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폴란드사
김용덕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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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스쳐 지나가듯이 알고 지나간 국가가 사실은 얼마나 유구한 역사와 다양한 질곡의 시간들을 거쳐서 살아남은 나라였는지 새삼 알게되어 놀라게 된다. 

 

지난 여름에 약 열흘 간 아이와 둘이서 프라하를 다녀왔다.  그 때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이, 유럽연합의 일원으로서 어느 정도 치안과 교통의 편리성이 보장된 가운데 아직은 유로통화를 쓰지 않기에 물가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나라로의 여행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였다.  그 때도, 사실 그 전에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동구권국가에 대한 첫 여행지로 체코를 본의 아니게 택하면서 여행출발일이 다가와서야 그 나라에 대해 텅 빈 머리로 가기에는 예의가 아닌 듯 하여 마지못해 체코역사 관련책을 사들었다가 그 역사의 길이와 깊이와 다양함에 푹 빠져들었었더랬다.  덕분에 프라하에서 아들과 둘이서 보낸 시간은 참으로 풍성하고 추억이 송글송글 맺히는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다녀온 뒤, 서유럽 대비 정말 저렴한 물가 수준과 친절한 시민들, 또 외지인과의 의사소통에 부족함이 없는 국가의 교육수준에 크게 감동받아서 내년 여름에도 동구권 국가를 도전해보고자 했다.  그래서 위의 조건에 부합하는 나라를 찾다보니 나온 곳이 폴란드였다.

 

 

내가 폴란드에 대해서 아는 내용이라곤, 1) 아우슈비츠가 위치한 나라, 2) 마담 퀴리가 폴란드어를 공부하다 들킬 뻔 했던 일화가 있는 나라(마치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 때 학교에서 국어와 한글을 몰래 숨어서 공부해야 했었던 것처럼), 3) 그 옛날 "명화의 극장" 등에서나 보여줄 법한 (하지만 얼마 전 지상파방송에서 특집으로 보여줬던) 율 부리너 주연의 영화 "대장 부리바"에서 장남역으로 나왔던 미남배우 토니 커티스가 적군의 장군 딸과 사랑에 빠져 자신의 부족인 코사크족을 배신하고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게 되는데, 그 때 토니 커티스를 멋있게 변신시킨 군복이 바로 당시 폴란드의 장교복이며 그 전장터는 폴란드라는 것-이 영화를 어릴 때 보고 느낀 감상은 역시 폴란드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마지막에 나온 부족장인 율 부리너가 나무에 묶여 화형에 처해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부족원들이 말을 몰고 멀리 달아나는 장면 때문이었다, 사람을 화형에 처하다니 끔찍하다 싶은 생각에 어린 마음에 폴란드는 야만적이란 인상이 깊이 박혔던 듯 하다, 4)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조국, 5) 마지막으로 수도가 바르샤바인 곳으로 초대 민주대통령이 바휀사였던 나라 정도였다.  이 정도 지식으로 도전하기엔 터무니없음을 알기에 폴란드 관련 책을 찾아보니 동유럽여행책의 일부로 몇 페이지 정도 할애된 것 외에는 폴란드만을 따로 다룬 책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따지고보면 체코도 그랬는데, 많지 않는 저서들 중 그래도 꼭 하나는 그 내용이 매우 충실하며 그 자체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한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일 책과도 인연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부분에서 나는 나름 복 받은 편이라고 괜히 행복해본다.) 

 

 

