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아기엄마가 된 이후로 소설책을 읽을 여유는 저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다른 아기들보다 조금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들 덕분에 하루에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평균 두시간 안팎이 되었다. 그나마도 간신히 아기를 재우고 힘든 탓에 멍하니 앉아있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기 일쑤지만.

하지만 <나오미와 가나코>를 소개하는 한 문장이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읽는 내내 페이지를 덮을 수 없었다' 라니! 문득 예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들이 생각나 "어머, 이 책은 꼭 읽어야 돼!" 하는 마음으로 급히 손에 넣은 책이다.


책을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소설은 많이 읽지 않았었다. 그저 세계명작전집 정도? 그러다가 5년 전 한국에 들어와 한국어 공부도 할겸 도서관을 서성이다가 그 유명한 <1Q84>를 우연히 읽기 시작했다. 그 때 몸살감기에 걸렸었던 거 같은데 각각 600쪽이 넘는 세 권의 책을 이틀인가 삼일만에 미친듯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머리가 아프고 눈이 따가웠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왜냐고? "읽는 내내 페이지를 덮을 수 없었으니까".
그 후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들. 영화로 더 유명해진 <화차>부터 <이유> 그리고 <낙원>까지! 도서관에 있는 미미선생의 책은 다 읽을 심산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신랑과 함께 영화 시사회에 다녀오게 되었다. 일본 작가의 원작소설이 있다길래 관심을 가진 그 영화가 바로 <용의자 X>. 이렇게 히가시노 게이고까지 알게되어 그의 최신작인 <질풍론도>까지 찾아읽게 되었는데...

또다시 내게 그런 작가가 찾아와준것일까? 이렇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면, 다시한번 "읽는 내내 페이지를 덮을 수 없는" 스릴넘치는 시간을 기대하며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을 읽기 시작했다.


"차라리 둘이서 죽여버릴까? 네 남편."

굳이 내용을 읽지 않아도 이 짧지만 서슬이 퍼런 말 한마디에 이야기의 전개를 상상하게 된다. 책 제목이 두 여자의 이름인 것도 심상치 않았는데 남편을 "제거한다니". 도대체 두 여자는 어떤 관계일까? 등장인물 중 누구의 남편이 죽는걸까? 궁금증을 점점 커져만 갔다.

목차는 간단했다. 1) 나오미 2) 가나코.

서스펜스 소설을 읽을 때 꼭 자신과 해야 할 한가지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보지 않기"다. 하지만 <나오미와 가나코>는 굳게 한 약속을 어떻게 해서든 깨버리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목차조차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니 이젠 빨리 읽어버리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급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목차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이 소설은 전반부는 나오미의 시선에서, 후반부는 가나코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처음 이러한 구조를 알았을 때는 혹시 가나코의 시선에서 처음부터 이야기가 다시 전개된다든지, 나오미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다든지 하는 시덥잖은(?) 추리를 해보기도 했다. 스포일링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가 예상했던 (일차원적인) 반전은 끝까지 없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오미와 가나코>의 진짜 매력은 이 소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있을법한 일이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오미와 가나코의 관계나 가나코를 위한 나오미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나오미의 동기가 오히려 더 사실감을 극대화하는 것 같았다. 우리 중 누가 자신의 모든 행동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나코라는 트리거를 통해 나오미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순종적이고 겸손하며 고분고분한 백화점 직원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그것이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범위라 하더라도) 용감한 여성으로 거듭나게 되니 말이다.
가나코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미 한마리에게도 서운하게 하지 못할 것 같은 그녀 역시 스스로 운명을 바꿔보기로 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그동안 주위환경과 기대에 눌려 자신을 감추고 살던 두 여자의 각성의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일반적인 사회의 범주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생존)본능 말이다.

여러 면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같은 사람일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닮았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끌리고 서로를 훌륭하게 보완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가 작가 역시 일어난 사건 중심으로 전개하기보다는, 이것이 그녀들의 "성장일기"인양 그녀들에게 일어나는 내적 그리고 외적 변화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그녀들의 고민과 갈등,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이 처한 현실과 벗어나고픈 굴레는 읽는 내내 몰입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고 주인공과의 동일시화를 더욱 극대화했다. 별 장치 없이도 손에 땀을 쥐게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문이 아니었을까? 저 멀리 완벽히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 같았으면 편안하게(?) 읽을 수도 있었을텐데.

500쪽에 육박하는 책이지만 하루 안에 어마무시한 속도로 다 읽을 수 있었다. 아기가 잠깐 자는 낮잠 시간을 틈타 읽은 것을 생각해보면 결코 보통일이 아니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읽는 내내 페이지를 덮을 수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진부하리만큼 뻔한 스토리를 이렇게 박진감넘치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 놀랍기까지 했다. 하긴 그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놀라운 역량이겠지만 말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마지막으로 "작가도 끝까지 고민한 결말이다"고 밝혔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까지도 벼랑 끝으로 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결국 어떻게 해석할지는 독자 개개인이 자신을 위해 결정할 일이지만 남편을 죽인 (그것도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끔찍하게 죽인) 두 여인을 응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나오미와 가나코>가 가진 특별한 마법이고 말이다.


퇴근한 신랑이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묻자 새 책을 읽는데 너무 스릴이 넘쳐서 더운 날씨에 손발이 차가워질 정도였다고 말했다. 신랑은 자신도 읽어봐야겠다며 어떤 내용인지 물었다.

"여자 둘이서 남편을 죽이는 이야기야"

신랑은 뜻밖의 내용이었는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대답했다.

"응. 여보가 생각하는 그 내용이 맞아. 하지만 꼭 읽어봐. 읽는 내내 페이지를 덮을 수 없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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