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 '미국'이라는 동화
난 스필버그의 영화는 언제나 미국과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교육의 장이라고 생각해왔다. 영화라는 장르는 유독 미국이란 나라에선 오락적 지향과 함께 그런 교육적 지향이 매우 두드러졌었다. 파시즘의 원조는 독일이나 소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영국이나 미국도 무시못할 기여를 했다. 히틀러나 스탈린의 선전선동정책은 바로 1차대전 기간 동안 영국과 미국의 매스미디어 선전술을 밴치마킹한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나 독일에서는 새로운 매체를 전위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가 문화계에서 강했지만 그것을 탄압하고 영미모델의 미디어 효과를 추구했던 것이다. 스필버그 역시 그 연장선 속에서 나는 이해하고 있다.
톰 행크스는 '전형적인 미국인'의 아이콘이다. 그는 신대륙에 처음 발을 내딛는 - 그래서 유럽적인 것과 상관없는 - 순진한 야만인이다. '터미널'은 미국의 은유다. 이곳엔 온갖 언어와 인종이 교차한다. 이 펄펄 끓는 마그마를 다스리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공항안전관리국장의 방식(이것은 부시행정부의 방식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나보스키의 방식이다. 그리고 나보스키의 방식이 미국의 방식이라고 영화는 주장한다. 나보스키는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이며, 미국은 못 다 이룬 꿈이 이뤄지는 나라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한 인물이다. 또한 공항당국에 대한 '어중간한' 비판적 시각 역시 미국적인 것이다. 관료주의나 큰 정부에 대한 반감은 미국 역사의 뿌리로 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 신보수주의의 형태로 계씅되고 있다.
순진한 야만인의 모습은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전형적인 등장인물인데, 예를 들어 <Saving the Private Ryan>에서 밀러 대위는 독일어 통역병과 대비되어 유럽적("낡은 유럽")이지 않은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부각시켜주는 인물이다.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쇠약하고 의존적인 통역병에 대비되어 실천적이고 독립적이며 건장하고 인간적인 밀러 대위가 되는 것이다. 그 역시 못 다 이룬 꿈 - 거창한 꿈이 아닌 소박한 꿈 -이 있고 그것이 미국의 꿈이라고 주장한다. 순진한 야만인은 (1) 꿋꿋이 혼자 해나가거나 (2) 현자(mentor)의 지도,관심의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이 mentor는 말 그대로 우연히 만난 현자("천사"에 가깝다)이거나 아버지, 또는 국가가 된다. <터미널>에서는 그것이 (째즈를 사랑했던) 아버지이고 <라이언일병구하기>에서는 (유럽적인 '큰 국가'가 아닌 작고 사려깊은) 국가/미국 혹은 잠재적이나마 '신의 가호'가 된다. 신의 가호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단지 그 아우라가 미국이나 아버지의 뒤를 비추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하다. <클로즈 인카운터>는 (미국적 시원의 정서라고 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인간들의 공포와 환희의 이중적 감정을 담고 있으며 <E.T.>나 <Jurassic Park>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이 미지의 세계에서는 옛 전통에 찌든 어른보다는 아이나 아이같은 어른이 더 유능하다. <E.T.>와 <Jurassic Park>에서는 아이가 어른의 귀감이며 아이를 통해 어른들이 갱생된다. 이것은 다시 새로운 미국을 통해 낡은 유럽이 갱생한다는 이데올로기적 뉘앙스를 환기시킨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20세기에 세계적 청년문화의 발상지가 되며 전세계에서 '나보스키'같은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종합하자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로 '미국'이란 동화를 쓰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미국이 그 동화와 일치할 수 없다는 것 쯤은 미국 근현대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금새 알 수 있기는 하다) 그 속에는 악한 자라기 보다는 길을 잘못 든 자가 있고 너무 순진해서 결국에는 성공하고야 마는 半-어른이 있다. 이 성공하는 자는 가족이란 가치를 깊이 존중하고, 독립적이지만 겸손하고 어리숙하지만 용기와 끈기가 있는 자다. 너무도 건전해보이는 그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지만 동시에 너무 건전해서 삶과 세계의 심연 따위는 보지 못하거나 그런 것 따윈 허황된 것이란 태도를 드러낸다. 그의 영화가 한없이 매력적이면서 또 동시에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이유이다. 미국이 계몽주의의 산물이면서도 계몽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던 이중적인 나라라는 점도 이와 부합한다. 계몽의 궁극적 목표(어른이 되는 것)는 미국인의 길과는 약간 다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