그래서 알게 된 도시, 크라쿠프.  크라쿠프는 마치 경주처럼 그리고 프라하처럼 그 나라에서 천년의 수도로서 위상을 드높였던 도시였다.  그 곳에는 폴란드 최초의 그리고 아마 유럽 역사상 가장 선구적인 때에 세워진 대학이 있고(지금도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수뇌부가 이 곳에도 본부를 두고 있었기에 파괴가 덜 이루어진 그래서 과거의 모습이 나름 잘 간직된 도시라고 한다.  크라누프에는 지금도 그 대학을 세우며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했던 왕비의 발자국이 찍힌 대리석판이 그 길에 남아있고 프라하성처럼 처음보다는 뒤로 갈수록 점차 건축이 더해져 거대한 성이 된(하지만 현존하는 모습은 프라하성만큼의 규모는 못 되고) 바벨성이 수도로 있는 동안 존재했던 국왕들의 석관들을 품고 아직도 건재하다고 하다.  크라쿠프에 수도가 있었을 당시에는 폴란드의 국세가 매우 강해서, 항상 나약하고 주변국가들의 침략만 받은 줄 알았던 이 나라가 실은 러시아도 위협하고 스웨덴까지 그 영토를 넓혀 전투를 벌였단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러고나서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바르샤바로 수도를 천도했단다.  내가 폴란드 국민에 대해서 무의식 중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 그곳에 위치한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수용소가 위치했다는 것 자체가 그 국민이 얼마나 당시 나치에 우호적이었나 싶어서, 내 나름의 무지한 생각으로 멋대로 판단했었던 듯 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은 완전히 왜곡된 생각이었다.  서울만큼 오래된 수도였던 바르샤바는, 나치에 대한 극심한 저항의 처벌로 히틀러가 "바르샤바라는 이름만 남기고 모든 걸 없애라"는 명령에 따라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었다. - 마치 서울이 일제를 거쳐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거의 모든 것이 공중분해된 폐허로 화한 것처럼..  폴란드에 그 이름만으로도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생긴 것도, 실은 유태인들에 대한 관대한 정책으로 유태인 거주율이 유럽 내 국가 중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동거리를 줄이고자 폴란드령에 만든 것이었다.

 

그 뿐인가, 마담 퀴리의 일화를 통해 은연 중에 폴란드에 대해 품고 있었던 "나약함"이란 이미지는 이 책을 읽으며 사라졌다.  폴란드인들은 강했고 군사행동에도 능했으며 무엇보다 자국령과 자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방어를 한 국가였다.  단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마치 로마의 혼란기 때 그러했던 것처럼 왕이 선거제로 선출되면서(로마는 암살로 새롭게 군인황제들이 등극하는 형태였다면) 대귀족들의 구미에 맞게 유럽 각 지역의 유력가문 중에서 왕이 뽑혀서 오다보니 국가의 정책이나 군사력에 대한 일관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이 없어 결국 점차 국가 자체가 무력화해져갔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주변에 새롭게 등장하는 3개의 강대국, 러시아/체코/오스트리아는 점차 폴란드의 영토에 관심을 갖게 되고 뚝뚝 떼어서 분할하는 지경이 되고. 이후에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물론 내부의 우리나라식으로 하면 을사오적들이 있었고...  거기에 동조하는 나약하고 근시안적인 소귀족들은 "폴란드가 그 누구에게도 해가 안 된다면 누가 우리를 괴롭히겠는가"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 모습들을 다년간에 걸쳐 지켜보는 동안 폴란드라는 나라는 한 때 위대한 왕국, 서쪽 유럽국가들을 터키의 맹공으로부터 지켜내줬던 보루 역할에서 주변 강대국들인 사자(체코왕국)와 독수리들(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따지고보면 황족들이 모두 게르만족의 피를 받았던)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기조각의 신세가 되고 만다.

 

 

