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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노트
우타노 쇼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언젠가부터 이 사회의 주요 화두 중 하나가 '학교폭력' '왕따' 그리고 그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이 되었다. 내가 어릴 때에도 분명, 왕따 비슷한 경험 속에 처해진 피해자들이 있었고,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왕따유발자"에 대한 폭넓게 형성된 교실 내에서의 암묵적인 따돌림은 있었지만, 오늘날 언론에 보도되는 것과 같은 조직적이거나 혹은 섬뜩한 수준의 가해자들은 없었던 것 같다. 간혹 바다 건너 일본에서 일어난 "이지메" 사건으로 재일교포 2세 등이 자살로 마감했을 경우에 간헐적으로 신문에 보도되는 내용을 접하고 혀를 끌끌 찬 기억도 있고, 이런 내용이 보도될수록 이 나라에서도 모방심리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던 기억은 있다. 그냥 참고 넘어가기에는 어려운 수준의 괴롭힘으로 피해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언론들이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이지메라는 단어를 몇번 썼다가, 좋지도 않은 외래어, 그것도 일본어를 쓰기에 힘겨웠나 어느 순간에 "왕따"라는 단어가 신문지상에 공공연하게 올라오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내심 '이런.. 결국은'하고 생각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생각들은 마치 공룡시대나 구석기시절 얘기인 것처럼 먼 옛날의 일로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회에 "왕따"와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시시때때로 나오게 되었다. 내 아이가 그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보장도, 피해자가 되지 말라는 자신감도 학부모 입장에서는 이제 어느 누구도 감히 갖기 어려운 시절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책은 그런 따돌림/학교폭력의 피해자가, 피폐한 학교생활의 고단함으로 차라리 죽여달라고 절규하며 적은 일기장 내용이다. 다른 교과목은 다 못 해도 국어만큼은 잘 하고 장래희망이 작가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중학생 남자아이. 왜소한 체격에 쥐를 연상시키는 불쾌한 면상, 가난한 가정에서 자기 삶에 분주한 부모 밑에 달리 주목도 못 받아봤고 달리 내세울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같은 반의 여자아이를 훔쳐보며 사모하는 정도는 되는, 어디엔가 있을 법한 10대 청소년. 알고 지내고 싶지는 않지만 돌아보면 한두명 정도는 한 반에 존재했을 법한 그 누구. "나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좀 더 우월하다 느끼는 그 누군가는 그 아이를 콕 찝어서 괴롭히고 그로 인해 즐거움을 찾고, 또 그 모습을 우연히 보더라도 "나는"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그 누구. 그 "누구"가 외치는 학교폭력에 대한 절규의 글들이라고 할까.
소설이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이고 소설 내에서도 "허구"라고 하는 내용들이긴 하나, 왕따의 묘사내용은 솔직히.. 읽어나가면서도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이런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면 누구라 한들 죽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지는 않을까.. 가해자들이라 이름불려진 아이들의 사고와 죽음.. 그에 따른 공권력의 애매한 개입.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평소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책장을 덮을 때의 은근한 불쾌감은 더 오래 끈적하게 남는다. 내 스스로도 이분적인 사고방식이라 생각되면서도,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단지 그 아이가 나보다 약하단 이유로 괴롭힐 수가 있을까 하는, 현실에 빗대어 느끼는 공분과, 이런 녀석은 당해도 싸다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분노라고나 할까.
요즘 소설은 그다지 읽고 있지 않지만, 가끔 일본소설을 읽다보면 그 글의 가벼움에 질리기 일쑤였는데 이 소설은 꼭 가볍다고만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굳이 감상을 짧게나마 적자면, 왕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할 수도 있다는 놀라움과(솔직히 가정환경이나 외모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보편적(슬프지만 말이다) 사실에 기초하여 나름 반전에 반전을 갖는 줄거리로 탄탄한 소설을 써낸 작가에 대한 박수라고나 할까.. 여하튼 읽고나서 "뭐냐 이건" 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