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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욕망과 상실
심상용 지음 / 현대미학사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이론의 길과 창작의 길은 다르다. 이론은 창작들의 그 근저를 따져 물어가면서 존재들의 거대한 지형도와 그 철학적 전제들을 그려내는 것이라면, 창작은 그런 전제와 지형도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필연성'에 천착함으로써 절실함에 절절하게 넘치는 구체적인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진정 무엇인지(혹은 무엇이 될지) 모르고 작업하며, 그렇게 작업할수록 작업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 진다. 그런데 '이론의 시대'가 왔다.
솔직히 최근 몇십년간 보여준 이론의 급진성 덕택에 창작의 급진성은 왜소해져 버렸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 창작은 이론들로부터 내면적 필연성을 수혈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이론들은 삶의 구체적 현실에서 얻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책과 담론 속에서 구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작가와 이론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창작자는 이론 앞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저자 심상용은 이를 '내면의 필연성을 굴복시켰다'고 칭한다. 각자 나름의 절실한 경험들과 역사들 속에서 얻어진 내면적 절실함은 사라지고 헤겔식으로 창작품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기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예술의 제도권화와 맞물리는 듯 하다. 제도화될수록 삶의 다양한 국면들은 단지 유아적 아우성으로 치부되고 어떤 견고한 담론적 전통이 예술의 본령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예술 자체를 반대하는 반미학적 운동마저도 어느새 제도권의 한 양식으로 흡수되기까지 한다. 예술은 죽고 담론과 권력과 자본만 남는다. 저자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섣불리 담론의 자폐적 울타리에 갇히지 말라고 권고한다. 창작의 본령은 담론이 아니므로... 창작은 고등어처럼 퍼덕거리는 삶의 생생한 떠오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