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 전진하는 진실 위대한 생각 시리즈 2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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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많은 비극과 참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왔지만, 지난 4월 16일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아버린 수많은 생명들 만큼이나 가슴에 깊이 파고든 사건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탄식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못난 자화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사건의 전말보다도 더 우리를 좌절하고 분노케 했던 것은 하나의 "진실"을 두고 난무했던 여러가지 억측과 "카더라 통신", 그리고 이 일을 기화삼아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많은 이들의 저질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끔찍한 현실보다도 더 끔찍했던 사후의 여러가지 해프닝과 사건들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마저도 잃어버리게 했으니까요.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더이상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하게 된 혼돈의 시대. 지난 한달 반간 우리가 견뎌온 시간입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읽게 된 책이 있습니다. "대지"의 작가로 잘 알려진 에밀 졸라의 특별한 글을 모아 새로이 발간된 <전진하는 진실(은행나무 출판사)>이었는데요,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드레퓌스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만큼 발간 소식을 듣자마자 이 책은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답니다. 583 페이지의 책을 읽는 동안 동시에 세월호 사건과 그 후의 셀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서 마치 한 권의 예언서(?)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는데요,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 생각을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면밀하게 역사적 사건을 연구하고 되돌이켜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말하다



대통령 각하, 진실은 이처럼 단순한 것입니다. (212 페이지, "나는 고발한다…!" 중) 

드레퓌스 사건은 사실상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몰려 수 년동안 고통 속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둘러싼 프랑스의 정치적 스캔들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전반에 펼쳐져 있던 반유대감정으로 인해 드레퓌스 대위는 제대로 된 재판도, 변호의 기회도 갖지 못한채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섬으로 유배당하게 됩니다. 문제는 진짜 간첩이었던 에스테라지 소령을 감싸려던 세력과 드레퓌스에 대한 억지 판결을 정당화하려는 세력 모두 당시 프랑스의 막강한 정치 세력이었기에 그의 무죄는 정치적 거물들의 유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힘없는 대위 한 사람이 대항해야만 하는 적은 너무나도 거대했기에 그의 무죄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조차 그가 다시 세상에 나와 빛을 볼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의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진실을 주장하고 요구하고 나섰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에밀 졸라입니다. 


존경받는 작가였던 에밀 졸라는 우연한 계기로 드레퓌스 사건을 접하게 되고, 그 이후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한시도 펜을 놓지 않습니다. 자신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통해 진실을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 사건이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던 것이죠. 물론 이같은 행동에는 엄청난 결과가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작가로써의 삶이 한 순간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은 물론 사회적 거물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재판을 받는 등 파란만장한 시간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가 발표한 1898년의 <나는 고발한다…!>로 금고형을 선고받기도 하고 4년 뒤 의문의 가스중독으로 사망할 당시에도 타살 의혹이 제기되는 등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진하는 진실>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나는 고발한다…!>를 비롯하여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집필한 수많은 기고문과 공적, 사적인 편지, 인터뷰들을 모은 것으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연대별 사건 기록일지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졸라가 사망한 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어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치 장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발단서부터 그가 다시 풀려나 오명을 벗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감내하고 그를 위해 싸웠는지 읽고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에밀 졸라는 어떻게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이렇게나 확신할 수 있었을까?"였습니다. 드레퓌스 대위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더라도 사건의 전말과 관련인물(그리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했는지까지)에 대해 세세하면서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의아했고, 자신이 직접 보지 않은 (전해들은) 사실에 대해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을까 놀라웠습니다.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그의 무죄를 주장한 이후로 졸라의 삶 역시 180도 변화했습니다. 정치적 우세에 있었던 반드레퓌스파의 계속적인 공격과 살해 위협을 감내해야 했고, 급기야 영국으로 망명하자 가족들과 하인들마저 그들의 표적이 되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졸라는 반드레퓌스파에게 제거해야 하는 반동분자일 뿐만 아니라 - 어쩌면 - 드레퓌스보다도 더 위협적인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1898년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공개된 뒤 졸라가 무죄판결은 받지 못했었어도 대통령의 특별 사면을 받게된 것 역시 졸라와 무관하지 않을테니까요. 드레퓌스 사면 이후로도 막강했던 반드레퓌스파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졸라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구석에 틀어박혀 오로지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하는 작가이자 고독한 이야기꾼일 뿐입니다. 나는 선량한 시민은 조국을 위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그것이 바로 내가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제 나는 책들 속으로 다시 파묻히고자 합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임무는 끝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완수했으며, 이제 결정적으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자 합니다. (386 페이지, "공화국 대통령, 무슈 루베에게 보내는 편지" 중)

1900년 12월 말 기고된 이 편지에서 졸라는 더이상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기고하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실제로 이 글은 <전진하는 진실>에 수록된 졸라의 마지막 기고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졸라는 의문의 가스 중독 사고로 목숨을 잃고, 그의 사랑하는 부인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의 아들은 마지막까지도 졸라가 정치적으로 살해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비극을 안겨주면서까지도 지키고자 했던 "진실". 졸라가 죽은지 4년 뒤인 1906년 드디어 알브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다시금 육군에 복직하여 소령으로 승진한 뒤 제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그는 1935년 지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일반 군인들처럼 생활했다고 합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기록될만큼 충격적이었던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참 아이러니한 결말이 아닐까 생각했씁니다. 자신을 그토록 끔찍한 고통에 처하게 한 국가를 위해 끝까지 목숨을 바쳐 일했으니까요. 



