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의 '비극'에 대한 생각은 마르크스나 크립키의 "목숨을 건 도약"이나 "어둠 속의 도약"과 밀접히 연관된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개인적 의도와 사회적 결과의 불일치의 문제일 것이고, "비극적"이라 함은 이런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대해(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개인이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며,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나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어떤 합리적인 설명을 명백히 제시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을 요즘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예를 들어 유영철 연쇄 살해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한 나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죽여없앰으로써 모든 것이 해소될 수 있다고(혹은 보복으로써 죄값을 치르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극적 인식'의 결여의 결과다. 비극적 인식의 결여는 결과적으로 사회의 은폐를 초래하고 범죄자를 희생양 삼아 악한 공동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기독교에 대한 나름의 분석에서, 예수란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공동체의 종교였던 유대교가 세계종교인 기독교로 도약했다고 설명한다. 유대교 제의에서 희생양은 공동체의 모순을 대신 뒤짚어쓰는 속죄양인데 공동체 속의 성원들은 공동체의 죄를 모두 희생양에게 지운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라는 희생양이 아무 죄도 없음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공동체의 자폐적이며 자기만족적이며 동어반복적인 상태를 끝장냄으로써, 공동체의 종교가 아닌, '세계종교'가 된다.
이와 유사한 형식이 박찬욱의 복수극 영화들에서도 보인다. 그의 복수극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순전히 사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사적 복수로는 모든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건들의 배경에는 '사회적인 것'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막스인 복수의 장면은 하나의 희생제의처럼 그려지는데, 복수하는 자는 공동체의 제사장이고 죽임을 당하려는 자는 죄를 뒤짚어쓴 희생양이 된다. 이 희생양에게 죄가 있는가 없는가? 박찬욱의 영화들은 이 점을 아리송하게 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