읽으면서..  한반도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王朝들과 그리고 특히 국왕이 미처 시대상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 한 가운데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부 상위지도층의 주도로 나라를 통채로 빼앗기고 황제는 독살당하고 마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모습이 보이는 듯 하여 마음이 못내 불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약간 흥미진진했던 것은..  결코 차르의 아성을 건들일 자는 없으리라(그 지리적 특성 상) 생각했던 러시아제국이 실은 로마노프 왕조 때의 차르 중 한 명이 전쟁에 대한 패배로 한 번은 폴란드에까지 끌려와서 충성서약을 맹세하고 갔다는 것이나(그만큼 강대국이었다니..), 프라하에서는 은연 중에 자국이 주로 피해를 입은 국가였단 느낌의 설명을 받았었는데 알고보니 체코도 줄기차게 주변국(폴란드)를 침공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또 하나의 강대국에 불과(?)했다는 것, 그리고 서양사 책들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접해봤던 왕들과 황제들이 폴란드 역사를 읽는 가운데에서도 숱하게 함께 스쳐지나가는 것이 역시 유럽의 역사는 이웃들을 빼놓고는 시대가 연결이 안 되는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이 책은 폴란드 역사에 대한 개략적 소개를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폴란드에 대한 애정을 품은 저자가 각 국왕들의 치세에 맞춰서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다보니 전체적 시대상은 독자가 읽어나가며 따로 노트에 표기해서 대조하지 않는 한,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점이 특이점일 듯 하다.  그러니 폴란드라는 국가의 역사 자체에 관심이 있어 책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렇게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한 무지를 조금이나마 씻어내고 폴란드인과 만났을 때 (한류에 대한 이야기를 뺐을 때) 뭔가 가벼운 공통화제거리를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특히 사람과의 만남보다 그 국가에서 오래된 도시들과 다양한 유물들과의 만남에 기대감이 부풀어 있는 to-be-여행객이라면..  이만큼 충실한 입문서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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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 압살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9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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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 20세기 미국의 주요작가 중 한 명이고 노벨상 수상자라는 작가.  영미문학 쪽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일종의 원로대접을 제대로 받는 작가.  그래서 샀다, 21세기에 새롭게 출간된 책들만 주구장창 사서 읽기에는 내 자신의 인문학적 수준이 너무 수직하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추락하는 속도를 좀 늦춰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런데 읽다보니 이건 뭐..  이 작가는 주로 노예제도가 아직 합법적이었던 시대부터 남북전쟁을 거쳐 남부가 패배지역으로서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나는 시기 등에 걸쳐 그 혼돈의 순간들을 배경으로 소설들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에 걸맞게 이 책의 배경은 남북전쟁 직전부터 시작하여 남북전쟁을 거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그 후에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한 집안의 연대기 같은 것을 주절주절 얘기하는 구성으로 시대상을 돌아보고자 했던 것 같다만..

 

(독립된 지위로서의 역사)수준이 일천한 국가에서 태어나 국력에 힘을 입어 국제상을 탄 경우인 것인지.. 내용은 정말이지 중구난방 그대로였다.  주절주절 얘기하고자 한 대상으로 나온 서트펜이란 자는, 그 이유도 분명치 않게 새롭게 찾아서 정착한 땅에서 일방적으로 적대적인 주민들에 의해 "무조건"적 악인으로 낙인이 찍힌다.  대체 그가 왜 악당이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그가 왜 악당으로서 모든 행동을 하는지, 그 배경도 이유도 근거도 실제 상황도 전혀 없다.  그냥 말 그대로 주절주절 넋두리하는 식으로, 그는 이렇게 음침하게 생겼고 저렇게 행동했고 그래서 못된 넘이란 식. 이 작가가 토마스 만의 "부덴부르크가의 사람들"이나 도스토엡스키의 "카르마조프의 형제들" 등을 읽고 큰 충격과 동경심과 경외심을 품었을 것이란 것은 이해한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작품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의 흉내를 내고자 어설프게 한 가문을 끌고 들어와서 중구난방으로 그러니까 어쩌구 저쩌구 개연성없는 전개로 끌고나가는 이야기방식은 정말 식상함을 떠나서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또 마침표가 어디 있고 쉼표는 어디쯤 찍혀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장의 구성.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을 읽고 감명받았었나?  풍광의 자세한 묘사로 독자들에게 어떤 감명을 주고자 한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면..  저런, 실패를 넘어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밖에는.

 

애시당초 이렇게 황당한 작품을 번역서로 접하려면 2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저자가 워낙 황당하게 쓴 작품이든지 아니면 두번째로는 역자가 기가 막히게 짜집기한 완전히 새로운 졸작이든지.  그래서 읽다가 너무 황당한 나머지 저자와 역자의 설명부분을 다시 봤다.  저자는 윌리엄 포크너, 남부 쇠퇴상에 관심이 많아서 주로 그쪽 이야기를 배경으로 많은 작품활동을 했고 시제를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긴 문장을 구사하였단다.  이런 톡특함을 인정받아서 전미 도서상, 퓰리처상,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역자는 이태동, 외대 영어과를 졸업한 뒤 미국 대학원서 영문과로 석사학위, 서울대 영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교수직을 거쳐 현재는 서강대 명예교수인 분이라고.  결론은 나왔다, 복잡하고 긴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특기인 작가가 정말 딱 그 부분만 특기였다는 것.

