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파리 주소록
샹탈 토마스 지음 / 낭만북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그토록 유럽에 오래 살았건만 파리에 방문한 것은 고작 세 번. 그것도 공연과 콩쿨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잔뜩 흐린 날씨에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가 먼 발치에서 에펠탑을 구경한 것을 빼면 제대로 관광조차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파리의 CDG 공항을 방문한 적은 많아도 정작 이 아름답고도 다각적인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알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야 후회가 되네요.

마지막으로 파리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빈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였는데 경유지인 파리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서울행 비행기가 이미 떠나버렸다는 엄청난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답니다. 폭설이 내릴 때면 상습적으로 연착과 불발이 난무하는(?) 파리 공항이었기에 이미 저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요.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다음 서울행 비행기가 무려 다음날 아침에 출발한다는 것이었는데, 비행사에서도, 공항에서도 이 많은 사람들에게 숙소나 쉴 곳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결국 공항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던지 비싼 숙박료를 내고 공항 근처 호텔에서 지내라는 답만 돌아왔고요.

울기 직전이었던 그 때 다행스럽게도 파리에 사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감사하게도 하룻밤을 보낼 장소를 찾게 되었습니다. 공항철도와 지하철을 타고 향하는 길이 어찌나 어둡고, 음침하던지… 마치 "파리"라는 감옥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더군요. 더군다나 신랑과 장거리연애중이었기 때문에 너무 보고싶은 얼굴을 하루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잔혹하게까지 느껴졌답니다.

그렇게 그날 밤을 보내고 다시 일어난 아침, 이제는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행복하고 가뿐했답니다. 10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택시요금도 그다지 개의치 않을 정도로 말이죠.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야 파리 시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는 그토록 음산하게만 보였던 작고 큰 골목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워보이던지! 머릿속에는 아코디언이 연주하는 파리 왈츠가 들려올 정도로 택시 안에서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답니다. 그제서야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기왕에 이렇게 된 것, 제대로 구경이나 한번 해볼걸.'


아직까지 파리와 친하게 지낼만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조금 더 특별하게 읽고 싶었던 책이 있습니다. 패션을 책임지는 디자이너 샹탈 토마스가 말하는 파리지엔의 "Hot Place". 그녀만의 아주 특별하고 사적인 주소가 공개된 <그녀의 파리 주소록>의 발간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 이 책은 읽어야해!'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요, 유럽에 있을 땐 잘 알지 못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이후 더욱 궁금하고 관심을 갖게된 파리의 패션 중심에 서있는 그녀가 우리에게만 살짝 알려주고픈 주소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기대가 되더군요. 샹탈 토마스의 <그녀의 파리 주소록>을 함께 만나보시죠!





지금 파리에 있다면 이곳에 가라


패션의 메카, 파리. 얼마전 무한도전에서 오직 "밀라노!"를 외치던 노홍철에게 패션의 열쇠는 밀라노가 아닌 파리로 넘어갔다던 디자이너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실 패션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기까지 한 제가 패션 트렌드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에 샹탈 토마스의 패션 감각에 있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뭔가 그녀의 패션을 동경해서 이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매력적인 도시 파리의 크고 작은 특별한 로케이션을 알고 싶었기에 읽기 시작했고, 이 책 역시 그녀가 자신의 패션을 논하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일상과 일탈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녀의 파리 주소록>은 "디자이너 샹탈 토마스" 보다는 "여자 샹탈 토마스" 혹은 "파리지엔 샹탈 토마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자주 방문하는 곳들, 좋아하는 곳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곳들부터 깨알같은 생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까지… 책을 읽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년동안 살았던 빈에 대해서 책을 쓰라고 한다면 저는 부담부터 될텐데 말이죠.


그렇다고 이 책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파리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파리 외곽에서부터 이태리, 뉴욕까지, 그녀의 사적인 주소들은 세계지도를 종횡무진합니다. 특히 그녀가 일상에 지쳐 힐링을 위해 찾는 조금은 은밀한 장소들까지도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지 않고, 느긋한 여유를 즐길 수 있어서 그녀가 사랑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공개되어버리면 너무 혼잡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굳이 다른 사람의 추천 때문에 어딘가를 가는 타입은 아니지만, 진심어린 애정과 한없는 사랑으로 소개하는 그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은 훌쩍 떠나고 있는 것 같아요. 


