 상기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향한 존경을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비주제 서평 중, 서보경의 <페미니즘과 거대한 규모의 의학>과 권용란의 <서양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본 한국의 여성 의례>가 가장 흥미로웠어요. 해당 서평에 대한 설명은 출판사의 말을 빌리겠습니다.

서보경의 〈페미니즘과 거대한 규모의 의학〉은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관련된 월경 이상 문제를 발단으로, 여성의 질병과 고통을 다룬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언다잉》, 《질병과 함께 춤을》을 함께 읽으며 지식 체계의 어긋난 틈이 낳은 의학의 구조적 무지에 대한 해결을 촉구한다. 권용란의 〈서양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본 한국의 여성 의례〉는 1970년대 한국 여성의 삶과 무속을 다룬 로렐 켄달의 《무당, 여성, 신령들》을 통해 근대화 시기의 생활사를 살펴보고, 조선 시대 이후 여성 의례의 위치 변화를 돌아본다.

=> 코로나가 극심했던 2022년에 쓰여진 내용이라
또 그 이후에도 영화 파묘나 현 정권(..) 등의 이슈로 코리아 무속신앙에 대한 관심이 내외로 크게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2024년에는 또 어떤 관점으로 해당 도서들을 읽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다른 분들의 후기가 궁금하여 서치해보다가 @andparkinsoo 님의 게시물에서
'학계와 출판계의 시차를 줄이고, 학술서와 대중서의 낙차를 좁히는 서평지 교차'라는 설명을 읽었습니다. 어딘가에서는 그런 시차와 낙차에 대한 노력이 이루어지고있구나.. 생각하니 새삼 세상이 넓게 느껴져요. 나는 단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일에 대해 누군가는 평생을 바치고있단걸 체감할 때 갖게 되는 새로운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역시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책에 대해 나누는 시간 자체가 좋은 것 같아요. 책의 내용보다 그걸 읽은 독자의 마음이 더 궁금할 때가 많거든요. 학술지도 마찬가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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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지음, 황유원 옮김 / 읻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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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열하는 폭포의 말로 들려주는 도시 패터슨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로써 쓰여지는 활자의 유영

"저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을 알았죠. 저는 제가 그것을 저의 형식으로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완성된 형식은 아님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무형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저의 형식을 발명해야만 했어요. 만일 그것을 형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에요."

말수가 없는 편은 아니나(그냥 말 많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단 것을. 혹은 이제 하고 싶은 말조차 전부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잠기는 밤이 종종 찾아오곤 합니다. 그런 제 사정과는 달리,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십 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5권이나 써내는 사람이 있었단 사실은 참으로 질투가 나네요. 그것도 도시를 통해 얻은 발언권이라니. 관념이 아닌 사물을 통해서 말하는 새로운 시학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를 '객관주의', 혹은 '즉물주의'라고 한다네요. 출처는 읻다 저자 소개!

"그것이 바로 시인의 업무다. 내과 희사가 환자를 다루듯, 모호한 범주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있는 것에 대해 자세히 쓰며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

시의 경탄에, 생동감에, 펄떡펄떡 뛰는듯한 감각에 압도당할 때의 느낌이 참 좋아요. 단 몇 개의 단어만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단 것이 위로가 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시를 통해 다른 세계로 가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안도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아직은 내가 시를 느끼는구나,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았구나.. 하면서 말이에요. 멋지고 신비하고 아마 내가 평생 이해하지 못할 시구들을 가득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이 독자의 업무겠지요. 언젠가 해설보다 시를 더 집중해서 읽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 실험적인 도서의 내용을 본문에도 재미있게 구성해두었어요. 편집자님이 괴롭고 즐거우셨을 것 같습니다. 독자는 당연히 당연히 좋고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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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단편집
듀나 지음, 이지선 북디자이너 / 읻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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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SF를 참으로 사랑하는데요.. 태초에 상상력이 0으로 태어난 인간이라, 어떤 SF를 읽어도 감탄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쉽게 감동하는 쉬운 독자이고 그런 스스로가 퍽 좋습니다.. (무엇을 읽어도 쉽게 재밌어지거든요) 사실 한창 장르소설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오랜만에 SF를, 그것도 듀나를 읽으며 저항 없이 상기했습니다. 그래 이거였지, 나는 한국인이 쓰는 SF를 가장 좋아하지, 그것이 나의 어떠한 코어가 되어주었지.. 약 450페이지의 두꺼운 벽돌책임에도 기쁘게 들쳐메고 다니며 여기저기서 만끽했습니다.

