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은 단지 오성, 즉 "스스로 생각하기"(Selbstdenken)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기"(<논쟁> A 32), 즉 결단, 스스로 책임지기, 모험심, 용기의 문제라는 점이다. 계몽은 그저 지성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성격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스스로 일어서려하고, 또 자신이 자연적인 성숙이나 법률적인 성숙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자신의 사고와 결단으로 실제로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개개인에 달려 있다. 계몽은 그러므로 지배적인 편견, 시대의 유행들, 불확실한 여론들, 선전 문구의 암시적인 힘, 이데올로기의 흡인력 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조장하는 비겁함과 안락함에 의해서도 위태롭게 된다. 계몽은 외부적 요인들보다 앞서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것들과 동시적으로는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위태롭게 된다. 계몽은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성향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다. 칸트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행한 인간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아주 안락한 삶을 원한다면 그는 자신으 대신해서 기억해줄 어떤 사람을 가져야만 할 것이고, 또 자신을 대신하여 지성을 사용해줄 또 다른 사람을 가져야만 하며, 자신을 대신하여 판단해줄 또 어떤 다른 사람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경우-펌주)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성숙해지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며, 자신의 모든 의무를 혼자 힘으로 행할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이성에 기댈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인간탐구> p.223)  

                             노베르트 힌스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이엽 김수배 역(이학사,2004) p.88-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덕적인 것 안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새로운 차원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신이 오로지 제약들과 우연들로 점철된 세계 속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과도 대면하고 있으며, 또 그가 어떻게든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가 무제약적으로 보증해야만 하는 그러한 어떤 것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발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되며, 한갓 가능성들(확률들-펌주)의 노리개이기를 멈추고, 그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노베르트 힌스케, 같은 책 p.140

도덕적 혹은 윤리적 차원에서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진정한 도덕적 통찰은, 개인 스스로가 무제약적이고 정언적인 요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아는 데에서 성립한다. 어떠한 전문가도 그로부터 이러한 통찰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또한 이 통찰은 변화하는 여론 추세에 따른 타협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이 통찰은 논증을 통해 수정되거나 더 나은 도덕적 통찰에 의해 대체될 수 있지만,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처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행위자는 도덕적인 것의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만 하며,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도덕적 차원 안에서야 비로소 정치적 행위자가 반격을 견뎌내고 패배를 감수하며,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위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대의 작가들 중에서 이러한 문제를 또렸하게 인식한 사람으로 알렉산더 솔제니친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굴락 군도>에서 왜 저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시대의 공개재판에서 그토록 철저하게 파멸하고 말았는지, 또 그들이 "수수께기같은 판결에 복종"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다. 솔제니친은 그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도덕적인 통찰에 의해 비로소 눈뜨게 되는, 앞에서 말한 정체성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카린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는가? 신뢰할 만한 소문에 의하면, 그는 당에서 축출당할까 봐, 즉 당을 잃게 될까 봐, 그러니까 목숨을 유지하되 국외자로 남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부카린(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은 독자적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반대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켜 스스로를 확립시킬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투쟁을 위한 도덕적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베르트 힌스케, 같은 책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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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6-0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에게선 약간 강고한 보수-자유주의의 뉘앙스가 풍기지만, 그가 칸트에게서 인용한 대로 "총체적 오류의 불가능성"을 고려하면, 그의 복지국가 비판에도 진리의 일면이 있다고 봐야 한다. 복지 국가가 국민을 "탈성숙화"(p.92)시킨다는 그의 주장은 일면 옳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가부장적 국가가 되지 않도록 복지정책에 대한 방법적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sweetmagic 2004-06-0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간달프님 ....정체가 뭡니까 ?

간달프 2004-06-1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장주의가 자유로울까 아니면 복지국가가 자유로울까? 현재 잠정적인 나의 대답은 시장주의는 자유와 상관 없지만 복지국가는 상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유행하는 고전적 시장주의는 자신을 '자연'으로 참칭하며 개인들에게 일률적 적응, 충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개인이 사회/시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연에 대한 도전(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자유의 상실은 사고의 실패/포기와 연관된다. 주어진 것을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은 지배적 권력의 습관적 술수였다. 자본의 시장주의라고 다를 바 있으랴? 그런데 시장주의는 계산을 사고와 혼동하는 듯 하다. 계산은 자유없는 두뇌 작동의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