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프렌즈 1 - 노희경 대본집 노희경 드라마 대본집 7
노희경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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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낡음은 분명 다른데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낡음이란 의미로 늙음을 혼동해서 쓰고 있다, 그 편견을 깨주고 싶었다˝고 한 노희경 작가의 탁월한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 하고 봤습니다. 그런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슬픔과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났단 기쁨으로 공존하는.. 소장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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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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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한 회가 끝날 때마다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성미에 안 맞아서 옴니버스 형식이나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된 드라마가 아니면 거의 안 본다.  그러다보니 21세기 들어서서 항간에 세기(?)의 히트작이라 일컬어진 드라마들 중 본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가령 '별에서 온 그대', '궁', '기황후', '나인' 등등 특히 대장금처럼 호흡이 긴 작품은 더더욱..)  그래서 이번에 시니어 어벤져스라며 대대적 선전을 했던 드라마도 주변 친구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방영 중에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재방송하는 것을 한 편 보게 되고 그대로 꽂혀서 TV다시보기로 새벽을 하얗게 지새워가며 그냥 쭉 내달리게 되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울고 웃고..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떤 것인지를 이번에 소름끼치게 깨달았다.  각 배우들은 표정 하나 눈짓,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그 역할에 빙의되어 그냥 그 "캐릭터" 자체로 변해서 내게 화면 속에서 걸어나와 말을 걸어왔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브라운관 밖에서 훔쳐보며(시청자의 역할을 결국 그런 것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생각, 의견 따위는 떠올릴 순간도 없이 그냥 그렇게 그 안으로 같이 녹아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몰랐을 감정들, 느낌들, 관계들을 같이 곱씹고 느끼고 아파하고 웃음지으며 함께 그 순간들을 살았다.  이런 국보급 연기자들이 기라성같이 한 시대에 늘어서서 함께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한 시간들이었는지..  정말 이런 작품이야말로 수출하면(가령 저런 잔잔한 호흡의 작품들이 인정받는 일본이나, 또는 그 안에 카메오로 나온 몇몇 미남배우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중국 등에) 엄청난 국위선양일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DVD로 나오면 바로 사서 영원히 소장하리라 결심을 굳혔다.(부디 나오기를..)  

 

이런 이야기를 잡다하게 늘여놓는 이유는..  밤에는 그 드라마를 달렸다면 낮에는 이 책을 달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수영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읽을거리로 얼른 들고 나간 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아이의 수영모습은 한 번도 안 쳐다보고 혼자서 미소짓고 때로는 혼자서 눈물 지으며 한시간 내내 고개를 푹 파뭏고 그대로 독파해버리게 되었다. 예전같았으면 몰랐을 감정을 나이가 들었기에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경험, 더 깊이 와닿는 느낌을 하루 사이에 활자물과 영상물로 다 접해버려서인가,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서로 연결되는 감정에 마음속 깊이 touching되는 느낌이었다.    

 

 

따지고보면 나이가 어려서 접했을 때는 아직 그 글의 의미나 작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 했던 책들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문장 하나하나가 아리게 박혀오는 글들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별", 생 텍쥐뻬리의 "어린왕자"와 "야간비행",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등 학교 국어책에서 접해봤던 글들, 그리고 이 "빨강머리 앤" 같은 글 말이다.  정말 짧은 문장들로 이뤄져있고 서정적 표현에 둘러싸여있는 글들이다보니 어린 나이에 접했을 때는 그 문장들 속에 감춰져있는 깊은 감정과 철학적이기까지 한 삶에 대한 고찰을 전혀 알아듣지 못 했었더랬다.  소위 말하는 고전급 장편들이나 좀 읽어야 그 정도 수준의 깊이있는 내용을 알 수 있을까 하는 허황된 마음에 두꺼운 장편들을 끼고 읽느라 저 산문형 단편들을 휙휙 던져버리기 일쑤였으니까.  특히 빨강머리 앤의 경우는 만화로 먼저 접했었는데, 내가 참 싫어했던 "캔디" 스타일의 작풍으로 표현된 그림체에 더 우습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대기실에 앉아서 읽으며 앤의 그 다정한 말들, 그 현명한 말들, 그 따뜻한 말들,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무한긍정적이면서도 위로해주는 말들은 결코 그렇게 우스운 것들이 아니었다.  아니, 작가만이 아니라 작가의 글을 통해 접하는 나까지도 같이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다이애나와의 우정을 놓고 그 소중함에 감사하며 상대에게 표현하는 앤의 모습은, 시니어벤져스에서 보여졌던 우정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지나친 애정으로 가끔은 상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도 줬지만 그 아픔을 통해 한 뼘씩 성장해가는 모습들 속에서, 내 지나온 삶의 인연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현실 속의 내 인연들은 그렇게해서 같이 성장해간 관계도 있고 또는 그렇게 해서 영영 끈을 놔버린 인연들도 있다.  함께 했던 시간들과 추억들을 돌이켜보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지만..  또 그렇게 놓아보내진 손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며 그리움의 색이 바래지고 그 흐려져가는 실루엣들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게 되는 것을 보면 아마 그 인연은 거기까지였나보다 하는 것을 나름 수긍하는, 또 다른 의미의 깨달음의 인연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정이란 이름으로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통해 느끼고 배웠던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을 통해 조금씩 변해갔던 내 모습 등, 그들을 어떻게 다 잊을 수 있을까. 