 

호메르스의 오딧세이를 원문으로 읽으면 길고 시적인 문장으로 그 해석이 참 어렵단다.  바꿔말하면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구성된 창작물이 다 형편없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인생을 담고 철학을 담고 이야기를 담은 탁월한 story-teller가 그러한 문장구사능력까지 갖춘 경우와 그저 겉모양만 따라서 하는 자가 하필이면 그런 문장구사능력만을 갖춘 경우는, 작품세계로 들어간다면 분명 천양지차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아주 반면교사적 작품이었다.

 

물론 영문과생도들 입장에서는 이 작가의 작품들이 매우 훌륭한 교재이자 상위학위를 따고자 할 때 논문주제용으로 선택하기 좋은 사람일 거란 생각은 들었다.  어쨌든 내용이나 뜻 전달에 상관없이 말 갖고 장난치는 걸 좋아한 사람이란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된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목적이라면 차라리 제임스 조이스를 권하고 싶다, 난해하기 그지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최소한 읽는 동안 실소를 금치 못 하게 하는 수준의 작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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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도쿄를 만나라 - 도쿄 남자의 진짜 일본 문화 기행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김동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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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제목을 이렇게 밖에 못 짓나? "일생에 한번은..."라든가 "아들러식..."라든가. 제목에도 트랜드가 있는 건 알겠지만, 제목부터 상투적이라면 그 내용에 대해 어떻게 기대를 품을 수 있을까. 중고서적 뒤적이다가 몇 번씩 겹쳐보이는 제목에 살 마음 없게 만드는 영혼없는 작명법에 대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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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타토르 로마사 트릴로지 3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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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이라는데 처음부터 다 보자니 가격적 부담이 커서 우선 2권째에 해당하는 "루스트룸"을 샀었다.  한참 책장에 방치된 상태로 놔두다가 책의 두께가 보관하는데 부담이 되어 얼른 읽고 중고로라도 내놔야겠다 싶어서 꺼내들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키케로이며, 저자는 키케로의 비서역할로 여러 문서기록을 남긴 노예, 티로의 입을 빌려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상황, 그 안에서 공존했던 여러 인물들의 활약상, 키케로와 티로의 눈에 비쳐진 그들의 '진면목' 등 다양한 일상들이 역사상 기록으로 남았던 사건들의, 우리가 알 수 없었을 뒷얘기까지 불러내서 촘촘히 재구성하여 그려내었는데, 사실 이 시리즈를 읽기 전까지는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유명한 웅변가라는 것 외에는 정확히 어느 시대에 활약을 했으며 주요 업적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도 없었던 사람에 대해서 정신없이 빠져들기에 충분한 흥미진진한 구성이었다.  급하게 2부를 읽고나서 허겁지겁 사든 것이 3부, 딕타토르였다. 

 

 

딕타토르, 독재관이란 말의 라틴어.  로마공화정의 체제에서 딕타토르는 국가의 위기상황에서만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 임명되고 그 임기는 6개월을 넘기지 못 한다.  그리고 그 해당 위기상황이 해소되는 즉시 임기가 채 만료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재관은 그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 딕타토르의 정신을 잘 보여준 영웅적 인물은 로마공화정 초기인 기원전 5세기, 이웃 민족들의 연합공격으로 국가의 존립에 위기가 닥친 로마인들이 찾아간 킨키나투스였다.  그는 농사를 짓다가 찾아온 로마 사절들 앞에서 토가로 정장을 하고 그 호출을 듣고나서 딕타토르로써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를 위기에서 구출해낸 뒤 바로 그 지위를 내려놓고 농부로서 자신의 일터로 되돌아갔다.  단 15일 만의 최고권력자!!  이러한 영웅담과 전설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로마의 공화정.  하지만 이 딕타토르의 고귀한 정신을 (어쨌거나 공화정체제의 열렬한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훼손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공화정 말기에 "종신"딕타토르 직위에 취임한 카이사르였다. 

