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용의자 X>를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 되었다. 사실 그즈음 (아주 늦게) 미야베 미유키,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스타 =작가들의 작품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분량을 상회하는 엄청난 가독성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혼자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데도 숨을 참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도서관을 다니며 그들의 또다른 멋진 책을 만나길 기대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 소설을 잘 읽는 편이 아니지만, 신작이 나올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꼭 찾아읽는 작가들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 중 하나다. 물론 지난 <질풍론도> 때는 기대가 너무 컸는지 약간 실망한 것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팬심(?)을 접을순 없었으니까. 새로운 신간 소식에 가슴이 뛰었다. 자. 과연 이번엔 어떤 책이 탄생했을까? 

한참을 읽고 나서야 제목 <천공의 벌>이 Punishment가 아닌 Bee를 뜻하는 것을 알았다. 진짜인가 의아해서 겉표지를 다시 보니 거대한 벌 그림이 떡하니... 의미없는 책표지는 없다. 좀 자세히 살펴보자 이젠 ㅋㅋㅋ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처럼 이 책은 두껍다. 묵직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테마가 원전이고, 헬리콥터고, 테러다. 그리고 저자는 생각보다 디테일하게 이 생소한 테마들을 서술한다. 그래서인가, 초반에 소설로 몰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건 뭐, 소설을 읽는게 아니라 모르는 분야에 대한 수업을 듣는 느낌이랄까.

나처럼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이봐요, 우라늄이니 플루토늄이니 고속 증식 원형로니 머리아파 다 이해 못하겠으니까 진행 좀 해달라고요!" 심지어 소설은 "전원 3법 교부금"까지도(...) 섬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정도면 거의 소설이 아닌 전과 수준.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가적 설명이 길게 이어질 때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빌보가 여행을 떠나며 네 페이지 이상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도대체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맥이 뚝뚝 끊기는 그런 느낌. 내가 요즘 소설을 너무 안 읽어서 그랬던건지. 

더군다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범인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그것마저 작가의 의도인가 싶었다 (애초에 테러리스트를 이해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게 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긴박한 상황의 진행보다는 부가적인 설명이 주를 이루고, 중요한 사실이 밝혀져 "우와!"하고 감탄사를 내뱉어야 할 것 같은데 그 사실이 너무 전문적인 지식인지라 감흥이 덜하기도 하고... 아무튼 읽는 내내 뭔가 아리송했다. 예전 작품들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뭔가 "어려운" 거지?


그러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으며 저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원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전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 될까?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 일본은 물론 전세계가 방사능의 공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원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식이 나빠졌고 "원전 따위는 사라져야 한다!"는 무책임한 반대파만 늘어났을 뿐이다. 나 역시 같았다. 눈에 보이지도, 확인할 길도 없는 방사능에 노출되었다는 공포는 시간과 함께 사그라들었고, 원전에 대한 안좋은 인식만 생겼다. 그렇다고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무관심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저자가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인류를 위협할만한 엄청난 살상무기.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류가 꼭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있다. 양날의 검같은 원전은 무조건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알아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만큼의 관심이 없을뿐더러 딱히 알아볼만한 자료도 부족하다. <천공의 벌>에 서술된 폭넓은 리서치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원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것, 어쩌면 이 책을 쓴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면에서 소설을 읽으며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어른이 되며 알게된 것은, 세상에는 선하거나 악한 것보다 이도저도 아니기에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이 많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뾰족한 답을 내놓을 수 없기에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싸우고, 투쟁하게 되는 그런 문제들. 한가지 중요한 건 귀찮다고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좋아질 상황마저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