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으로 만나요
샤를로테 루카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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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뒤 몇 년 동안은 소설을 참 많이 읽었다. 14년 동안의 언어적 공백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늦바람이 무서웠던 탓인지 때로는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전개에 도무지 책을 내려놓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계발서에 늪에 빠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소설을 읽는 시간은 "알찬" 독서가 아닌 시간때우기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고전이 아닌 흥미 위주의 현대소설은 그랬고, 연애소설은 더더욱 그랬다!

결혼 8년 차, 법적인 신혼이 5년이라던데 이제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이 된 아들을 키우면서 우리 부부의 모습도 참 많이 달라졌다. 사랑이 식었다든가 서로 소원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연애했을 때의 불같았던 감정이 단단한 신뢰와 믿음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의미다(아마도). 아들도 좀 컸고, 살기 좀 편해져서(?)인가 요즘 남편에게 "우리 예전처럼 데이트 하자!"라고 하는 때가 많아졌다. 뭔가 다시 연애 시절처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래서 몇 년 동안 쳐다도 보지 않았던(?) 연애소설을 집어들었다. 다른 연애소설이었다면 그닥 끌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해피엔딩으로 만나요"라는 제목부터 그렇고, 블로그를 하는 독일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니! (8년 전, 한국에 올 때만 해도 블로그는 관심을 구걸하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한량같은 취미로 치부되곤 했는데 이젠 많이 달라졌나보다. 아닌가?) 왠지 빈 중심가에 있는 대형 서점에 이 책이 대략 어떤 표지로 전시되어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마 내가 그 책을 집어 계산을 하면 친구들이 "역시 쓸데없는 데 돈 쓰기로는 네가 최고"라고 시니컬하게 말해줬겠지.


커버만 봐도 여자들이 딱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본 상태라던가, 책의 색감이라던가... 양장본으로 되어있지만 딱딱하지 않은 느낌에 적당한 크기와 두께, 라운드 처리된 모서리까지. 젠더 프리까지는 아니어도 "여자는 이렇다"는 굴레를 싫어하는 나인데, 왜 이렇게 취향저격 당하는건지 ㅎㅎ 아들을재우고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이 책의 표지를 넘기는 데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엘라(에밀리아)가 블로그에 쓰는 일상과 엘라의 진짜 일상이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설이지만 아주 없는 이야기를 쓰진 않았을테니까 아마 이런 블로그를 운영하고 이런 포스팅을 구독하는 여자들이 있나보다 싶었다. 댓글도 실감나고, 무엇보다 엘라가 쓰는 글이 너무 있을 법한 필체여서 유독 재미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왜 에밀리아의 애칭이 엘라였고, 주인공 엘라의 필명이 신데렐라였는지 눈치챘어야만 했다. 신데렐라와 미녀와 야수를 교묘하게 섞어(스포일링은 여기까지만!) 현대화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역시 독자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익숙한 이야기의 다른 전개(!)를 선호한다는 이론에 힘이 실렸다. 뭐 적어도 나는 그랬다. 

빼빼 말랐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안 얼굴을 가지고 있는 엘라. 30대의 나이지만 양갈래 머리를 묶어도 어색하지 않은 그녀는 심지어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파워블로거. 주인공 버프(?)로 여러 남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만 정작 본인은 구름 위만 떠도는 몽상가인 메인 캐릭터 설정만 봐도, 얼마나 이 소설이 여자에 의해, 여자를 위해 쓰여졌는지 실감이 난다 (어쨌든 우리 신랑은 한 챕터 이상 절대 못 읽을 것 같다). 게다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말도 안되는) 전개까지... 맨정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스토리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재밌는거야?!
그만두지를 못하겠어서 새벽까지 읽었다고!

이런걸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꼭 그렇지도 않지만, 적어도 소설에서만큼은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일어나고, 말도 안되는 전개로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말도 안되게 해피 엔딩이 찾아왔으면 하는 응원을 보내게 되는 소설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찬찬히 읽지 않으면 스토리를 놓칠 정도로 급박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더욱 숨죽이고 읽게 되었던 것 같다(이게 뭐라고!). 소설이 끝난 후 엘라를 이렇게 보내기는 아쉬웠기에(?) 에필로그가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언젠가 극작가였던 지인이 해주셨던 말이 생각났다. 

이젠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 뻔한 캐릭터에 뻔한 스토리라인이라도 순간순간 어떻게 표현하고 만들어나가느냐에 따라 대중이 열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새삼 그 말이 가슴에 와닿는 책이었다. 5분 안에 스토리를 요약하면 오글오글 견딜 수 없을지 몰라도, 책을 읽는 동안 정말 즐겁고, 유쾌하고, 재미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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