 

 

당시 로마가 팽창일로를 거치며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땅이 넓어지면 부의 재분배와 그로 인한 지배세력의 알력이 등장하는 것은 東西古今을 통틀어 당연지사인 듯 하다), 그간의 로마의 탁월한 정치체제와 엘리트교육으로 인하여 출현하기 시작한 영웅들이 쌓이고 쌓여 드디어 그 수준이 최고조에 달함으로써 가문의 영광과 개인의 역량으로 무장한 엘리트들이 원로원이라는 이름 하에 집단으로 討議를 거쳐 국정을 경영하는 공화정체제에 오히려 위기가 닥쳐왔던 시절, 키케로는 바로 이 로마의 공화정 말기에 살았던 변호사로서 원로원 의원이며 집정관까지 지낸 원로계급으로(원로원 안에서도 집정관 출신 등은 상위급으로 타 의원들로부터 존경과 양보를 얻는 위치였다)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었다.  그는 공화정의 몰락에서 제국으로 행정체제가 바뀌어가려는 그 과도기 시절에 1차 삼두정치의 주요인물들과 함께 당시 로마 정치를 이끌어갔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격렬한 정치투쟁으로 인하여 1차 삼두정치의 모든 인물들이 세력을 얻고 또 그 결과로 끝내는 비명횡사하는 모습들을 다 지켜보고나서 2차 삼두정치에 나선 이들의 내부계약에 의해서 살해될 때까지, 그가 주로 활약했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키케로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공화정의 운명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 개인적 야심을 갖고 군사력을 앞세워 대중을 호도하며 권력을 탐하는(어쨌든 키케로의 시선으로 볼 때는) 노회한 권력자들 사이에서(이 중에는 삼두정치의 그 유명한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뿐만이 아니라 로마의 오래된 엘리트귀족 가문들의 다양한 후계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키케로는 그 뛰어난 두뇌와 언변을 이용하여 百尺竿頭의 위험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교묘한 줄타기를 해간다.  분명 정치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하여서는 군사력과 폭도를 수시로 이용하는 당시 정치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시대상은 어쩔 수 없이 기본이었고..  그런 가운데 한 번은 정말 키케로가 그러한 政爭에서 승리, 자신의 정적들에게 죽음을 내림으로써 그 우위를 로마 전역에 떨치는 순간은 키케로와 함께 승리의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키케로의 행보에 의아함을 느끼게 된 것은..  삶은 돌고 도는 것이라 누구 하나가 영원히 권력의 정점에 있을 수는 없는 법, 결국 키케로도 제1차 삼두정치인들의 밀약과 그들에 동조한 정치적 음모에 의하여 추방되고 중앙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 중앙정치에서의 은퇴를 결심하고 실제로 정계은퇴 선언까지 한다.  그런데 후일 주변의 권유를 빙자하여 사실은 본인의 의지로 다시 원로원으로 복귀하고 마는 모습, 모 아니면 도인 상황에서 실패는 곧 죽음 뿐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고야 마는 모습은 내게는 약간 당위성이 부족한 결정같아 보였다. 

 

 

로마의 미덕이라면, 패자에 대한 승자의 아량이라고 할까.  추방령을 내려지면 그 당사자에게는 일정한 시간이 주어지고 그 시간 안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로마의 지배령 밖으로 벗어나면 된다.  문제는 로마의 지배령이 당시에도 이미 어마무시할 정도의 크기였기 때문에 보통 몇일로 주어지는 시간 내에서는 로마 중심부에서부터 출발할 경우 그 지배령을 모두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주어진 시간이 다되면 인간사냥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진나라를 부국강병케 한 상앙이 이후 도망가다가 자신이 만든 법, 신분증이 없으면 어디에도 묵을 수 없게 한 법에 의하며 결국 추적 끝에 잡히게 되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경우 주로 이런 처분을 받는 이들은 정치가들이란 점을 고려, 실제로 원로원에서 그런 처분이 공표되기 전 원로원 내의 친분세력들로부터 해당인사들은 대부분 사전귀띔을 얻게 되고 미리 대비하여 실제 추방령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이미 로마를 벗어나 멀리 달아날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정적이 달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여도 결코 공권력이나 폭도들을 조정하여 그들의 탈출로를 미리 막으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당시 로마인들의 배포와 암묵적이긴 하나 상대에 대한 기본적 존중을 엿볼 수 있었다.  가치관에 따른 정치신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와 다른 편이란 이유만으로 개인적인 원한으로는 발전하지 않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며 스쳐지나간 숱한 대한민국 땅의 정치인들로서는 참으로 갖기 어려운 합리성과 배포라고나 할까.

