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있는"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읽었던 소설의 작가들은 이미 몇 십, 몇 백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리는 기분"을 전혀 알지 못했죠. 2011년 한국에 귀국하고 난 뒤 교회 도서관을 섭렵(?)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일본 소설로 현대 소설에 입문하게 되었답니다. 책 사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면서도 내심 소설을 구입한다는 것에는 이상하리만치 인색한 저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준 셈이었고요.


그렇게 해서 접하게 된 무라카미 하루키와 통칭 미미여사님이신 미야베 미유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히가시노 게이고를 <용의자 X의 헌신>을 통해 알게 되었답니다. 치밀하고 심각하지만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는 그의 문체와 스토리에 완전히 반해버렸어요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용의자 X>도 정말 재미있게 보았답니다!). 때문에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이후 그의 새로운 장편소설 <질풍론도>의 소식은 더욱 기뻤는데요, 감사하게도 발매하자마자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겨울이 가기 전 꼭 읽어야 할 추리소설, <질풍론도>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질풍 -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먼저


방문하는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아름다운 시골의 한 스키장.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그곳에서 사는 주민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인류 최대의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돈에 눈이 먼 한 남자의 욕심으로 어마어마한 치사율과 전염성을 가진 탄저균이 설산 어딘가에 숨겨지게 된 것이죠. 빠른 시간 내에 회수되지 않으면 눈이 녹으면서 자동으로 온 지역에 퍼지게 될 수 밖에 없는 탄저균의 행방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완벽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고, 스키의 "스"자도 모르는 중년의 연구원 구리야바시는 엄청난 압박과 함께 회수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탄탄한 체력도, 대단한 용기도, 과감한 패기도 가지지 않은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어떠한 백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과연 의지와 노력만 가지고 수퍼 히어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그 때, 그의 위험천만한 여행이 시작됩니다.


바이러스와 설산, 그리고 테디베어라는 뜬금없는 조합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처음부터 쉴새없이 빠르게 전개됩니다. "질풍"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심지어 책을 잠시 접어둘 타이밍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잠시 읽다가 자야지"라는 생각으로 집어들었던 책을 두시간 반이 채 안되어 다 읽어버렸는데요, 긴장이 고조되면 될 수록 점점 더 숨가쁘게 읽어나갔던 스릴넘치는 경험이었답니다. 지구를 구할(?) 인물과는 거리가 먼 구리야바시와 아들 슈토, 우연한 기회에 그들을 돕게 된 네즈와 치아키까지 네 사람이 탄저균에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탄저균의 행방은 점점 묘연해지고, 의외의 인물들의 개입과 활약으로 사건은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악화되고 마는데, 그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하고 탄탄해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14년동안 오스트리아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스키를 타보지 못한 제가 이렇게 읽었으니, 스키를 즐겨 타시는 분들이라면 더욱 공감하고 상상하면서 즐겁게 읽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책 첫장에 적힌 히가시노 게이고의 친필을 보고는 사실 좀 놀랐답니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나 자신도 놀랐다.

- 히가시노 게이고


와우. 도대체 작가가 자신있게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어떤 책일까 궁금해지더군요.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확실히 그럴만하다!"고요. 탄탄한 스토리와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 그리고 시종일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토리에 끝까지 안심하지 못하고 읽을 수 있었으니, 정말 대단하고도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론도 - 돌고, 돌고, 돈다?


음악용어인 "론도(Rondeau, Rondo)"에는 계속적으로 다시 돌아오는 "후렴(Refrain)" 부분이 있습니다. 론도의 테마이기도 한 이 주제 부분은 길고 짧은 삽입부를 중간에 두고 계속하여 반복되는데요, 대부분 론도 형식의 곡은 춤곡에서 유래한 것이라 모두가 함께 추는 부분(테마)과 한 커플이 추는 솔로 부분(삽입구)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소설 제목이 무척이나 직접적이고 소설의 주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질풍론도>의 의미는 조금 모호합니다. 한겨울,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 눈길을 헤쳐나가는 "질풍"이야 그렇다 하지만 "론도"는 도대체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지 소설을 읽기 전부터 참 궁금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음악적 용어인 "론도"의 의미라고 확신했지만 소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류 최악의 감염사태를 막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생소하고 위험한 길에 나선 연구원 구리야바시와 그의 아들 슈토. 끈끈한 가족애는 커녕 서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이 부자의 아슬아슬한 모험을 함께하다보면 소설의 제목이 더욱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합니다. 과연 작가는 이 제목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치명적인 탄저균 사냥이 무르익을 수록 어쩌면 탄저균과 그에 대한 공포는 소설의 메인 테마가 아닌 보조장치 정도로만 느껴집니다. 오히려 이 탄저균은 (실제로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단지 그 존재와 위험성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속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많은 것을 꺼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탄저균이라는 극적인 장치가 없었다면 아무도 인정하거나 언급하지 않을 그런 것들 말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엇갈린 욕망과 사명. 자칫하다간 모두가 패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주 의외의 "악역"입니다. 주인공격인 구리야바시가 수퍼히어로와 거리가 먼 만큼이나 전형적인 악당 캐릭터와 거리가 먼 이 "악역"의 등장과 전개로 인해 스토리는 더욱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요, 궁금해지셨다면 꼭 <질풍론도>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론도"의 의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저런 조사를 해보았는데, 독일어권에서는 "론도"가 배의 회항 혹은 선회(방향을 바꿈)를 뜻한다고 하더군요. 사실 독일어권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사투리격이라 과연 작가가 이 의미를 생각하고 제목에 사용했을까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후렴이 반복되는 음악용어 "론도"보다는 탄저균이라는 어마어마한 위험으로 인해 인생의 노선이 바뀌게 된 구리야바시와 슈토, 네즈와 치아키를 생각한다면 이쪽이 조금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질풍론도 - 겨울이 가기 전 꼭 읽어야 할 한 편의 추리소설


소설 리뷰를 쓸 때마다 고민하는 것이 과연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괜찮은가"입니다. 어떤 분들은 소설을 읽기 전 많은 정보를 읽기 원하시기도 하지만, 다른 분들은 필요 이상의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참 싫어하시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에 속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들께 이 소설을 권하고자 할 때면 "그저 좋으니까 그냥 읽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되곤 합니다. 


오늘도 눈이 한참 내렸습니다.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인 것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워보이는데요, 사실 사상 초유의 카드3사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전혀 평화롭지 않은 하루를 보냈답니다. 은행은 걱정을 한가득 안고 카드를 해지하고자 하는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하루종일 모든 ARS 전화와 콜센터, 그리고 홈페이지는 마비되다시피 했으니까요. 뉴스에 알려진 것은 겨우 하루이틀이지만 이 일이 일어난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일이 터져버렸다니, 뭔가 <질풍론도>와 일맥상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하얀 눈이 온통 뒤덮인 창밖을 다시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질풍론도>가 이상하리만치 재미있는 것은 그 전개가 너무 현실적이어서가 아닐까하고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버렸지만 소설은 그 "어마어마한 일"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에는 "과연 지금 위급상황 맞아?" 할 정도로 유머러스하게 진행됩니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꼭 그 일만 생각하지 않는 우리 현실과 참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아요.


눈의 계절이 끝나기 전에, 스키장에 갈 여유가 아직 없었다면 <질풍론도>로 그 아쉬움을 달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장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흡입력있는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한시라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선사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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