책의 마지막에는 지금까지 등장한 장소 중 94곳이 실제로 파리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알려주는 지도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 지도만 가지고 찾아가긴 어려울지라도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보았던 로케이션들이 파리 어느 지역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지 확인하는데는 충분합니다. Google Map에 주소나 상호명을 입력하여 Google Earth로 둘러보니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언젠가 파리에 가게 된다면 꼭 들르고 싶은 곳을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두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답니다.



읽는 눈도 보는 눈도 즐거운 책 


그렇다면 '지금 파리에 있지도, 갈 수도 없는데 이 책이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방문할 수 없지만 핫한 세일이 벌어지는 아웃렛 전단지만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실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어째서 낭만북스에서 이 책의 발간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조금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어도 잘 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몇 천 킬로 떨어진 파리의 주소록이라니요.

하지만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의문들은 조금식 사그라들었습니다. 물론 직접 방문할 가능성은 낮다 하더라도 책을 펴드는 순간 감각적으로 구성된 페이지와 크고 작은 사진들을 보면서 점점 파리의 거리에 빠져들게 될테니까요. 


물론 이 책에는 목차가 있습니다. 프랑스 부제인 "De A à Z"에 걸맞게 목차는 A부터 Z로 시작하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고요.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딱히 목차를 생각하게 되지 않는 것은 얼핏 보면 산만하게 이것 저것을 소개하는 듯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답니다. 실제로 주제가 되는 단어와 실제적으로 소개하는 글과 장소가 그렇게 큰 관련이 있어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요 (역시 디자이너의 사고는 따라가기 어려운 걸까요?). 

때문에 읽다가 딱히 쉴 곳(?)도 없었고,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차적으로 읽는 것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했답니다. 마치 멋지게 정리된 잡지를 읽듯 처음에는 사진을 둘러보고 그 다음에는 사진에 대한 설명을 읽고, 마지막 지도에 표시된 리스트에서 다시금 그 장소에 대한 페이지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만약에 패션이면 패션, 휴양지면 휴양지, 레스토랑이면 레스토랑 등 "분야별로" 정리되어 있었다면 얼마나 매력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샹탈 토마스의 삶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저 역시 "나만의 사적인 주소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주소록에 담긴 인생의 메시지


우리나라의 이른바 "명품패션"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세계적으로 (사실상)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비단 상대적 박탈감이나 가지지 못한 자들의 변명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이 "이것이 너무 마음에 들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 "사야겠어"가 정상인데, "이것은 유명 브랜드의 것이야" -> "사야겠어" 혹은 "이것을 사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부러움을 받겠지" -> "사야겠어"로 진행되는 과정 자체가 참 병든 사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유럽에 살면서 제가 어떤 물건을 사는 기준은 "내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브랜드건 그렇지 않건, 중고건 새것이건 그닥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조금 낡은 것이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중고 시장에서 구매할 때도 있었고, 완벽하게 새것 보다는 추억이 담긴 물건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곤 했죠. 하지만 한국에 들어오고 난 뒤 저의 생각도 참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네 나이라면 이정도는 가지고 다녀야지" 혹은 "이정도 입지 않으면 남들에게 무시받아"라는 공공연한 가치관을 접하게 되었는데,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사실 눈을 감고 귀를 막지 않는 한 영향받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더군요. 심지어는 브랜드를 상중하로 나누어 그것이 마치 자신(혹은 타인)의 스펙인양 판단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과연 저 사람들은 상표를 떼어버려도 저 제품을 구매할까'하는 의문이 들었고요.


샹탈 토마스의 글을 읽다 보면 패션은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로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실제로 패션계에 종사하고 있고 그것으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있어서 패션은 마치 어린 소녀가 꿈꾸듯 바라보는 로망의 세계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얼마짜리 상품인가" 혹은 "얼마나 유명한 브랜드의 것인가"가 아닌 "이것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가" 혹은 "나는 얼마나 이것을 좋아하나"의 세계인 것이죠.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고가 브랜드로 휘감아 걸음을 걸을 때마다 "억, 억" 소리가 난다 하더라도 정작 그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닌 명품에 있다면 누가 주인공이 되는 것일까요. 샹탈 토마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패션은 무엇이고, 나에게 어울리는 패션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녀 자신을 명품으로 만들어줄 패션을 찾은 듯한 모습이 참 부러웠고요.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투자에 너무도 인색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막상 투자를 한다 하더라도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자격증을 따거나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명품을 구입하는 것이 대부분이고요. 자기 자신이 좋아하고,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샹탈 토마스가 (몸매 관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디저트를 즐기면서 일상의 행복을 느낀다던가 필요 이상의 레이스를 수집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파리 주소록>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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