 

예전에는 위에 말한 책들을 읽을 때 별다른 감흥이 없고 오히려 졸리기까지 했었던 이유는 아마 내 살아온 날이 너무 日淺하여, 책에서 표현한 감정들이 내 생전 느껴보지 못 한 생각들이고 가져보지 못 한 인연들이었기에 이해를 못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작은 오해로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잃어보기도 하고 소원해져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나이를 뛰어넘어 마음을 나누는 경험을 차곡차곡 내 몸 안에 쌓아가다보니, 짧은 문장들 안에 함축된 울림들이 사실은 얼마나 큰 것이었나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또 다른 느낌으로 또 다른 생각으로 다가오는 그들, 웬만한 철학서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얘기해주고 가르쳐주고 보여주는 그들, 전에는 정말 이해하지 못 했었던 그들의 목록 안에 앤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잔잔하게 미소와 함께 때로는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위로로 다가와주는 앤과 그 만화의 스틸컷들.  여자아이를 키워본 적 없어서 항상 표현함에 서툴고 갖고 있는 애정만큼 다 드러내지 못 해서 안타까운 매튜 아저씨는 앤에게 퍼프소매의 원피스를 사주며 이렇게 말한다, "네 낭만을 전부 포기하지는 말아라, 앤.  낭만은 좋은 거란다.  너무 많이는 말고, 앤. 조금은 간직해둬."

 

조금은 간직해둬..  시니어벤져스가 나온 드라마에서 오랜 시간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딸을 위해 뒤에서 화를 내며 주저앉는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그 家長은 나중에 다른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그 시대 남자들이 다 그랬듯이 자식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고.  그저 자식을 그런 경험에 내몰리게 한 자신의 가난이 더 미웠을 뿐이라고.  그 아버지도 사실은 딸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네 자신을 자책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네 마음을 네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둬라고 말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어떻게 말해야할지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딸을 위로해주고 붙들어주고 일으켜세워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뚝뚝함이, 그리고 소통부재가 가장의 권위라 믿었던 그 시절, 가해자보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 딸에게 뒤늦게나마 그렇게 사과를 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매튜아저씨가 떠올랐더랬다.  설사 표현력의 부재로 또는 시대적 환경의 차이로 비록 말로는 다 표현 못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었을 말, (남들과 다르다고 해도 그런 네 모습을 그대로 사랑하며) "조금은 간직해둬"라는 말.  그리고 어느 자녀가 자기 부모로부터 그런 격려와 지지를 원하지 않을까 싶은..  작가를 통해 다시 돌아보게 된 앤은 정말 나한테 참 많은 얘기들을 들려줬었다.  그래서 아이가 열심히 수영교습을 받는 동안 학부모대기실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작가가 전해주는 앤의 말들을 들으며 간혹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가리느라 좀 고생했단 것은 안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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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 존 가트맨.최성애 박사의
존 가트맨.최성애.조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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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아이를 앞에 놓고서 생활할 때는 실천하지 못 하는 행동들이나 또는 미처 생각나지 않는 말들이 있다.  아이가 가졌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자세"가 있다는 걸 보고 배워야할 role model로서의 부모가 되어 부족한 품성이라면 많은 경우, 자제심, 인내력, 배려, 경청하고 공감하는 자세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육아서나 인생서적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이 논의한다.  남(자식)을 대하는 책(육아서)에서는 저 부분을 많이 강조한다면 나를 대하는 책(자기계발서)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한다.  그런데 육아를 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또 전후로 따라올 수 있음을 어제 알았다.

 

 

어제 꼬마 친구네 놀이터파티에 초대되어 찾아갔다가, 아들 잘못으로 호스트 친구가 엄청 울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사과하고 일찍 물러나왔는데 쭈볏대며 사과한 꼬마와 달리 그 친구는 우리가 떠나는 순간까지 마음이 안 풀렸었다. 