"컴퓨터가 신문물이었고 인터넷은 아직 대중적으로 상용화되지 않았으며 한국 SF의 계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천진난만한 그 시절에, 장르소설을 갖고 놀던 듀나란 사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궁금한 독자들이라면 이 책만큼 좋은 선택지가 또 있을까? 마감일이 없어도 폭포수처럼 작품을 쏟아내던 ‘90년대 레트로 듀나’를 다시금 만날 수 있는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출판사 서평 中)

듀나의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는 심지어 저자의 미발표 데뷔작이에요. 21편의 단편이 알차게 자리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이 중에 하나쯤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실 겁니다. 그게 단편의 내용이든, 저자의 코멘터리든, 토끼든요!!

저자의 설명(또는 변명?)이 단편마다 수록되어 있는 점이 좋았어요. 요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자신의 글을 책으로 내는 이들의 결심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구나! 일 년 전 쓴 글만 봐도, 나는 너무나 내가 아니고 미치도록 꼴 보기 싫은 모양새이고 그런데.. 한순간의 조각들이 물성을 가진 채 영원히 남는다? 으악 무섭다! 그러니 그토록 큰 결심을 한 이들에게 이 정도의 아량쯤이야. 피실거리며 기분 좋게 저자의 목소리를 읽다가, 더 많은 이들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변명까지 성실히 읽겠다고 일단 혼자라도 약속할게요.
그러니 부디 다들 꽁꽁 숨겨두지 마시고 결심해 주시고 후에 변명해 주시길, 욕심을 남깁니다. (본심)

멋진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관심을 받고 싶으신가요? 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놔보세요. 저는 실제로 이 책의 정보를 묻는 무수한 이들 덕에 단숨에 성공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표지의 저 토끼가 너무나도! 너무나도 듀나이고요! 책 위아래로 깜찍한 이모지까지 있으니까요!
책을 받자마자, 이 정도는 해야 사람들이 사고 싶겠다 소장 가치 미쳤다 하고 감탄했습니다. 재미있는 도서 기획과 컨셉, 그 기획을 완벽히 구현한 표지, 내지 그리고 디테일까지! 진하게 느껴지는 애정이 더욱 즐거운 읽기를 만들어주었어요. 그러니 집에 하나씩 들여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


+) 끝으로 조금의 사심을 담습니다.
듀나의 작가 데뷔 30주년을 정말 축하드려요!
다가올 40주년, 50주년도 늘 함께 하는 독자가 되겠다고 약속드려요.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 당당할 수 있어 기쁩니다.
포레버 래빗! 포레버 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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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워커홀릭들 - 일, 사람, 돈
홍정미 외 지음 / 읻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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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을 시작하니 삶의 중심이 오직 '일'을 두고 돌아가는데요, 자연히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지더라고요. 다들이렇게말도안되게매일책상앞에서오천시간정도를보내는지도요.. 어쨌든 어떻게 일하고, 누구와 일하고, 얼마나 버느냐. 읻다의 마케터 지압님은 이 책에 대해 위 세 질문에 대한 완벽한 정답이 될 수는 없어도, 마음 한 편에 발아할 수 있는 씨앗 하나는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소개합니다. 책을 덮고 나니 제 마음엔 씨앗 열두 개 정도가 심어진 것 같아요.

특히나 프리미엄 타월 브랜드인 'TWB'의 대표, 김기범 님의 씨앗이 그중 가장 컸어요. '돈'에 대한 챕터가 인상 깊었습니다.
▶️ 하지만 부족한 시간과 떨어지는 체력을 사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돈은 필요한 것 같다. (...) 나는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고 싶다. 그건 시간과 경험을 사기 위해서다. 집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123p.)

나는 왜 돈을 벌까? 이렇게 벌어서는 절대 집도 못 살 텐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한참을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야 해요. 월세 공과금 보험 통신비 숨만 쉬어도 월급의 백만 원이 그냥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나는 매 월이니까요.
자본주의 사회에 살기로 한 이상, 돈과는 절대 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김기범 님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돈을 벌겠다고 다짐합니다. 저는 딱히 대단한 꿈도, 책임져야 할 무언가도 없기 때문에 더 착실히 시간과 경험을 사기 위해서 돈을 벌기로 했어요. 그게 또 다른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건 말건! 부족한 시간과 떨어지는 체력을 위해서 아낌없이 번 돈을 써보려고요.