 

 

여하튼 이런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1차 삼두정치인들에 의해 밀려난 키케로는 분명 카이사르에게 정치로부터 손을 떼겠다고 약속을 한 뒤에 로마로 돌아온 것임에도 불구, 주변의 부추김과 상황의 교묘한 농간에 의해 정말 "기쁘게" 다시 원로원으로 돌아가고 만다.  내게는 이 부분이 老欲으로 느껴져서 키케로의 고귀한 원칙(공화정 死守)에 의문이 들게 되었다.  과연 그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명예를 이용하여 다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명예욕을 위해서 공화정을 이용하여 다시 그 싸움판에 뛰어든 것일까?  내가 그를 직접 대면해본 것도 아니고 오직 남은 기록만으로 재구성하여 접할 수 밖에 없는 현재로서는, 당시 로마인의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고려 결코 구분해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본인조차도 혼동스러워할 질문이 아니었을까?  대의는 공화정을 위해서였으나 그 뒤에 꿈틀거리는 개인의 욕망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으리라.

 

 

모두가 누군가를 의지하고 믿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믿어주는 누군가를 배신해야 하며 또 자신이 믿는 그 누군가의 배신으로 정치적 파멸을 당하고 이는 곧 죽음으로 대변되었던 그 과도기 시절, 이렇게 다시 그 치열한 정치싸움에 뛰어들어 영웅들의 죽음을 모두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정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조언하며 "그 어린애"가 그저 무사히 살아남으려나 하는 의구심에서부터, 결국은 2차 삼두정치의 1인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배신으로 분노에 떨며 안토니우스의 정치목적과 또 키케로와의 仇怨이 얽혔던 그리고 결국 또 비명횡사했던 클로디우스의 전처로서 당시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의 증오심의 복합적 결과로 배편을 구하지 못 하여 망명에 실패한 뒤 결국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쫓아온 호민관에 의하여 처형이 집행됨으로써 그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영웅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던 공화정 말기, 그 무대의 주요인물들과 함께 才器를 겨루며 1차 삼두정치인들에 의하여 로마에서 추방을 당하였고 2차 삼두정치인들에 의하여 생명을 빼앗긴 키케로에 대하여, 후일 초대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가 어느 날 그의 딸 집을 갑자기 방문하였을 때, 외손자가 키케로의 저술을 읽다가 할아버지의 소리에 급히 숨겼을 때 황제는 그 책을 꺼내보게 한 뒤 자신의 손자에게 책을 돌려주며,  "얘야, 그 분은 훌륭한 저술가이자 탁월한 웅변가였고 로마를 사랑한 애국자셨단다"라고 평했다든가..  다른 건 몰라도 티로의 입을 통해 과거의 사료릍 통해 소설형식으로 재구성된 키케로의 삶은 분명, 크라수스와 안토니우스의 무관심과 증오를 넘나드는 거리감, 폼페이우스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수준의 이용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존재감 외에도 카이사르와 옥타비우스에게서 받은 존경과 애정이 느껴졌었다.  여하튼 동시대에 복합적으로 등장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존재들 중 하나로 기록된 몇몇 이들이 그의 군사력이 제로임에도 불구 政略을 세움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했던 인물이라면, 키케로는 분명 대단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책을 읽고나서 흥미가 생겨서 당시 과도기를 알아보기 위해 "로마공화정"이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책에 나온 다양한 기록과 그 분석을 통하여 책의 저자는, 1) 로마의 뛰어난 정치체제는 호전적이고 영예를 탐하는 엘리트들을 독려하여 그 지배가 팽창하는데 일조하였고, 2) 그로 인하여 지배력의 팽창을 통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피정복지들에서의 압력/긴장관계, 그리고 3) 그 긴장을 풀어내기 위하여 또 다시 등장하는 더 뛰어난 엘리트들의 출현과 그들에게 집중되는 고도의 관심과 군사력 등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오게 됨으로써 4) 결국 공화정이라는 집단 엘리트지도체제의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어찌보면 하나의 수레바퀴마냥 맞물려 굴러가는 운명의 서술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볼 때, 키케로 혼자(또는 그에게 동조한 몇몇 원로원 의원들)의 힘만으로는 몇백년에 걸쳐 서서히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굴러가고 있던 그 거대한 수레바퀴의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를 늦추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정치가이자 웅변가, 공화정 역사를 통해 배출된 여러 집정관들 하나에 불과했을 키케로의 삶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명받고 膾炙되며 그 저술들과 기록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이유는, 그런 모든 것을 앎에도 불구 그에 초연하여 운명에 맞서서 자신의 원리원칙을 지켜내고자 최선을 다했던 한 사내의 모습에서 숭고함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원리원칙을 고수하고자 한 과정이 다 옳거나 바른 결정만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뛰어난 두뇌와 판단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린 결정들이 모두 시의적절하고 최선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아,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인간이지 않은가?!  로마공화정의 운명이 거기까지였음을..