 

지켜본 나로선 그 친구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으나 아들로선 많이 민망했었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과해도 안 받아줄 것을 왜 하게했냐며 날 상대로 원망을.. 그래서 "00아, 넌 사과한 걸로 끝난다해도 상대는 사과받은 즉시, 그래 알았어 이젠 괜찮아. 하지 못 할 때도 있는거야.  너는 일부러 한 행동이 아니라 해도 결과적으로 상대를 그만큼 아프게 한 것이라면 그 아이 입장에서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들었다고 바로 분이 풀릴 순 없잖아" 하니 그럼 자긴 어떻게 해야하냐고..  용서받을 때까지 기다리는거라고, 상대방이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넌 일단 잘못한 거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 다음엔 원망말고 기다려야한다고.  그렇게 얘기해줬는데, 아이한테 말하며 그러는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아왔나 갑자기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였고 그 일에 대하여 사과했을 때 상대방이 즉각적인 용서반응을 안 보인다면, '사과했는데도 왜 저래?'하며 오히려 상대방이 속 좁다(?)고 일방적으로 단정짓고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며 그대로 돌아서지는 않았나 싶은..  정말, 난 이 아이에게 모범이 될 만 했을까 갑자기 내 자신을 여러가지로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언행으로 부아를 돋궈놓고서는 "아 저런, 몰랐어. 미안!"하는 한 마디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가버리는 상대방을 보고 더 화나지 않을까 싶으니, 어쩌면 미안해하고 사과하는 행동의 앞뒤로는 (상대의 감정에 대한) 공감-(내 언행의 잘못에 대한) 사과-(상대가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는데 있어서 배출하는 것에 대한) 배려-(그 감정이 씻겨내려갈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의 연쇄작용이 필요한 것을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 역시 제대로 작동시켜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가 성숙한다는 옛 말, 그른 것이 하나도 없나 보다.  아이를 향해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나?'싶을 때도 있고, 이미 하고난 뒤 돌아서서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후회할 때도 많지만, 또 아이가 있는 덕분에 그 아이를 통해 제3자 입장에서 내 행동을 돌아보는 기회도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고보면 내 아이를 생각해서 읽은 육아서에 나온 글들은 내 아이만을 상대로 한 코칭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가며 타인에 대해 전반적으로 나의 부족한 면을 깨우치고 채워주는 내용들이 더 많았던 듯 싶다.  운전하며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가며, 귀가 후에는 그간 무심코 읽고 지나갔던 책들을 그 목차로 짚어보며 내 행동양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평범한 하루 일과 중에서 아이와 함께 한 것만으로 나의 부족한 면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 감사한 하루이기도 했다. 

 

이렇게 작은 깨달음과 감사들이 쌓여가면서 매일 조금씩 아이와 함께 성장해간다.  그저 한 가지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친구 말마따나 "철 들자마자 노망난다"고 너무 늦게 되지만은 않기를.

 

(여하튼 그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책들이 분명 있다.  목차만 되짚어 읽어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들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비좁은 책장 속에 꾸역꾸역 쌓아놓더라도 소장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새삼 느꼈다.)

육아, 아이는 부모의 스승, 대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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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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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친정에 놀러갔다가 한 번 읽어보라고 부모님으로부터 우연히 받은 책. 아이에게 혼자 놀고 있으라고 장난감을 찾아준 뒤 더운 김에 씻고 편히 누워서 뒤적이다가 그만 끝까지 읽게 된 책이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주변에 내세울 만한 인지도가 부족한 주인공은 공부 하나로 승부를 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거기서 누가 봐도 인기남일 친구를 만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親友"란 것을 가져본 기쁨을 누려본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곧잘 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까지 좋은 그와 향 좋은 커피를 거의 매일이다시피 함께 자취방에서 만나 음미하며 둘은 그냥 조용히 시간을 같이 보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보고 느껴본 우정의 기쁨, 그 소중함.  하지만 그 행복은, 잘 나가는 학우들이 모여 만든 세미나에 함께 소속한 두 사람이 그 학우들 중 한 명의 가족이 소유한 별장에 초대받으며 결국 그 친우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끝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왕따나 은따의 이야기도, 사회부적응자에 대한 부정적이고 음울한 현실 이야기도 아니다.  그 잘나가는 학우들도 알고보면 다들 꼬이거나 모나지 않은 성격의 따뜻한 친구들일 뿐이고 졸업 후에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냥 건실한 청년들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창시절의 암흑사로 깊이 묻어둔 그 건에 대하여 누군가가 각 청년들의 직장으로 또는 이웃으로 "xxx는 살인자다"라는 투서를 하면서 시작된다.