냉정하게 저는 무언가를 넘치게 사랑해서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그런 사람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참 멋져 보여요. 양말을 너무 좋아해서 브랜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홍정미 대표님, 와인이 너무 좋아서 와인 수입사를 만든 필립포 대표님.. 그 외에도 무수한 이 책의 저자들처럼 말이죠. 연초에 읽기 참 좋네요. 은은한 동력이 생겼습니다. 브랜드의 매력은 결국 개인에게서 나오는구나, 싶기도 했어요. 전혀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아, 이 책에 대해 꼭 말하고 싶은 점이 있어요. 본문이 특이하답니다! '일' '사람' '돈'이 3단 가로 구성의 형태로 편집되어 있어요. 어느 부분을 먼저 읽을지, 누구의 글을 먼저 읽을지 부담 없이 선택하면 된다고 하던데.. 저는 재미없는 인간이라 그저 착실히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갔어요. 일, 사람, 돈도 순서대로. 일 챕터를 다 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람으로, 사람을 다 읽으면 다시 돈으로 돌아가며 읽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번거롭기 했는데요(..!) 그래도 재밌었어요ㅎ.ㅎ 특이한 편집, 새로운 시도로 만들어진 책은 언제나 환영! 많은 책들에 더 다양한,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시도들이 가득했으면 합니다. 제가 만드는 것 아니라고 함부로 바라보아요!



#책속의한줄🔖 (과 마음 더하기)

(107p.) 하지만 나는 '돈' 때문에 이기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할 것 같을 때가 오면 꼭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다. "돈워리, 비 해피!"

(109p.) "분주함은 우리를 몰아붙이지만, 리듬은 우리를 지속시킨다" (토트 헨리, <데일리 크리에이트브>)

(123p.) 하지만 부족한 시간과 떨어지는 체력을 사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돈은 필요한 것 같다. (...) 나는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고 싶다. 그건 시간과 경험을 사기 위해서다. 집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127p.) 매출이 떨어지는 것은 남(손님)이 변했거나, 남들(경쟁 브래드)이 잘해서가 아니라 나의 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관계를 돌이키기 위해 다른 매력 포인트를 찾거나, 현재의 매력 포인트를 더욱 어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관계가 이어지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결국 계속 이것의 반복인 것 같다.

(230p.) 많은 사람들이 가슴 설레는 일을 찾으라고 말하지만, 나는 반대로 불안함에 귀를 기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느낄 때만 내 마음이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이건 내 삶에 적용 가능하겠다- 싶었던 문장. 태생적으로 생각 많고 걱정 많은 인간은 마냥 설렘만으로 무언가를 시도하기가 참 어렵다. 시도 자체에 드는 품이 남들보다 곱절은 드니 애초에 시작을 않으려 하기도 하고. 그러니 설렘보다는 자연히 불안과 친하다. 이왕 친해진 김에 더 깊은 대화를 나눠봐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불안아 너는 어디서 왔니? 지금은 왜 또 갑자기 몸집을 부풀렸니? 하고 말이다.

(236p.) '너무 힘들다!' '그만하고 싶다!' 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지만, 일의 본질을 기억하며 군소리 없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우아한 직업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어 본다.
▶️ 멋지다. 그리고 어렵다. 이상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 괴리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 부디 유려해져 허우적댐조차 우아해지길. 지금은 기미도 안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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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 서한집 상응 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위효정 옮김 / 읻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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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집이 무엇이냐, 편지를 모아서 엮은 책을 뜻한다. 읻다의 서한집 시리즈 '상응'의 세 번째 도서인 <랭보 서한집>은 열다섯부터 스물하나, 그의 창작 시기 동안 이루어졌던 모든 서한을 담고 있다. 또한 랭보의 문학적 삶이 더 이어지지 않는 절필 이후의 편지도 몇 편이 더해져어 시인 랭보를 지나 한 명의 노동자로서 살았던 그의 삶을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다.