정의는 없다? 진실은 언제나 저 멀리에…


세월호와 함께 진실마저 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버린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저것만은 분명 진실이겠지" 믿었던 것마저 우리들을 철저히 배신하면서 실망과 한숨은 분노로 변해갔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던 19세기 말의 프랑스 역시 지금의 우리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치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졸라가 우리들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 같았습니다. 졸라는 대중의 관심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언론들에게도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는 마치 발정이라도 난 것 같은 저열한 언론이 그들의 추잡스런 신문을 팔기 위해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그들의 불건전한 호기심을 자극해 돈을 벌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을 똑똑히 보아 왔다. 그런 신문들은 나라가 평온하며 건전하고 강해지는 즉시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121-122 페이지, "조서" 중)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신조어 중 "관종(관심종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명 "관심병 환자"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은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이들이죠.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나 관종이 많았는지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지도를 올리려는 정치인들이나 사건을 이용해 매출을 올리려는 기업들은 물론 전혀 무관해보이는 일반인들마저 단지 "관심"을 받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을 만드는 것을 보면 탄식마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았더라도 의혹과 음모를 환영하는 다수의 무분별한 "퍼다 나르기" 역시 그들 못지 않은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죠. 

문제는 이렇게 거짓과 억측이 난무하다보니 한 줄기 진실마저도 오염되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로써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거짓과 함께 진실 역시 묻혀버리고 있지 않을까요? SNS와 발달된 기술로 인해 더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믿었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기술의 눈부신 발전마저 진실을 가리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졸라의 다른 글에서도 지금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이 왜곡당하고, 노망이 났다거나 매수를 당했다는 오명을 쓰지 않고는 정의를 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거짓말이 넘쳐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진지한 신문들에 의해 심각하게 재생산되며, 나라 전체가 광기에 휘둘리고 있다. (99 페이지, "조합" 중)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은 먼저는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졌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민주주의를 위해 꽃다운 청춘과 인생을 바친 우리들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만큼이나 평범한 시민이었을 그분들이 어떻게 그런 거대한 사명과 책임감을 가지고 막중한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놀랍고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직접적으로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우리들은 너무 쉽게 좌절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비판하거나 탓하기만 좋아했지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바꾸고 개선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는 때가 아닐까요? 누군가를 욕하는 것은 참 쉬운 일입니다만,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더욱 좋은 방향으로 돌리는 일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고 힘겨운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진 않더라도 지금의 우리가 꼭 해야할 일은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19세기 말의 졸라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21세기 초의 우리들에게까지도 간곡히 부탁하는 말일 것입니다.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그대들의 아버지들이 겪었던 고통과, 지금 그대들이 누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던 끔찍한 전투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지금 그대들이 자유롭다고 느끼며 마음대로 오갈 수 있고, 거리낌 없이 언론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어떤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들의 아버지들이 그 모든 것을 위해 자신들의 지혜와 피를 바친 덕분인 것이다. 독재 정권하에서 태어나지 않은 그대들은 매일 아침 주인의 군홧발에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독재자의 칼날과 사악한 심판자가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철퇴를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의 아버지들에게 감사하며, 거짓에 환호하거나 무지한 폭력과 광신자들의 불관용과 출세주의자들의 탐욕에 장단을 맞추며 그들과 함께 춤추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길 바란다. 이제 독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147 페이지,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 

깨끗한 눈처럼 새하얗던 책 표지가 이곳 저곳 들고 다니며 읽으면서 점점 때가 타고 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받았을 때의 깨끗함은 사라지고 페이지 곳곳에 까만 때가 꼈습니다. 책을 지저분하게 보는 편이 아닌데 왜 유독 이 책만 이렇게 더러워졌을까 속상하려던 찰나, 이 책이 아무리 더러워진들 그 안에 담겨진 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 담겨진 강력한 메시지의 위력이 덜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실도 이와같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의 입과 손을 거쳐 때가 묻고 처음의 순결한 자태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그 "진실함" 만큼은 바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세월이 지나 결국 많은 사람앞에 드러났을 때에 그 힘을 여과없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에밀 졸라가 주장한대로 속도는 조금 느릴지라도 "전진하는 진실"임을, 간절하게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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