 

 

실제로 살인을 했거나 도모한 경우도 아니었고, 사실 그 사고사에 대해서는 법적책임보다는 그냥 도의적 책임 외에는 없는 그들이지만 마음 속 깊이 죄책감을 품고 지냈던 그들은 모두 충격을 받고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날" 밤의 일을 되짚어보게 된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죄책감에 더하여 그리움까지 품고 살아가고 있었던 주인공은 그렇게 모여 주고받는 대화 중에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의 다른 모습들, 또는 전해듣지 못 했던 모임 등을 듣게 되며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내가 친했다고 생각했던 우리 관계가 정말 그에게도 친밀한 관계 그 자체였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수많은 조직 중에서도 인간관계가 가장 끈적이고 친밀하고 밑바닥까지 오픈할 수 있기에 더 큰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은 학교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서로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며 그 이후로 흐른 물리적 시간에 상관없이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그대로 그 때 그 나이로 돌아가서 툭툭 치며 농담을 주고받는 희안한 힘을 가진 청춘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 지나가버린 내 시간을 공유하였기에 내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편하고 다른 누군가와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내 마음 속에 그리고 내 머리 속에 차지하고 그렇게 서로 엮이고 또 서로의 기억 속에 집어넣어 추억이란 이름으로 각자 살아가는 동안 시시때때로 열어보며 미소로 때로는 쓴웃음으로 되살아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학교생활이라고나 할까.  사람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지금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을 만났던 그 나이대의 정신연령에 맞게 얘기를 나눈 수준으로 나도 모르게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초,중학교 때 친구들보다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친구들이 이 나이에 만나면 오히려 더 편하고 뒤로 갈수록 더 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래도 사고능력의 확장으로 대화의 화제도 풍부해지고 깊이도 더해진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본 가락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평생의 지기를 만났다는 주인공의 사연도 이해가 되었고, 그렇게 만난 친구였기에 나는 내 바닥을 보여주면서까지 가깝다고 생각한 것 만큼 그에겐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을까도 이해가 되었다.  그 상대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내 청춘의 유의미한 부분이 사실은 무의미한 시간이었다는, 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부정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될 테니까.  그러다보니, 사실은 자기가 일찍 떠나간 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 사실을 깨닫고 그 친구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알아보겠다고 나선 주인공의 여정에 같이 몰입해들어가게 되었다.  주인공의 모습도 집착이라기보다는 뒤늦은 사죄라고 할까, 아니면 이제 그 아팠던 청춘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나왔기에 오히려 담담히 돌아보는 모습 때문이라고 할까, 결코 질척거리거리는 신파조나 또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값싼 모습이 아니었기에 더 현실적으로 함께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읽어나가며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볼 기회도 가져봤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親友"라고 여겨지고 있기는 할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가 생각하는 "누군가"와 동일인물이기는 할까 등등.

 

 

아이를 키우며 또 바라게 되는 것은 살아가며 그런 친구들을 평생 한 두명쯤은 꼭 만나기를, 그리고 놓치지 않고 그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하는 점이다.  그런 친구들만 가질 수 있다면 외동이라도 놓고가는 부모 입장에서는 큰 걱정없이 세상을 떠나는 날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집안의 큰일에는 형제자매 만한 관계가 없겠지만 남편의 친구들이나 내 대학동기들을 보면 남자애들의 우정이란 서로 다른 부모 밑에 태어났다고 해서 큰 일을 당한 친구에게 "내 부모는 아니니까"하며 외면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되니 그 부분도 역시 마음이 놓이게 된다.  어쨌든 우리 부부가 세상을 뜬 뒤에 홀로 이 각박한 세상을 헤쳐나가야하는 녀석이 결코 외롭지는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믿음과 평안함은 아직은 어디에 있는 누군지도 모르는 하지만 장래 내 아이와 서로에게 좋은 친구들이 되어줄 그 녀석들 덕분이란 것, 그래서 그 누군지도 모를 '꼬마들'에게(적어도 아직은. 아마도?) 감사함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우리집 녀석을 볼 때마다 흐뭇함으로 그 성장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진정한 우정이란 그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에도 기쁨이 되어주는 소중한 관계일 것이다.  마치 주인공이 외아들을 사고사로 잃고 쓸쓸히 가는 시간들을 견뎌내고 있는 노부부를 찾아갔을 때, 이미 떠나버린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게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흐뭇해했던 부모의 마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은연 중에 여러가지 입장에서 감정이입이 된 것일까..  주인공을 따라서 함께 먼저 세상을 뜬 친구의 족적을 따라가며 나도 모르게 바랐었다, 그 친구에게도 주인공과의 그 때의 그 시간이 정말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었기를.  함께 한 그 순간들이 너무나 귀했기에 다른 무엇과 바꾸고 싶지 않은 청춘의 한 자락으로 몸에 각인되고 마음에 기록되어 혹 살아있었다면 그 생을 통해 내내 기억되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었기를.  다행히도 끝에 가서는 독자인 나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의 주인공도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생각한 그 친구와의 "우리"모습은 그 친구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우리"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오랜만에 진지하게 읽고 또 그 온기가 오래 남는 소설이었다.

