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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장애 세대 - 기회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올리버 예게스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한국에서 13년을 살다 빈에서 다시 14년을 보낸 저와 같은 사람들을 독일어로 “Multi-Kulti”라고 부르곤 합니다. 여러 문화가 섞인 채로 성장기를 보내 어디서도 완벽하게 섞이기 어려워하곤 하죠. 저같은 경우만 해도 분명 한국 사람이지만 스스로가 한국 사람 같다고도, 오스트리아 사람 같다고도 느끼지 않으니까요. 가끔은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고… 정체성에 있어서만큼은 선뜻 이렇다고 결론짓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젊은 세대를 위로하는 “청춘서적”도 기성세대를 응원하는 자기계발서도 별로 자신의 이야기처럼 와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린 모두 이렇잖아요!”라고 저자가 말할 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요. 가끔은 정말 “나는 도대체 어디에 속할까?”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굳이 어딘가에 분류되어야겠다는 욕구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가끔 위로가 되기도 하잖아요.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얼마 전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박장대소하고 때로는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뜨끔하기도 했던 책, 마치 간지러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듯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준 책, 유럽 사회의 젊은 세대들에게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 신간 <결정장애 세대>를 함께 만나보시죠!

모든 것이 가능한 세대 Generation Maybe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그 어떤 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변하고 있다. 달라진 상황에 적응할 겨를조차 없이 또다시 새로운 상황이 밀려오고 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기존의 경계는 흐려지고 새로운 경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게 가능하단다. 모든 걸 가질 수 있단다. (…) 말은 쉽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31 페이지)
원제인 “Generation Maybe”는 사실 이 책의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격동적인 유년기를 보내고 인류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방황하는 세대. 조금 더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198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아날로그의 잔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디지털에 익숙한, SNS가 오프라인 인맥보다 가까운 세대. 결정적으로 Yes/No를 말하기를 꺼려하는 Maybe 세대. 저자는 이 세대를 가리켜 자기 결정을 포기한 “결정장애 세대”라고 정의합니다. “장애”라니.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저자의 설명을 듣다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저 스스로의 이야기인양 경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미처 따라가기도 전 많은 것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지금, 그러한 순식간의 변화에 익숙해져 오히려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글쎄” 혹은 “어쩌면”을 습관처럼 반복하는 세대.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작은 것 하나도 이루기 힘들어하는 세대.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결정장애 세대입니다.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챕터를 걸쳐 결정장애 세대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굳이 학술적으로 분석한다던가 가르치려는 말투가 아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독일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곁들어진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크림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음식을 먹듯 책장을 술술 넘기게 될 것입니다.
유럽 사회 특수의 결정장애 세대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다른 분들도 저만큼이나 이 책을 공감하며 즐겁게 읽으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와는 거리가 있는 유럽 특유의 문화와 사회가 전제되어 있다보니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예컨대 실업수당 부분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복지가 잘 되어있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굳이 일을 하지 않고 실업수당을 받는 쪽을 택하곤 합니다. 전문직이 아니다보니 최저임금으로 일해야 하는데 오히려 집에서 놀고 먹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실업수당이 더 큰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많은 독일인들이 이 문제로 속상해하며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복지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못하는 (혹은 일하는 자 조차 먹지 못하는) 청년들은 어쩌면 이런 복지 시스템을 마냥 부러워할 수 있겠지만 확실히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법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니까요.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정직하게 일하며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는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게 개방적인 성 문화와 사회적 운동들도 한국 정서와는 맞지 않아 이 책의 내용이 그저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책에 등장하는 채식주의 운동이나 학생들의 정치 활동, 미래 설계등은 우리나라와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읽으면서 그동안 저 자신이 왜 유독 한국에 들어와 “붕 뜨는” 느낌을 받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답니다. 성형수술이나 멋진 남자 혹은 연예인, 명품 가방과 옷 그리고 외제차와 집에 관심이 없었기에 대화에 끼기조차 어려운 때도 있었으니까요. 마음먹고(?) 드라마를 보려고 해도 말도 안되는 설정과 억지스러운 전개에 도저히 집중이 안되고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기만 하니 어떤 드라마가 사회적 이슈가 될 때면 아예 뉴스조차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곤 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라났기 때문에 한국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적어도 일반적으로는)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이 책을 읽는 동안 만큼은 예전 집에 온 것마냥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답니다.
당신은 결정장애 세대입니까?
그렇다고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유럽 청년들에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무관심과 특정 기업에 대한 충성 혹은 배척, 기본 상식의 부재로 인한 괴리감과 블로그 등의 새로운 플랫폼 사용에 있어서 유럽과 우리나라는 상당히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한국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대부분 페이스북에 회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아이디어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조차 셀카를 찍고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 활동을 하며 행동을 설정한다는 저자의 말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확실히 인터넷이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긴(?) 하나보네요.
다사다난했던 20대가 가고 어느새 저도 30대에 들어섰습니다만 스스로가 30대라고 인식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예전에 비해 “청년”으로 구분되려 하는 나이층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네요. 어렸을 때 30대를 보면 중년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는데 막상 저 자신이 30대가 되었는데도 저는 물론 주위 사람들도 전혀 “중년”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요즘은 40대가 되어서도 중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보니 30대는 마치 20대의 연장선으로 느껴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저는 “결정장애 세대”인 것 같습니다. 결정을 내리는데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마무시하게 변하는 시대에 청춘을 보내며 격동기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세대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뭔가 처음으로 어떤 부류에 속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도 나옵니다.
저에게는 참 즐거운 시간이었고, 저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권 안에서 어린시절 혹은 청소년기를 보내신 다른 분들도 쉽게 공감하며 웃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해지네요!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공감하며 저자의 매력에 푹 빠지실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무튼 오랜만에 순식간에 읽어내려간 즐거운 시간이었던지라 감사할 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유쾌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