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북라인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뚜르니에하면 떠오르는게 있습니다. 고요하고 그윽한 버려진 수도원에서 숲과 풀벌레들을 벗삼아 유쾌하게 웃음짓는 노년의 신사... 전에 불문학자인 김화영 선생님이 미셀 뚜르니에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죠. 김선생님은 그의 글을 통해 이미 접해진 듯 뚜르니에가 살고 있는 수도원에 익숙한 눈놀림을 하고 있었고, 뚜르니에는 지음을 만난 듯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철학자가 되기 꿈꾸었으나 교수자격시험에 떨어진 후 오히려 수필가로 더 성공했다죠. 그를 지적 스노비즘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합니다. 그의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어깨와 목의 힘을 한껏 빼고 가볍게 개념과 범주들을 넘나듭니다. '소크라테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런 경쾌함입니다. 플라톤의 진중한 무게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 일수록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플라톤의 두텁고 강단있어보이는 입술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양 미간에 지혜의 즐거움이 배어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고 싶어집니다.

하나의 범주는 반대범주을 통해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고게임에 빠져들게 하곤 합니다. 해체주의자들에게 의미가 무한히 소급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반대범주들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뚜르니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상정하는 대립범주들 뿐만 아니라 전혀 그럴 듯 하지 않은 대립들 속에서도 멋진 통찰을 구성해냅니다. 전 고양이와 개의 대비가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뚜르니에는 '경찰견'은 있어도 '경찰 고양이'가 없다는 장 콕도의 말로 은근히 고양이 옹호론을 폅니다. 끊임없이 충성할 주인과 동족을 쫓아다니는 개와 달리 고양이는 스스로 어떤 것에도 도움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동족으로부터 도망치죠. (책의 후반부에 이 대립은 좀 더 추상화되어서 일차적 인간 대 이차적 인간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건 직접 사서 보시고요^^) 묘심(고양이의 마음)이랄까? 눈 틈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제 수염을 흩날리게 놓아두고 구석에서 눈을 반쯤 뜬 채 명상하듯 누워있는 고양이... 흠... 이건 바로 뚜르니에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은 한뜻 출판사에서 불완전하게 번역되었던 적이 있는 책인데 다시 모든 내용을 담아 번역되었답니다. 김정란 시인의 번역이 이전의 책 보다 훨씬 좋군요. 시인이셔서 그런지 우리말을 구수하게 살리시는 능력도 빼어납니다. 봄바람이 불기시작하는 오후에 고양이의 마음으로 이 책을 들고 혼자만의 생각의 징검다리 놓기를 해보심도 좋을 듯... 적극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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