 

 

 

 

사족: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어쩌면 이제는 故人이 된 친구의 사고사 원인에 대해 그 동안 은연 중에 주인공이 다른 학우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품고 있었던 도덕적 우월감을 - '나는 최소한 그 때 음주운전을 조장하며 너희들처럼 그 친구의 등을 떠밀지는 않았다'는 - 부숴버리는 기억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친구가 거절하지 못 하는 성격으로 서투른 운전실력에도 그 밤에 폭우가 쏟아지는 그 산길을 홀로 운전해서 나가게 되었을 때, 침묵으로 동조한 자신이 그 친구와의 우정밀도를 돌이켜볼 때 사실은 그 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책임을 느껴야 했었다는 때늦은 후회감.  그것을 그 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 아니었을까.  이제 그 깨달음이 주는 무게감을 지게되었으니 주인공이 앞으로 삶의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낼지는..  참으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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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본 메소포타미아 고대제국
김환철 지음 / 솔로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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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읽다보면 몇몇 인물들의 믿음의 행보에 대하여 감동받으며 그 믿음의 깊이에 대하여 묵상하게 된다.  나한테는 그 중 한 명이 바로 유다왕국의 히스기야 왕이었는데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으며 국가의 존망 앞에서 기도함으로 구해달라 절규했던 그의 믿음은 내게는 대단한 신앙의 표현으로 본받을 인물이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때마다 성경에서 그 부분을 가끔 펼쳐보고 읽고는 한다.  그러다보니 그 상대방인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 대하여 궁금해졌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유다왕국을 쳐들어온 그는 결국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의 오만함으로 유다왕국을 공격하기는 커녕 고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자 급히 귀국하였다가 자신의 성전에서 예배를 올리던 중에 자신의 장성한 두 아들들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만다.  또한 요나서에서 나오는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베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스의 문학이나 고대 근동문학에서 곧잘 나오는 니느베는 풍부한 물자가 모임으로써 문화와 향락의 중심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꾸 접하다보니 이 당시 국제정세는 어떠했으며 세계사나 현대 건축기술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고대중동국가들의 역학관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산헤립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고 왜 자신의 아들들에게 살해되는 형태로 그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까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라딘을 뒤적이다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책은 거의 전설로까지 여겨졌던 기원전 2천년대에 존재했다는 수메르왕국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부친이 살았던 하란을 떠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는 내용에 따라서 시작점을 그 시대로 잡은 듯 하다.  성경말씀으로 읽을 때는 유대민족의 시점에서만 따라가게 되었었는데(구약은 유대민족의 역사책이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을 병행하여 읽게 되니 당시 아브라함의 이동은 오랜 기간동안 해당지역을 지배해왔던 수메르왕국의 멸망으로 인한 당시 세계가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었던 일이었다.  그 때는 4개지역으로 문명이 있었다면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대강국인 수메르왕국의 멸망은 오늘날 미국과 러시아가 대규모 전쟁으로 둘 다 멸망해버렸다는 가정 하에 받아들여도 될 정도로 그 지역에서는 큰 혼란과 소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후로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 히타이트, 시리아 등 우리가 세계사에서든 여행에서든 어떻게든 접해보고 들어본 고대문명의 가장 찬란하고 가장 강력했던 제국들의 면면이 그 엄청난 세월을 뚫고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들을 통하여 확인되고 검증된 내용에 한하여 차례차례 독자에게 전달된다.  사족이지만, 세계 4대문명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지역의 앞선 문명과 문화는 나일강유역이나 황하강유역의 후발주자들가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기의 이 제국들은 그 당시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고 앞선 제국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오죽하면 그레함 핸콕같은 이는 <신의 지문> 등의 책에서 수메르민족은 사실 외계에서 온 앞선 문명인들이고 지구상의 고대제국의 흥망성쇠는 그 우주인들 간의 분쟁이 지구에 세워둔 속국들(지구인들)을 통해 대리전으로 이뤄진 것이라고까지 가설을 펼쳤겠는가.