 

"Finitum non capax infiniti... Spote dei, aetermo!"

 

 

 

 

 

로마공화정, 키케로, 카이사르, 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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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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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때 나 역시 현지에서 생중계로 뉴스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리뷰 등을 자세히 살펴봤다. 17살 아이가 살인자로 오명을 남긴 채 자살로 그 짧은 인생을 마감한지 17년 만에 그 엄마가 쓴 담담한 수기적 내용. 그 때 사건 직후 헬기 등에서 촬영한 살인자들의 집들(참 크고 좋아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전반적으로 경제수준 높고 살기 좋은 곳이라 알려져있는 곳에서 역시 중산층 백인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이었기에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그 때문에 온갖 추측과 가쉽이 난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나름 아이러니 하다고 느꼈던 것은, 피살당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가해자 측도 평범한 중산층 집안의 부모가 온전히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의 아들들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그로부터 17년이란 자기복기 시간이 지나서 그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가 쓴 수기가 자기변명이 아닌 고통에 대한 그리고 혹시 무엇인가 놓친 것이 있었나 하는 자기반성의 글이란 내용의 리뷰를 읽고 이 책을 주문한 뒤 나름 그 내용에 기대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으며 뒤로 갈수록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저자가 "이렇게 아이를 사랑했고 저렇게 최선을 다 했으며 항상 그런 순간에는 바로 이렇게 대응을 했었다"고 한 부분들 때문이었다.  몇십 페이지에 걸쳐서 계속 나오는 그 내용들을 접하며 느낀 점은, 사실 이들에게서 굉장히 자녀에게 집착하고 아이의 행동을 하나하나 다 참견하며 간섭하는 부모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도한 간섭과 집착을 애정이란 이름으로 잘 포장하고 들이밀었기 때문에, 아직 어린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러한 "관심"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데 큰 두려움과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큰 아들도 있는데 그 아이는 성격이 외향적이라 그럴수록 오히려 겉으로 반항하며 은연 중에 부모에게 경고함으로써 잘 비켜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된 둘째의 경우 매우 내향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성향의 아이였기에 그런 과도한 관심과 간섭, 집착이 오히려 아이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각 아이의 타고난 기질과 서로 "다름"에 대한 관찰과 배려가 전무한 상태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잣대를 들이대며 그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에는 집요하리 만큼 쫓아다니며 숨 쉴 공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본인들은 좋은 부모 노릇을 완벽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그 내용을 글로 읽고 있는 "성인"인 나조차도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가해자의 엄마"가 되어버린 당사자는 자신의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어긋났다, 결국 자신은 잘못 키운 것이 없는데 그 아들의 뇌에 우울증을 극대화하는 특수한 호르몬이 작용 중이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 원인이었단 내용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본인들의 철저하고 꼼꼼한 모니터링에도 불구하고 걸러내지 못 한 또 다른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친구 때문이었다는 식의 변명 아닌 변명으로 점철한 내용이라니..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정말 안타까왔던 점은 사실 그 점이었다, 결국 이 사람은 끝까지 (본인의 의지로) 진실을 외면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지함으로) 정말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진실을 모르고 살아갈 것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아이가 잔혹한 방법으로 다른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죽음을 결심한 괴물이 되기까지 그 모든 시간들을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온 부모로서, 많은 사람들이 사건 후 이 엄마에게 물었다고 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저자도 스스로에게 숱하게 되뇌이고 되물으며 괴로움과 고통 속에 몸부림을 쳐왔고 앞으로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지 못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아이를 굉장히 사랑했고 부모로서 옳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양육했으며 지금 생각해도 그 방법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자신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나누던 대화방식, 아이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 때 취했던 대응방식, 또 아이의 친구들에 대한 꼼꼼한 모니터링과 선정에 대한 애정(이라 씌여있었지만 내게는 "지독한" 간섭/폭력이라 읽혔다) 등등을 자세하게 기술해놨다.  물론 그러한 태도가 모든 아이들에게 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양육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처럼 자기중심적 성향과 그에 따른 자존심이 엄청 강한 기질의 아이에게는 상당히 견디기 힘든 부모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양육의 의 시작을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대부분의 부모가 저지르는 큰 오류로부터 첫 발자국을 뗀 것이 이 모든 불행의 시발점은 아니었을까.  읽는 내내 내가 받은 인상은 이 아이의 기질을 고려할 때, 애정을 빙자한 정서적 폭력이라고까지 읽혔으니까..

