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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 서한집 ㅣ 상응 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위효정 옮김 / 읻다 / 2021년 4월
평점 :
서한집이 무엇이냐, 편지를 모아서 엮은 책을 뜻한다. 읻다의 서한집 시리즈 '상응'의 세 번째 도서인 <랭보 서한집>은 열다섯부터 스물하나, 그의 창작 시기 동안 이루어졌던 모든 서한을 담고 있다. 또한 랭보의 문학적 삶이 더 이어지지 않는 절필 이후의 편지도 몇 편이 더해져어 시인 랭보를 지나 한 명의 노동자로서 살았던 그의 삶을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다.
스무 살 초반, 깊은 지식 없이 전공생의 책임감으로(..) 뮤지컬 랭보를 보고 나서 꾸역꾸역 레포트를 작성했던 기억이 있다. 뮤지컬 넘버나 극 자체는 좋았지만, 큰 감동이나 감상을 받지는 못했었다. 그때 이 책을 먼저 읽고 갔다면 참 좋았을 텐데! 몇 년이 지나 텍스트로 읽으니 왜 사람들이 랭보에게 찬사를 보내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활자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느낌!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명확히 알고. 이에 대해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솔직함. 어쩌면 뻔뻔함? 조금도 헷갈리게 하지 않는 그의 도발적인 태도가 읽는 이를 압도한다. 베를렌, 들라에, 백지은(먼저 서평 올렸길래) 그리고 이주은까지..
랭보에 대해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가 시인으로 약 이십 년만을 살고, 남은 생에선 문학을 완전히 떼어냈다는 것이다. 유럽은 물론이고 중동,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노동자, 용병, 건설 현장 감독, 상인 등으로 일을 하며 살았다는 랭보. 그게 가능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1800년대 프랑스에서 쓰여진 글이 2023년에도 읽힐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스스로도 알았을 텐데. 나이를 먹고 다듬어진 그의 시는, 글은 또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당대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예술을 포기하고 후대에는 먹고사는 일보다 그들이 남긴 예술에 더 비싼 값을 매긴다니. 고흐나 랭보나.. 이런 예술가들의 생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문학을 하지 않던 시간들도 부디 그의 기준에 가치로웠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의 작품을 모두 태워달라 부탁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곁에는 (폴 드므니와 같이) 기어코 그것을 남겨 이렇게 몇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후대의 사람들이 보고야 말게끔 만드는 이가 꼭 있다. 이미 죽은 그 예술가들이 2023년에도 자신의 작품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랭보는 어떤 기분일까? 혹시 억울하다면 다시 깨어나서 좀 더 써주세요. 당신의 다른 글들도 너무 궁금해요.
그렇지만 랭보씨.. 제발 젖가슴 얘기는 그만해주십시오. 당신은.. 이후에 여자를 성적으로 보지도 않게 됩니다. 근데 과거에 너무 젖가슴 얘기를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가슴은 그냥.. 그냥 가슴이거든요… 가슴…
#책속의한줄🔖 (과 마음 더하기)
(57p.) 지금으로선, 제 자신을 최대한 천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러니 제 자신을 투시자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58p.)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너무 많은 밑줄을 긋지 말아주세요. 연필로도, 너무 많은 생각으로도요.
▶️ 유독 이 문장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어쩌면 랭보 그가 모든 것에 진하게 밑줄을 남기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14p.) 내 발톱이 눈에서 떨어져 있는 것만큼이나 나는 일과 멀어. 똥 처먹을 나! 똥 처먹을 나! 똥! 똥! 똥! 똥! 똥! 똥!
너희들이 내가 실제적으로 똥을 먹는 걸 보면, 그땐 더 이상 날 먹여 살리는 게 너무 비싸게 든다고 하지 못하겠지!...
▶️ 그래 아무래도 이런 내용을 후대에 남겼다고 생각하면 좀 부끄럽긴 하겠다. 하지만.. 독자인 나는 너무나도 날것의 분노와 막막함,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오히려 반갑고 공감되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멋진 미사여구를 남발한 문장보다도 지극히 원초적인 똥! 이 더 와닿는.. 이.. 인간이란...
(118p.) 용기 빌어먹고. 용기 내렴.
랭보는 '용기courage'라는 단어를 분해한 뒤 '목cou'을 어원이 같은 '경부col'로 바꾸어 'colarge'라고 쓰면서 '용기'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격분rage'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다음 단락에서는 다시 원래대로의 철자법이다.
▶️ 센스 미쳤다고 생각
(123p.) 돌아와, 돌아와, 소중한 친구, 유일한 친구, 돌아와. 네게 맹세해, 착해질게. 너한테 불퉁스럽게 굴었던 건 그저 하던 농담을 물고 늘어지느라 그랬던 것뿐이고, 난 그걸 이루 말할 수 없이 후회하고 있어. 돌아와, 다 잊혀질 거야.
▶️ 요즘의 사랑고백과도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변함없구나-
(126p.) 유일하게 진정한 말은 이거야. 돌아와,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너를 사랑해. 이 말을 귀담아듣는다면, 용기와 진정한 마음을 보여줄 테지.
아니라면, 널 딱하게 여길 거야.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네게 입맞춤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