스무 살 초반, 깊은 지식 없이 전공생의 책임감으로(..) 뮤지컬 랭보를 보고 나서 꾸역꾸역 레포트를 작성했던 기억이 있다. 뮤지컬 넘버나 극 자체는 좋았지만, 큰 감동이나 감상을 받지는 못했었다. 그때 이 책을 먼저 읽고 갔다면 참 좋았을 텐데! 몇 년이 지나 텍스트로 읽으니 왜 사람들이 랭보에게 찬사를 보내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활자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느낌!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명확히 알고. 이에 대해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솔직함. 어쩌면 뻔뻔함? 조금도 헷갈리게 하지 않는 그의 도발적인 태도가 읽는 이를 압도한다. 베를렌, 들라에, 백지은(먼저 서평 올렸길래) 그리고 이주은까지..

랭보에 대해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가 시인으로 약 이십 년만을 살고, 남은 생에선 문학을 완전히 떼어냈다는 것이다. 유럽은 물론이고 중동,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노동자, 용병, 건설 현장 감독, 상인 등으로 일을 하며 살았다는 랭보. 그게 가능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1800년대 프랑스에서 쓰여진 글이 2023년에도 읽힐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스스로도 알았을 텐데. 나이를 먹고 다듬어진 그의 시는, 글은 또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당대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예술을 포기하고 후대에는 먹고사는 일보다 그들이 남긴 예술에 더 비싼 값을 매긴다니. 고흐나 랭보나.. 이런 예술가들의 생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문학을 하지 않던 시간들도 부디 그의 기준에 가치로웠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의 작품을 모두 태워달라 부탁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곁에는 (폴 드므니와 같이) 기어코 그것을 남겨 이렇게 몇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후대의 사람들이 보고야 말게끔 만드는 이가 꼭 있다. 이미 죽은 그 예술가들이 2023년에도 자신의 작품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랭보는 어떤 기분일까? 혹시 억울하다면 다시 깨어나서 좀 더 써주세요. 당신의 다른 글들도 너무 궁금해요.

그렇지만 랭보씨.. 제발 젖가슴 얘기는 그만해주십시오. 당신은.. 이후에 여자를 성적으로 보지도 않게 됩니다. 근데 과거에 너무 젖가슴 얘기를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가슴은 그냥.. 그냥 가슴이거든요… 가슴…

#책속의한줄🔖 (과 마음 더하기)

(57p.) 지금으로선, 제 자신을 최대한 천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러니 제 자신을 투시자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58p.)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너무 많은 밑줄을 긋지 말아주세요. 연필로도, 너무 많은 생각으로도요.
▶️ 유독 이 문장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어쩌면 랭보 그가 모든 것에 진하게 밑줄을 남기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14p.) 내 발톱이 눈에서 떨어져 있는 것만큼이나 나는 일과 멀어. 똥 처먹을 나! 똥 처먹을 나! 똥! 똥! 똥! 똥! 똥! 똥!
너희들이 내가 실제적으로 똥을 먹는 걸 보면, 그땐 더 이상 날 먹여 살리는 게 너무 비싸게 든다고 하지 못하겠지!...
▶️ 그래 아무래도 이런 내용을 후대에 남겼다고 생각하면 좀 부끄럽긴 하겠다. 하지만.. 독자인 나는 너무나도 날것의 분노와 막막함,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오히려 반갑고 공감되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멋진 미사여구를 남발한 문장보다도 지극히 원초적인 똥! 이 더 와닿는.. 이.. 인간이란...

(118p.) 용기 빌어먹고. 용기 내렴.
랭보는 '용기courage'라는 단어를 분해한 뒤 '목cou'을 어원이 같은 '경부col'로 바꾸어 'colarge'라고 쓰면서 '용기'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격분rage'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다음 단락에서는 다시 원래대로의 철자법이다.
▶️ 센스 미쳤다고 생각

(123p.) 돌아와, 돌아와, 소중한 친구, 유일한 친구, 돌아와. 네게 맹세해, 착해질게. 너한테 불퉁스럽게 굴었던 건 그저 하던 농담을 물고 늘어지느라 그랬던 것뿐이고, 난 그걸 이루 말할 수 없이 후회하고 있어. 돌아와, 다 잊혀질 거야.
▶️ 요즘의 사랑고백과도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변함없구나-

(126p.) 유일하게 진정한 말은 이거야. 돌아와,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너를 사랑해. 이 말을 귀담아듣는다면, 용기와 진정한 마음을 보여줄 테지.
아니라면, 널 딱하게 여길 거야.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네게 입맞춤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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