 

 

이 위대한 제국들의 관계는 그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서로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하며 땅을 뺏고 빼앗기는 과정을 통하여 하도 얽히고 섥혀서인지, 책 속에서는 시대별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라별로 정리한 것이 저자 입장에서도 훨씬 편했을 것이고 읽는 내 입장에서는 고마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왕들의(본인들은 자신들을 그저 위대한 "王"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중국의 관점을 借用한다면 그 광활한 영토와 집약된 富와 화려한 문물을 고려할 때 그들은 이미 그 때부터 "皇帝"들이었다) 이름은 하나같이 한글로 써도 7~8개의 글자수를 자랑하며 길게 나열되는데 이 와중에 "이 때 앗시리아는 @왕이었고 히타이트는 %왕이었으며 바빌로니아에는 $왕이었고 이집트는 &왕인 때였다"고 시대별로 정리하고자 했다면, 각 국의 왕의 이름들을 적어넣는데만도 한 문장이 기본 3줄 이상은 갔을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흥진진하게 펼쳐지는 고대제국들의 면면은 앗시리아에 이르러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자리잡혀있었던 내 편견을 여지없이 깨트려줬다.

 

 

요나서에 보면 선지자 요나가 니느베에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을 거부하는 이유가, 앗시리아의 잔혹함과 포악성, 끔찍할 정도의 철두철미한 파괴를 자랑하는 정복군의 행태에 치를 떨었기 때문으로 나온다(기본적으로 작정하고 부쉈다하면 씨도 안 남기고 말살시켰는데, 가령 어떤 왕은 모든 건물들을 다 없애고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서 죽이고 먼 타지로 이주시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물을 끌어다가 남겨진 도시를 잠기게해서 물이 빠진 뒤에는 정말 말 그대로 땅만 남게 했다).  보통 종교와 상관없는 다른 역사서들을 읽어보아도 앗시리아는 항상 무식하며 용감하기에 오히려 광폭하고 잔인무도한 폭도들인데 힘만 세서 주변국들을 아주 유린했던 악마와 같은 존재로 나온다.  그래서 앗시리아가 멸망한 그 날 많은 나라들이 축배를 올리며 자신의 신들에게 기쁨의 경배를 드렸다고 했던가...  하지만 남겨진 유적과 유물들을 통하여 철저히 검증되고 考證된 내용에 한하여 그 저술의 근거로 삼은 이 책에 의하면, 앗시리아가 그렇게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제국으로 여겨지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앗시리아가 처음 시작할 때 이미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자랑했던 바빌로니아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 것이 두고두고 그들에 대한 汚名을 남긴 원인이었던 듯 싶다.  마치 조선이 개국 이후 바로 중국에 대하여 한 수 접고 문화적 종속국을 자처함으로 500년 역사를 채워서,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잘 모르는 內外國人에게는 조선이나 한민족 자체가 동북아의 변변치 못 한 꼬마집단인 양 인식되는 것처럼 말이다. - 한반도의 여러 왕국들은 자주독립국으로 때로는 그 영토가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 정도로 힘을 키우며 다양한 군사행위와 외교활동으로 그 긴 세월을 잘 지내왔었는데, 선대왕국들과의 차별화를 꿰한다는 것이 고작 주변 강대국에게 자처하여 속국으로 삼아달라 한 것이 잘 한 짓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물론 조선태조 입장에서는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이 그럴 만 했겠지만 그런 개국방향 제시가 결과적으로 후대에 얼마나 많은 걸림돌을 제공하였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광해군 때 어떻게든 그 고리를 끊어내려고 했었는데 이미 머리가 굳을대로 굳어버린 집권세력으로 인해 오히려 왕이 축출되는 상황까지 갈 정도였으니..  그 결과로 결국 세계정세를 읽지 못 한 愚君으로 인해 병자호란의 고통을 겪었던 걸 생각하면 태조가 후대왕에게 중국에 대한 속국으로서의 禮가 사실 조선왕조 건립목표 중 하나는 아니라는 祕書라도 남겨놓고 갔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앗시리아는 바빌로니아의 문명을 흡수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세계를 이룩하여 후에는 바빌로니아를 뛰어넘는 수준의 건축기술과 저술을 자랑한 광대한 제국이었다.  앗시리아 제국의 잔혹성과 피정복지에 대한 철저한 파괴는, 물리적으로 이동수단이 제한된 고대시대에 군대의 이동에 어쩔 수 없이 시간이 걸리니 광활한 영토를 단기간 안에 제압하고 변함없는 통치를 도모하는 제국 입장에서는 어쩌면 피치 못 할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제국의 통치에 대하여 감히 反旗를 든 자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과 파괴는 주변국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그로 인해 혹 있을지 모를 반란의 기운을 미리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 결과적으로는 그 효과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역사는 알려주지만.   그래서 타 제국의 제왕들과는 달리 앗시리아 제국의 왕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정복된 나라를 유린하였고 어떻게 파괴하고 처벌하였는지 그 형벌의 내용과 규모까지 상세히 비문에 새기어 제국의 곳곳에 세움으로써 자랑하였다 - 이런 행위 때문에 앗시리아의 잔혹성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후대에 전해지게 된 듯 하다.  사실 따지고보면 이집트나 페르시아나 중세유럽국들, 또는 고대 중국제국들은 반란을 일으킨 속국들을 대할 때 그리고 정복전쟁을 해나갈 때 과연 앗시리아와 다른 점이 있었을까?    

