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부엌
다카기 에미 지음, 김나랑 옮김 / 시드앤피드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초초초예민한 신생아였던 아들. 
보통 먹고 자는게 전부인 다른 아기들과는 달리, 만 10개월이 되기까지 아들은 "자기"가 정말 힘들었다. 한시간이 넘게 겨우 재워놓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수유 시간, 어떻게 먹이고 다시 재워놓으면 심지어 화장품 토너 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기도 하고...
지나갔으니 웃으며 이야기하지, 그때는 정말 등골이 서늘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ㅋㅋ

그로인해 남편과 나의 생활은 무조건! 100%! 아기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아기의 수면 스케쥴에 맞춰 닌자처럼 살았던 우리는 점점 좀비화되어갔다. 자연스레 집안 풍경은 엉망이었고 깔끔한 정리는 먼 나라의 이야기만 같았다. 방 세 개인 집인데 안방과 거실을 제외한 방 두 개는 거의 창고처럼 썼을 정도니... 아들이 돌이 되고서야 틈틈히 정리한 것이 쌓이고 쌓여 두 방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 

그랬던 때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두 돌을 바라보는 아들.
얼마 전부터는 하루에 단 몇십 분, 혹은 (심지어!) 몇 시간 내 시간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확실히 인간으로서의 삶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집도 더 깨끗하게 가꾸고 싶었고 즐거운 식사시간을 꿈꾸게 되었다. 유아식을 슬슬 졸업해가는 아들이 이것 저것 다양하게 먹기 시작하면서 해주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던 남편이 좋아하는 메뉴도 차리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집안일이 괴로운 것은 매일매일 열심히 하더라도 단 몇 시간만에 도루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엊그제 부엌을 싹 다 치웠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난장판이 되어있고, 곳곳에 쌓인 먼지와 기름때는 그나마 코딱지만큼 남아있던 사기마저 싹쓸이해버리는 느낌이었다. 살림을 한다고는 하는데 왜 매 번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걸까? 도대체 여자로 태어났으면 평생 쓸고 닦고 정리하는 운명의 저주라도 받게 되는걸까? 아기가 크면서 생겨난 황금같은 나의 자유시간이 집안일로 점철되는 것을 괴로워하던 중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생각하지 않는 부엌>. 그래. 나도 생각 좀 안하고 부엌에 와보고 싶다고!!


제가 단언컨대 부엌일이 술술 풀리면 인생은 180도 달라집니다. (11 페이지)


이 한 문장이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집안일이야 원래 끝도 없고 도대체가 셀 수도 없는게 당연하지만 그 중 가장 귀찮고, 오래걸리고, 힘들고, 고된 일은 부엌일이었다. 하루 세 끼 밥을 차리고, 반찬을 만들고, 치우고, 닦고, 청소하고... 도대체 부엌 찬장과 서랍들에는 귀신이라도 사는건지 조금만 내버려두면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고, 워낙 물을 많이 사용하는 곳이라 물때와 요리에서 나온 기름때가 시도때도 없이 쌓인다. 부엌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고, 오늘 뭐 먹지 걱정만 덜 수 있다면 집안일의 7,80%는 해결될 것 같았다.




부푼 가슴을 안고 읽기 시작한 이 책.


사실 부엌일의 비법을 담고 있다기엔 지나치게(?) 컴팩트한 사이즈가 영 미덥지 않았다. 뭔가 엄청나게 많은 규칙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정도 분량으로 제대로 할 수 있는걸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나, 우리 부엌이 달라졌어요!!



도대체 이 기분을 뭘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내 부엌은 100% 달라졌다. 내 하루일과도 100% 달라졌고 집안일의 스트레스 역시 표현 못할 정도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심지어는 부엌에서 일하는게 즐거워졌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우리집 부엌이 이렇게 넓었나 싶을 정도로 넉넉하게 수납할 수 있었고, 더이상 냉장고나 냉동실에서 상한 음식을 버리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매일 자러가기 전 다시는 요리하기 싫을 정도로 깨끗한 부엌을 볼 때면 집안일이 이렇게 쉬웠나 싶기도 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그럼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ㅎㅎ



일단 이 책은 기본적인 부엌 정리에서부터 장보기, 요리하기, 냉장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식단 짜기와 요리 준비하기까지 부엌일의 모든 분야를 다 아우른다. 특히 대박인 것은 마지막 부록으로 실린 밑손질 레시피. 진짜 이대로만 준비 해놓으면 별다른 준비 없이 한끼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 급하게 아이 식사를 차려야 하는 압박을 아는 엄마들에게는 이만한 희소식이 없을듯. 물론 아이의 기호에 따라 준비해놓아야 할 요리재료가 달라져야 한다. 


그 외에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내용들은,

1. 냉장고 정리하기 - 트레이를 이용해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식사 습관에 맞게 재료들을 정리해둔다
2. 행주 여러 장 준비하기 - 이것 만으로도 부엌 정리 반은 끝이다
3. 냉장고 달력 사용하기 - 식단 짜기, 장보기, 냉장고 정리를 한큐에!
4. 식재료 준비하기 - 시중에 파는 냉장고 용기를 이용해 식재료를 미리 손질해두면 요리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된다.
5. 설거지하기 - 드디어 제대로(!) 설거지 하는 방법을 배웠다

정도가 있다.


신기한 건 이렇게 부엌일에 요령이 생기니 냉장고 음식을 버리는 일도 없어졌고 장을 볼 때 걸리는 시간도 훨씬 줄었다. '오늘 뭐 먹지'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렇게나 한 끼 때울 일도 없어졌다. 정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면 미리 다듬어둔 요리재료로 맛있는 볶음밥이나 카레, 짜장밥을 해먹으면 그만이었다. 



저자의 말이 맞았다. 부엌이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진다. 끊임없는 집안일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주부들의 인생은 더더더욱 달라진다. 짬이 날 때 미리미리 준비해놓는 것이 이렇게 편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카레를 준비하며 물이 끓는 동안 양파 하나를 더 다져서 냉동해놓는 것도 그렇고, 야채를 다듬을 때 손가락 모양으로 다듬어 전용 용기에 담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다지거나 깍둑썰기를 하니 시간은 물론 음식물 찌꺼기가 나오지 않아 좋았다. 

물론 전용 용기와 부엌 정리를 위한 도구들을 사느라 꽤나 지출이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는 만큼 버려야 할 것도 참 많았다. 저자의 조언처럼 부엌을 정리하다보니 찬장에 켜켜이 쌓여있던 도구들 중 반 이상이 내가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혹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미련을 버리고 모두 정리하니 매일 써야 하는 그릇과 도구들을 훌륭하게 수납할 수 있었고, 이제 이렇게 정리를 마친지 몇 주가 지났지만 한 번도 버린 것들이 필요했던 적은 없었다.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고, 조금 돈과 시간이 들더라도 과감히 부엌에 투자하고 뒤집어 엎었던 것(?)이 다행이고, 이런 습관이 몸에 배어 기쁘게 집안일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생각 같아서는 주변 엄마들 모두에게 이 책을 한 권씩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런 방법이 맞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활은 확실히 180도 변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부엌, 일하는 게 즐거워지는 부엌을 꿈꾸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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