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2disc) - 할인행사
허진호 감독, 유지태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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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주인공(류지태)의 직업은 소리를 담는 녹음기사입니다. 소리야말로 시간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시간의 진행이 없으면 소리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주인공은 그런 소리를 채집해서 보관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고보니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한석규)의 직업과도 성격이 비슷하지요. 사진을 찍는다는 것과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모두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영상과 소리를 떼어내어 영원히 보관하는 일이지요.

주인공이 작가의 욕망의 투사체라는 낯익은 도식을 들이댄다면 그 인물들은 각각 사진과 녹음을 수단으로 시간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씨름하는 사람들이 될 겁니다. 한석규는 '시간 속의 생명'과, 류지태는 '시간 속의 사랑'과 씨름을 합니다. 그들은 시간이란 운명 앞에서 사랑과 생명의 연약함 혹은 유한함을 몸소 경험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든 죽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변합니다. 게다가 병주고 약주는 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별과 사랑의 상처도 어느새 무뎌져 갑니다.

영화엔 다양한 유행가가 편곡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전체적 정조와 아주 잘 어울리더군요. 음... 우리는 왜 유행가를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유행가란 것이 지닌 대동소이한 정서가 '달래기'이기 때문일 겁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덧없게 합니다. 삶도 사랑도 시간의 힘 앞에서는 덧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행가를 통해 삶의 덧없음을 달래고 견뎌내어 살아남고자 하는 겁니다. 극중의 할머니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는 덧없이 흩어져 사라지는 삶의 운명을 노래로 엮어 부름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해괴한 것은 유행가야말로 덧없는 것들 중에 정말로 덧없는 것이란 점입니다. 우리는 덧없는 것을 통해 덧없음을 견뎌내야 하는 겁니다. 이는 주인공들이 사진과 녹음을 통해 시간의 횡포를 견뎌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진도, 녹음도,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모사물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할머니가 사랑을 잃고 아파하는 주인공(류지태)의 입에 넣어준 알사탕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알사탕은 위약효과(placebo effect)가 있습니다. 시간의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견디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이렇게 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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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이 영화를 봐야겠어요. 김윤아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 가 요즘 너무 좋아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지던 차에 님의 리뷰까지 보게 되었지요. 혼돈의 봄을 달래주는 유행가의 노랫말을 곱씹으며 오늘도 어떤 알사탕 하나를 입에 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