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당시의 나라 - 중국 땅 12,500Km를 누빈 대장정, '당시'라는 보물을 찾아 떠나다
김준연 지음 / 궁리 / 2014년 11월
평점 :
중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어렸을 때 정말 빼곡하게 작은 활자로 가득차서 6권에 나눠 출간되어있었던 삼국지연의를 너덜너덜하게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던 나에게, 오빠 방에서 굴러다니는 영웅문 책은 겉표지부터 뭔지 매혹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 분명 장검을 짚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있던 "미남"청년의 미소 띈 얼굴이었던 듯. 여하튼 그렇게 집어든 영웅문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며 거기에 나오는 갖가지 인물들이 정사의 실존인물들이란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중국역사도 탐닉하게 되었다. 김용이나 고룡의 작품집 대부분은 명청을 배경으로 하나 호기로운 군웅할거를 그리기에는 역시 춘추전국시대나 한나라 때가 제일이었던 것 같다.
사기, 십팔사략, 열국지 등의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활자들이 책장에서 일어나서 마치 트랜스포머가 변신하는 것처럼 철컥철컥 서로 붙으며 전장 한복판에서 말을 달리는 군웅들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들이 달리는 말발굽 밑에서 먼지가 일어나고 머리 위로 높이 장검을 휘두르며, 하늘을 가리고 날아드는 화살들 밑에서 군사들이 장창을 들고 서로 사투를 벌이며 일으키는 함성들이 들려오는 착각이 들었었다. 이러다보니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던 학과는 사실은 동양사학과였었는데 어쩌다보니 상대적으로 미개하고 비천하다 생각한 서양문물 관련 학과를 들어가게 되어서 참 서글펐던 기억도 있다. 그러면서 중도관을 4년 내내 드나들면서 결국 전공과목과는 상관없는 동양사학과 쪽 책들을 열심히 빌려서 읽었던 추억도.. 여하튼 취향이 주로 날아다니고 쏘고 싸우고 무너트리고 묻어버리고 (조나라의 40만대군을 한 번에 생매장했다는 진의 백기 장군이라든가 삼국지 시대의 조조 10만대군 생매장 등등) 인구도 많고 땅도 넓은 중국답게 스케일 크게 놀았던 시절에 열광하다보니, 의외로 문약한 느낌의 당송 시대는 나한테는 그다지 매력도 없고 볼 품도 없는 세상이었나 보다. 물론 당송 시대에 크게 발전하고 발현한 문물과 온갖 고미술품 등은 언제고 한 번은 박물관에서 꼭 접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갖고 있지만.
그러기에 신문에서 우연히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읽기 시작할 때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웬걸.. 당시를 쫓아서 여행을 간다는데 그 곳곳이 무협지를 통해 또 역사서를 통해 접해봤던 이름만으로 그리운 장소들이 곳곳이란다. 페이지수는 두껍고 그만큼 내용도 알찰 테니 가격도 그에 상응하게 비싸고.. 고민하다가 주문해서 받아든 것이 아이의 유치원 방학하기 딱 일주일 전이었다. 주문한 책들 중 뭐부터 읽을까 고민하다가 가벼운 소설류들을 먼저 읽은 뒤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내려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니 들어찬 시들과 사진들 틈에서 풍류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방학을 맞이해서 여행을 가야하는데 이 책을 가져갈까 하다가 너무 두꺼우니 가방 무거울까 두려워 내려놓고서 떠난 일주일 내내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눈 앞에 어른거리는 책 내용으로, 고작 책 무게 때문에 놓고 온 내 자신을 못내 한심해 할 정도였다. 책의 페이지 수도 페이지 수지만 감칠나게 풀이하며 들어서있는 천년 묵은 시인들의 감상은 결코 페이지를 급히 넘길 수 없게 해서 결국 다 읽는데 이래저래 일주일은 넘게 걸렸나 보다. 당 시대의 명시들이 서려있는 장소를 찾아 북으로 남으로 온갖 명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저자의 뒤를 쫓아서 나도 한 번씩 들어본 장소에서 어렸을 때 읽었던 무협지들의 주인공들과 역사서의 각종 군웅들이 살아나오는 느낌으로 설레이며 함께 헐떡거리며 쫓아다녔다. 정말 읽으면서 "나도 가봤으면.."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입담, 요소요소 깔끔하게 들어가있는 사진들은 책의 두께를 잊게 해주는 덤이었고.
중국은 이제 한자도 간자체를 사용해서 그나마 떠듬거리며 읽는 한자도 소용이 없고 중국말은 하나도 모르니 나로서는 이래저래 개인여행을 나설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단체여행으로 가자니 중국여행은 아직도 주로 "노세 노세 쌀 때 대충 빨리 싸게 싸게 노세~" 분위기라 역시 내 취향도 아니고. 저자와 같은 중국 역사나 문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들이 이벤트성이라도 좋으니 한 번씩 여행상품을 기획해서 따라가 보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유럽이나 중동 쪽은 그렇게 관련학계 학자들이나 교수님들이 인솔하는 여행들이 가끔 한 번씩 있다고 들었는데, 하긴 중국은 여행 인프라가 아직 많이 정비가 필요한 상태인지라 언제쯤 그런 여행상품이 나올지도 모르겠고, 나온다고 해도 그 광활한 나라에서 어느 쪽 끝을 봐야할지도 모르긴 하겠다. 그래도 저자의 뒤를 쫓아다니며 따라다닌 여행길 중에 만난 장강의 위엄은, 언제고 거기서 배를 타고 직접 보고 싶단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 책을 통해 나로서는 가장 찰지게 와닿았던 백거이의 시들 중 장강의 구당협을 노래한 시는 시공을 뛰어넘어 내 눈 앞에까지 그림을 펼쳐준다.
"구당협은 천하의 험한 곳이라
밤에 거슬로 올라가기란 진실로 어렵도다
(중략..)
맞바람에 물결 이는 것에 놀라는데
바를 당기며 어둠 속에 배가 온다
걱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소?
염여퇴보다도 높다오"
맛깔스러운 끝마무리.. 구비구비 장쾌하게 부딪히며 넘어가는 바다같은 강물 위에서 일엽편주에 몸을 맡기고 한밤중에 둥둥 떠밀리려 가자니 걱정이 염여퇴라 하는 거대한 바위보다도 높단다. 장강에서 암초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염여퇴는 결국 중국정부의 폭파로 1950년대에 비장하게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니, 장강에서 배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후세인들 입장에서는 이를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아쉽다고 해야하나.
저자의 기행을 쫓아가다보면 억울하게 젊은 나이에 죽어간 한나라 초기의 여태후의 아들들과 손녀 얘기도 나오고 진시황, 유비와 제갈량, 관우, 왕소군, 양귀비 등 시대를 초월하고 곳곳에서 과거의 인물들이 걸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책 내용 중에는 내가 막연히 환상을 품고 있었던 동악과 동정호 풍광도 나온다. 하지만 예전에 어디선가 무협지에서 읽었을 때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하고 크게 놀랐던 그 곳은 어디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호수 안에 섬이 있고 그 섬 안에 또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안에 또 섬이 있고 다시 그 안에 호수가 있고.. 이렇게 9겹을 싸고 들어가는 곳"이란 묘사였던 것 같은데.. 황산과 더불어 언제고 중국을 갈 날이 오면 꼭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인데, 이제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 풍광 자체가 허구일 수도 있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