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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때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전집을 하나씩 사서 모으는 취미를 가진 적이 있었다. 한 권씩 나올 때마다 60여 권을 사모으면서 그 중 몇 권은 허를 찌르는 반전('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라든가), 또는 번역자의 절묘하면서도 귀여운 문체에('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에서 나온 "고시랑 고시랑거렸다"-아마 '구시렁 구시렁'의 귀여운 표현이었을 것이다, 사전에도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티 여사의 매력에 쏙 빠져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떨 때는 포와로나 미스 마플과 함께 진중하게 사람의 심리를 쫓아가는가 하면, 또 어떨 때는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하는 로맨틱한 주인공들도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도 즐겁게 기억하는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처럼). 그런가 하면 크리스티 여사의 창조물들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톰과 페니(?) 커플과 같은 매력적인 부부탐정(?)도 있었고, 여하튼 이런 매력적인 인물들은 무궁무진하게 끌어내는 그녀의 매력은 아무리 책의 권수가 많아져도 줄어들지가 않았다. 그래서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크리스티 전집을 미처 다 사지 못 하고 잊어버리고 있던 차에 드디어 마지막 권이 나온다는 기사를 읽고 혼자 쓸쓸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그렇게 열심히 사모으고 아끼던 책들도 지금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새삼 애정을 갖고 읽었던 책들의 표지그림들은 아직도 기억난다, 정말 출판사가 애정을 갖고 만들지 않으면 그렇게 성의껏 나올 수 없었던 전집이라 생각되기에 새삼 당시 해문출판사의 출판진에 감사하고 싶다.
- 내 개인 취향이긴 하겠지만, 어렸을 적 그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를 통해 나온 '갈색옷을 입은 사나이'를 사봤는데, 책의 겉표지도 속지 느낌도 그리고 번역의 감칠맛도 과거 해문출판사 전집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렇게 애정어린 마음으로 접한 작가이지만, 그녀가 추리소설 이외의 책을 썼다는 것은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물론 실생활에서 남편인 크리스티 대령의 외도사실을 알고 그 충격으로 잠시 집을 나간 뒤 단기 기억상실에 걸렸었다는 등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어렴풋이 읽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저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그녀의 삶에 어떤 무게를 더했을 것이라 상상하기에는, 크리스티의 작품을 한참 읽었던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었고 그녀의 작품들은 항상 유쾌하고 즐거웠었다.
이 책은 사놓고 한동안 책장에 놔둔지 좀 되는 책이었다. 아이가 하원하기 전까지 짜투리 시간 동안 가볍게 읽을거리가 뭐 없을까 두리번대다가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하염없이 빠져들어가게 한 책이다. 작가의 필력도 필력이겠지만, 그간 내가 알아왔던 어딘지 모르게 재기발랄하면서 기발한 작가의 작품들과는 다른, 뭔가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정작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빛을 향해 걸어나가는 느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진실을 향해 내면의 여행을 떠나고 있는 한 중년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실감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책 내용 상 배경은 단순하다. 기차의 연착으로 본의 아니게 낯선 곳에서 약 일주일을 보내게 된 한 영국의 중산층 부인. 그녀가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읽을 것도, 관심을 가질 것도 없는 곳에 발이 묶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모습과 그를 통해 주변을 되돌아보며 점점 알아가는 본인의 실체에 대해서 너무나도 담담히 그려나가고 있다. 내가 만일 두세살만 더 어렸을 때 이 작품을 접했더라면 지금처럼 머리 속에 북이 울리는 느낌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접해서인가... 주인공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자신의 허상을 파악해나가면서 스스로 겁에 질리는 모습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어쩌면 나도 지금, 삶에 너무 쫓기는 나머지 내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믿고 싶은 만큼 믿고 보고싶은대로 내 자신을 포장하며 적당히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포장지를 낱낱이 벗겨내고 뒤집어보면, 이미 내 실체를 파악한 내게 가까운 누군가는 내 뒤에서 때로는 나를 동정하고 때로는 나를 비웃으며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자신의 허상이 벗겨지고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 크나큰 괴리감 때문에 주인공과 함께 나도 무서웠다.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하지만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빈 껍데기일 뿐 아무 것도 실제로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엄청난 상실감, 두려움, 충격.. 그리고 그것을 덮기 위해 결국은 自己否認으로 되돌아가는 주인공의 족적을 따라가면서, 이 작품을 써내려갈 때의 작가의 심리상태가 느껴져서 더 가슴 아팠다.
실생활에서 남편의 외도와 자식의 일방적인 행동 등으로 상처를 받으면서, 사회적으로는 성공하고 왕실에까지 인정받은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얼마나 대내외적으로 큰 괴리감을 느꼈을까. 그녀는 그 모든 상처와 치부가 세상에 신문을 통해 드러나며 차라리 곪은 부분이 터져버렸지만, 이 책의 주인공처럼 가릴 수만 있었다면 그냥 모르는 척, 그렇게 평생 살다 죽기로 작정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길게 보면 누가 정말 행복한 상황이었을까, 작가의 실제 삶과 작품 속의 주인공의 결말과...
어찌보면 이 책의 섬세한 필치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의 아니게 현실에 안주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포장된 모습으로 자기 자신조차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중년여성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 너무나 와닿는 내용이다, 4~50대에 자신의 허상을 미리 깨닫고 주저앉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보려 버둥댈 시간이 있는 것과 6~70대에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것, 또는 죽을 때까지 아예 모르고 그렇게 안개 속에서 80대까지 안주하다가 주변 사람들의 상처에 상관없이 홀로 편히 세상을 떠나가는 것.. 어떤 인생이 정말 평안하고 좋은 삶일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이 책은 짧은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그 여운은 정말 길게 남는다. 그리고 20여 년간 잊고 있었던, 작가에 대한 애정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그녀는 단순히 영특한 추리작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통찰할 줄 알았던 뛰어난 작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