우리는 데이트폭력을 보며 더 이상 애정을 가진 두 남녀가 사랑싸움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애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폭력은 말 그대로 폭력일 뿐이고, 여기에는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언어적/정서적 폭력도 포함된다.  차이가 있다면 물리적 폭력은 그 피해의 정도가 측정하기 쉬운 반면 후자의 경우는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 뿐.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따지자면 언어적 또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정서적 폭력은 그 여파와 지속성을 고려할 때 그러한 폭력의 피해자에게 장기적으로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관련 사건들과 연구들을 통해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놀라고 그래서 불쾌하게 느꼈던 점은, 그런 사실을 재확인했단 부분이 아니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폭력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가한 가해자는, 그로 인한 결과로 그 피해자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한 뒤에까지조차도 자신이 사실 상 그 "괴물"이라 낙인찍힌 아들을 그런 존재로 만든 진짜 "가해자"란 사실을 결코 모르고(또는 그냥 외면일까?)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엄마가 역시 평범하고 애정이 풍부한 가정에서 자라난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래서 이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인"이 이렇게 타인(여기서는 아들)에게 애정이란 이름으로 피할 길이 없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쏟아낼 수 있었다면, 그럼 나를 비롯한 그 외의 모든 "일반인"들도 자신들이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는 상대방 그 누군가에게는 결국은 가면을 쓴 괴물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 바로 그 부분이 못내 놀랍고 내 자신의 불안감을 자극해서 불쾌감을 느끼게 한 원인이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 책은, 읽으면서 묘하게 나름 충격으로 다가왔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봄에는 나는 없었다"를 연상시키는 수기였다.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책을 썼다지만..  불행히도 다 읽고난 뒤에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질문이었다.   단지 질문의 방향이 틀려졌을 뿐.  저자가 그 사건 이후로 주변인들에게 숱하게 받았고 자신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답하고자 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 아들이 그런 괴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하지만 내가 책을 읽은 도중에 품게되어 끝까지 의문을 갖게 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애정이란 이름으로 그 아들을 막바지까지 몰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지금까지도) 모를 수가 있어요?"

결국 책을 덮으며 끝까지 남는 질문은 하나였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책을 덮고 하루가 지나도록 생각해봐도 이 책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저자의 저술에 대한 선량한 의도나 역자의 정성어린 번역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별점을 2개보다는 결코 더 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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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03-1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만큼 아들에 대한 충격과 실망이 컷다는 반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