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 - 창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 해결 프로젝트
에릭 메이젤 지음, 안종설 옮김 / 심플라이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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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서평에서 이 책을 "창작자들의 필독서"라고 표현한 데 십분 공감한다. 더불어 예술가 전문 상담가가 있다는 사실(저자는 이것을 "크리에이티브 코칭"이라고 부른다)에 놀랐다. 예술가에 특화된 상담이라니, 비용이 얼마이건 한번쯤은 받아보고 싶었을만한 일인데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정말 기뻤다. 이 책은 전문 예술가와 아마추어 예술가 그리고 예술가 지망생 스물 세 명의 상담 기록이다.


대학 시절 매일 만나도 유쾌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매사에 심각할 것이 없던 그는 학업이라던가 장래 역시 고민하는 법이 없어보였는데,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학업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어떻게 하면 수업을 빼먹고 재미있게 놀러다닐까" 연구하는 것 같았다. 간신히 낙제만 면하게 수업을 듣는 것은 기본, 과제나 세미나 논문을 베끼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한번은 내게 돈을 줄테니 세미나 논문을 대필해달라고 부탁했다 폭풍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무튼 인생의 역경(?)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가는 이 녀석에게 나는 "인생예술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인만큼 그의 한심한 학습태도를 아낌없이 질타하곤 했다.

지금와서 갑자기 이 친구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이 친구야 말로 진짜 "예술가 기질"이 있는 친구가 아니었나 하는 (바보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안 하고, 늘 감정과 자아가 이끄는 대로 흘러다니던 녀석. 하지만 내가 정말 부러웠던 것 한 가지는, 자신의 (예술가적인) 고민에 있어 한 치의 거짓이나 위선도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담담함이었다.

"내 연주가 구려."
"곡이 써지질 않아."
"도무지 집중이 안된다니까."
"나같은 놈은 그냥 음악을 하면 안되나봐"

등 쉽사리 입밖으로 내지 못할만 고백(?)들을 서슴없이 내뱉던 그. 어린 시절의 나는 뭔 이고(Ego)가 그렇게 셌던지, 이런 그의 솔직함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난 절대 저러지 말아야겠다'란 다짐을 하곤 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 30대에 접어든 나는 과연 예술가로써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을 읽으며 십수년 전 그가 했던 고민(이라고 쓰고 푸념이라 읽는다)이 지금 나의 고민과도, 저자 에릭 메이젤의 클라이언트들의 고민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에 피식 웃었다. 장르를, 연령대를, 장소를, 문화를 불문하고 예술가들이 하나같이 하는 고민은 똑같은걸까. 총 스물 세 개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마치 내 이야기 같아 무릎을 칠 때도 있었고, 별로 공감가지 않아 스윽 지나가버린 이야기도 있었다. 뭐가 되었든 한가지 깨달은 것은, 창작하는 사람들치고 이 스물 세 명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이미 글쓰기 코치로, 상담가로, 작가로 유명한 저자인만큼, 그에게서 카운셀링을 받는 데는 엄청난 경제력이 필요할 것이다 (문득 "베이비 위스퍼"로 유명했던 고 트레이시 호그가 아기를 돌봐주는 댓가로 일주일에 5만불씩 받았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특수한 기술과 능력이 일반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대가를 창출해내는 미국의 특성상 메이젤에게 상담을 받는데도 비슷한 정도를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 혹자는 상담 "따위에" 그런 큰 돈을 쓴다는 것 자체를 낭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창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창작 고통의 늪(?)"에서 건져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복음(??)이자 매력적인 제안이다. 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예술가를 상담해왔고 지금도 상담하는 에릭 메이젤이 자신의 상담 내용을 책으로 엮어낼 생각을 했다는 것은 쌍수들고 환영할 일일 뿐만 아니라 고개 숙여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아이디어들에 파묻혀 오히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창작을 미루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 평가받고 알려지는 것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하는 사람, 정리할 수 없는 주변 환경 때문에 창작 활동에 몰입하지 않는 사람,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 부문을 막론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물론 각자의 환경과 성격, 특성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결국은 다 비슷비슷한 고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예술가인가보다.
먼저 자신의 상황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자신의 목표를 메이젤에게 전달하면, 메이젤은 그 목표를 향후 2주일동안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묻고 조언을 해준다. 2주일 동안 클라이언트는 자신의 생활을 가능한한 자세히 기록하여 되돌아보고, 메이젤은 그것을 토대로 또다시 3주 동안의 계획 세우기를 격려한다. 이 책에서는 첫 2주 동안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3주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저자가 이미 머릿말에 언급했던 내용도 있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신기한 부분이 몇 개 있었는데,

1. 저자의 글(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은 놀랄만큼 적다는 것.
2. 대부분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일지를 기록하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3.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방향이 (서로 다른 성격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
4.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2주일간의 일지를 기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태어난지도 이제 만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은 육아에 정신이 없어 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이제 슬슬 육아도 안정되어가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전쟁이지만) 하나하나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10개월동안의 공백은 나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조차 망각하게 했던 것 같다. 하루종일 음악을 듣지 않아도, 오랜 시간 곡을 쓰지 않아도, 선율을 떠올리지 않아도, 건반을 연주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생활. 물론 엄마가 되었기에, 집안일이 바빴기에, 아이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그랬다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내 자신을 속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육아는 단지 "핑계"임을 말이다. 예술가라는 것은, 예술을 한다는 것은 상황이 맞춰주어서가 아니라, 여건이 되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물론 예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아, 참 그 때는 창작하기 좋았는데" 추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지금 상황이 달라졌다고, 미치도록 피곤하고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아예 창작을 하지 않는다면, 후에 아들이 커서 학교에 들어가고 내 시간이 생겨도 창작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시간이 남아서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니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인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한번 깨닫고 나니 갑자기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하다.


창작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권한다. 굳이 자기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큰 영향과 힘이 되어줄 그런 책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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