 

 

나를 이 책으로 이끌어준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앗시리아의 산헤립왕.  그는 성경에서는 산헤립이라 알려졌으나 실제(에 가까운 발음으로) 이름은 센네게리브였다.   그리고 그는 사실은 앗시리아제국이 그 후기에 배출한 걸출한 제왕 중 한 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민족은 그 선민사상으로 반골기질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선민사상이란 자기민족 내부에서는 결속력에 좋을지 모르나, 그 속에 담긴 어쩔 수 없는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주의 그리고 그로 인해 불거져나오는 배타주의 속성으로 인해서 주변국들에게는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고 때로는 강대국의 철저한 응징을 불러오는 처절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일반사회에서의 개인들 간에도 그러하지 않는가.  괜히 잘난 척을 심히, 오래도록 했다가는 결과적으로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때로는 한 대 얻어맞고나서 엉엉 울게 되는...   개인적으로는, 구약에서 보여지는 유대민족의 선민사상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 그릇이 될 민족으로서 그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특단의 장치였다면 신약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 구원의 역사를 혈통을 뛰어넘어 전파하였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약속인데,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아직도 자신들"만"의 메시아가 오시지 않았다고 믿기에 계속 선민사상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중동을 지구 상의 화약고로 만들어놓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세계정세에까지 환란을 끼치는 행위를-엄청난 자본으로 군사적 강대국들의 정치/외교에 입김을 작용시킴으로써 - 서슴치 않는 걸 보면 사실 저 나라부터 손 보셔야하는 것 아닌가 싶기는 하다.

 

 

