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학교 : 정서적으로 건강해지는 법 인생학교 How to 시리즈
올리버 제임스 지음, 김정희 옮김 / 프런티어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알랭 드 보통이 "인생학교"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지만 좋아하는 분홍색 커버에 쓰여진 이 책 제목을 읽는 순간,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가장 관심있게 찾고 있는 정서적 건강은 20대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향기가 난다. 나만 그런가? 농담이 아니라, 무슨 향수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뿌려놓은 것처럼 은은한 향기가 나는데 이게 만약 출판사(혹은 저자)의 전략이라면 투썸업! 책 제목과 내용, 겉표지 그리고 향기까지 엄청난 4박자를 맞춘 느낌이다. 만약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이 향기의 정체는 뭐지?


정서 건강은 그 사람이 얼마나 지적인지, 얼마나 매력적인지, 얼마나 야심만만한지, 얼마나 부유한지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어떤 부류에 속하든 많이 성취한 사람일수록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대개 상대적으로 임금이 적고, 직장 내에서 지위가 낮으며, 일에서의 성취보다 가정생활을 더 중시한다.
태어날 때는 거의 누구나 정서적으로 건강하다. 아기는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언제 안전하다고 느끼며, 언제 기분이 좋은지가 늘 분명하다. 어린아이들의 놀이는 모든 성인에게 훌륭한 본보기다. 하지만 7세에서 9세 사이 학령기가 되면 정서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적응에 부담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다른 아이들과 자꾸 비교하다 보면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이 차츰 정상으로 느껴진다. (8페이지)


정서적 건강은 정신적 건강과는 다르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하는 삶이나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과도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엔 내가 얼마나 정서적으로 건강한지 궁금했었는데, 정서적 건강의 정의를 읽는 순간 나와는 천 년 만 년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기준삼은 가치나 '좋은 것'들을 무참히 부수어버리는 책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향해 내 모든 것을 걸고 매진하면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다. 사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가진 가능성은 그야말로 무한하다. 어느 시대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같은 정보력과 기술을 가질 수 없었다.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엄청난 능력들이 이제는 평준화되었고 일반화되었다. 손 안의 스마트폰에서 세계가 펼쳐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고 있는 너는 진정한 루저!'가 된다.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과 정보를 가진 이 세상에서, 하다못해 학력, 경력, 재력 하나 없어도 아이디어로 억만장자가 되는 이 시대에 자신의 꿈 하나 펼쳐보지 못하고 아등바등 사는 것은 도대체 얼만큼 비참한 일인지. 그것 때문일까? 현대인은 불행하다. 전대미문의 발전만큼 전대미문의 불행의 시대 아닐까.


이 책은 정서적인 건강을 다섯 가지 핵심적인 요소로 정리한다. 마음챙김과 현재에 충실한 삶, 쌍방향 관계, 일과 진정성, 마지막으로 육아 활동에서의 놀이성과 쾌활함이 그것이다. 사실 소제목만 읽으면 어떤 내용인지 확실히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의 핵심요소는 뒤로 갈수록 앞의 요소가 심화되는 상관관계에 놓여있다.


먼저 "마음챙김"이란 지금의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존재인지 인정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존재와 역할, 부모님이 미친 영향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현재 나 자신을 만든 과거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사실상 이 부분에선 부모님이 우리에게 미친 (대부분 부정적인) 영향을 살펴보는 것이 주과제인데, 완벽한 어린시절이 존재할 수 없듯 실수없이 아이를 키운 부모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로인해 좌절하거나 부모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거를 인정하고 정리함으로써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만 있으면 되니 말이다.

자신의 과거를 인정했다면 이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아감이다. 때로는 과거를 청산하지 못해서, 때로는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람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그것이 심각한 정신적 장애로 이어질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신적 (혹은 정서적) 장애는 사회적인 성공 혹은 존경과는 관계가 없었는데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페르소나를 통해 살아간다'고 한다(77 페이지). 문제는 그들의 정서적 건강은 이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이나 가정 불화 등을 생각해보면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세 번째 챕터인 "쌍방향 관계"에서는 다시 부모님이 등장한다. 일관되지 못한 양육방식과 무방비 상태의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쏟아진 부모의 스트레스는 아이가 자랐을 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특히 이것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놀랍게도 "타인이 나에게 천국이 될지 지옥이 될지는 생후 6개월에서 3년 사이, 즉 걸음마기에 거의 판가름난다"고 한다(93 페이지). 여러 연구 결과, 부모의 부정적인 성향이나 상충되는 요구 등 올바르지 못한 양육방식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이성과의 관계에서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4장인 "일과 진정성"에서는 정서의 주축을 이루는 가치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부모가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부모의 바람직한 특성을 자기 스스로 취하는 "가치의 동일시"와, 강압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런 척하는 "가치의 내사화"로 나뉘게 되는데, 가치의 동일시를 거친 아이들은 내재적 동기를 가지고 건설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반면, 가치의 내사화를 겪은 아이들은 하는 일의 목적과 이유를 찾지 못한채 외재적 목표와 동기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육아 활동에서의 놀이성과 쾌활함"에서 이 책은 순식간에 육아서로 변한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두 손 벌려 환영할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겐 뜬금없는 상황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가슴 속에 "어린 나 자신"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여기에서의 아이는 진짜 내 자식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내가 귀기울여주지 않았던 내 안의 어린 나로 이해해야 맞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진짜 육아에서의 활용도가 더 높겠지만 적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다리가 되어줄 것 같았다.


문득 "인생 학교"라는 단어가 참 적절하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노래 중 "Sein heisst Werden, Leben heisst Lernen"이라는 가사가 있다. 번역하자면 "존재한다는 것은 곧 무언가가 되어간다는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배운다는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정말 그랬다. 뭔가 "된" 것은 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그것이 발전이든 퇴보든)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무언가를 깨닫고 배워갈 때가 아닌가 싶었다. 

책을 읽고 또다시 떠올린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정서적인 건강" 역시 책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거쳐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자아(Selfhood)의 문제는 해결되는 게 아니라 현저히 줄어드는 것"(83페이지)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다른 "인생 학교"들이 궁금해진다. 다른 책들도 시간이 나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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