여하튼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스라엘-유다왕국의 왕들은 초대 다윗-솔로몬 시대를 지난 후에는 그다지 영특하지 못 했던 것 같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하고 읽어낼 수준이 안 되는 이들이 줄줄이 왕위에 앉다보니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다가 오판을 하여 애꿎은 백성들만 무수히 죽어나가게 하는 결과들을 자주 만드는데, 센네게리브에 대한 유다의 히스기야왕의 반란동조도 그러한 경우 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는 히스기야의 완전한 항복으로 센네게리브는 물러간다.(청태종이 조선의 인조에게 항복의 의미로 三拜九叩頭禮를 받고나서 매년 엄청난 양의 조공을 약속받고 왕세자 이하 왕의 嫡子들을 포로로 삼아 조선왕조를 그대로 놔두고 물러간 것과 같다.  따지고보면 히스기야도 집권자로서는 인조만큼 무능한 왕이었던 것 같다.)   앗시리아의 평소 행위로 봐서는 유다왕국을 철저히 유린하여 폐허로 만들고 갔어야했는데 항복만 받고 재빨리 물러간 이유는 본국에서 날아온 역모소식 때문이었다.  아마 귀국 후 可視的인 역모행위는 쉽게 제압했던 듯 한데,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자신이 모시는 신의 성전에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던 중 그는 그만 친아들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성경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있는데, 여하튼 사람이 움직이는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의 실질적인 發露가 있으니까.. 그 부분을 앗시리아의 역사로 살펴보자면 센네게리브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는데 계비를 통해 얻은 막내아들이 못내 예뻤나보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로 그 어린 아들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 후의 상황은..  조선왕조의 태종이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는가를 떠올리면 된다.  태종과의 차이점이라면, 태종은 그 동생들을 살해함으로써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앗시리아의 왕자들은 아버지를 살해하였고(그 이복동생도 당연히 죽였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자기들끼리 누가 왕위를 차지할까 내분이 난 상황에서 바빌로니아 속국을 다스리고 있던 센네게리브의 둘째 아들(패륜을 저지른 왕자들에게는 이복형제이든 동복형제이든 어쨌든 형뻘이었을 것이다)에 의하여 패퇴당하고 만다 - 그리고 그 패퇴자들도 아마 역시 살해되었을 것이다.(읽다보니 느낀 것인데 광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다스리는 권력층의 입장에서는 친족간의 살해행위는 결코 패륜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가 옳다는 것이 아니고 그게 하도 일상다반사가 되어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성공한 둘째아들은 에셀핫돈왕으로 아버지 뒤를 이어 앗시리아 제국의 제왕이 된다.  그리고 그는 앗시리아 후기의 걸출한 왕 중 한 명으로 기록된다.  사자새끼들은 다 사자이고 영웅의 자손은 다 영웅이라고 했던가.  진시황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느꼈지만 시대가 낳은 걸출한 인물의 자손들은 대부분 그 자질이 뛰어난 것이 특징인 듯 하다.  진시황과의 차이점이라면 센네게리브는 사람 보는 눈이 그런대로 정확하여 그 뛰어난 아들을 잘 활용하였고, 그 덕분에 그 아들은 바빌로니아 속국을 다스린 행정경험으로 앗시리아 제국을 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엣셀핫돈 이후에는 그 동안 힘을 축적하여 재기를 노리던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앗시리아는 결국 망하고 만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병으로 앓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났을 때 바빌로니아에서 사절을 보낸 내용이 성경에 나온다.   히스기야는 비록 당시로서는 앗시리아의 속주에 불과하나 그래도 한 때 유명강대국이었고 또 문화대국으로 이름 높은 바빌로니아가 일부러 자신한테까지 사절을 보내온 것에 감격하여 자기가 갖고 있던 물질들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로 인해 유다왕국의 멸망을 예언받는다.  유대민족 관점에서는 이 정도로 끝이지만, 당시 세계 정세로 보자면 그 동안 힘을 축적하였던 바빌로니아가 서서히 앗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계획하며 주변 소국들에 대한 포섭에 나선 행위의 일환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바꿔말하면 히스기야의 快癒에 대한 축하사절이라기보다는 반란군 규합을 위한 외교사절이었던 셈이다).  그 결과로 성경의 예언대로 당시 중동 시민들에게 원성을 자자하게 얻고 있었던 앗시리아는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패망하고 그 크고 아름다운 궁전은 점령군 손에 넘겨주기 싫었던 마지막 제왕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고 화염에 휩싸여 스러지고 만다.   그리고 유다왕국은 히스기야의 잘못(교만)을 책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대로 바로 그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멸망한다. 

 

 

앗시리아 부분만 놓고 읽자면, 마치 앗시리아는 스타워즈에서 전 은하계를 정복하고자한 자기 목적에만 충실한 사악한 황제이고 그에 대항하는 각 속국들은 그 사악한 힘에 대항하여 결집하는 반란군처럼 읽힌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Jedi인 양 비춰졌던 나라도 결국 그 목적은 앗시리아의 패권을 빼앗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한 것에 불과하지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원래 인류의 역사 아니었나.

 

 

성경이나 또는 어느 한 민족만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던 책과는 달리, 이 책은 각 제국의 興亡盛衰와 각 국간의 연관관계를 비교적 알기 쉽게 씨줄과 날줄로 엮어 촘촘히 보여준다.  한 나라만 살펴볼 때는 이해되지 않았던 외교적 결정과 군사행동 등이 여타 주변의 제국들과 관련지어 살펴보게 되니 왜 그랬는지 또는 어째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시작은 성경에서 나오는 고대 제왕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였지만 그에 대한 답 뿐만이 아니고, 평소 관심이 있었던 화려한 고대문명의 위대한 제왕들과 제국들에 대한 이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었다.   가령, 그 동안 고대문명의 시발점이자 최고점으로 생각했었던 이집트는 사실 이 중동의 제국들에게는 이빨빠진 호랑이에 불과했었고, 또 현대 유럽국들에 의하여 문명의 절정으로 여겨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이 제국들에 비하면 후발주자에 불과하며 오늘날 칭송받고 있는 그들의 민주주의는 사실은 각 도시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내세운 이합집산을 목표로 하는 과정에 어쩌다 발전된 정치적 논리였다든가...  읽으면서도 내내 새로운 사실을 알려줘서 각 등장인물들의 익숙하지 않고 너무 길어 기억하기도 힘든 이름들에도 불구하고 몰입하여 읽게 되었다.  이 고대문명들의 남은 유적들이 아직 건재하는 동안 직접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   정말 언젠가는 내게도 허락되는 기쁨이길 다시 한 번 소망해본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고대제국, 성경, 산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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