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운규 살아 있는 역사 인물 5
조희문 지음 / 다섯수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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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중반부만 접어들면 결과가 뻔히 보이는 전개와 답답하기까지 했던 신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유럽에서 자라서일까 유머 코드도 잘 맞지 않았고 코미디나 연애물은 어린 제가 보기에도 점 유치했기 때문에 딱히 마음을 붙일만한 장르를 찾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한국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했던 적은 기억하기론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오랜 비엔나 생활이 지나니 한국 영화가 달라졌습니다. 가끔 독일 방송에서 한국 영화를 해줄때면 어줍잖은 번역에 괜시리 열을 내곤 했는데 (현지인 친구들이 그로 인해 한국 영화 자체를 가볍거나 실없이 여길까봐였죠)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더니, 어느새 세계 영화 선진국들과 경쟁할만한 실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나 독일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와 감독들을 언급하며 찬사를 쏟아낼 때면 괜히 제가 상을 받는 것마냥 으쓱했던 기억이 나네요.


정작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의 문화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닌데요, 관심을 가지고 직접 알아보지 않으면 접하기 힘들 정도로 베일 속에 가려진 부분도 참 많다고 느낍니다. 국악이 그랬고, 한국 영화 역시 마찬가지고요. 지금 우리가 이만큼 발전된 환경에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일생을 바쳐가며 희생한 많은 분들의 피와 땀의 결실인만큼 우리 문화의 뿌리와 그 발전사에 대해 연구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반가운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지난 10일 발간된 아주 따끈따끈한 책, <나운규 - 한국 영화의 개척자>를 소개합니다!




한국 영화의 뿌리를 찾아서


영화는 수많은 예술 장르 가운데 아주 특별한 장르입니다. 음악을 비롯해 미술, 무용 등의 다른 예술 분야는 그 기원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영화는 그 시작점이 분명합니다. "움직이는 사진"이 발명되고 영사기가 도입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즉, 새로운 기술의 발견과 발전은 곧 영화사의 시작과 발전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여타 예술 장르보다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역사의 한 부분 한 부분이 비교적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보전되어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우리가 의식하지도 않은 채 영화적 언어들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오랜 시간 영화인들은 보다 현실적인 촬영과 편집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두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가 시작된 곳이라면 지나갈 수 밖에 없는 단계였는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때는 1920년대. 영화가 자라나기 좋은 환경은 커녕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우리나라는 치명적인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가는 옥살이나 심지어 죽음까지 피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극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운규가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1937년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활동이 곧 당시 영화계의 활동이라고 할정도로 나운규는 배우, 감독, 제작자 등 여러 분야에서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 12년 동안 한 해 평균 두세 편의 영화를 만든 샘인데, 당시 영화계에서 그처럼 많은 영화에서 활동을 한사람은 나운규밖에 없었습니다. (11 페이지)


이 책은 한국 영화의 개척자로 불리우는 나운규의 삶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영화가 발견되고 발전되었는지를 돌아봅니다. 책을 쓰신 조희문 선생님은 현재 인하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영화학회 회장 등을 지내신 바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인 나운규의 삶을 통해 이 책은 우리나라에 어떻게 영화가 수입되었고 시작되었으며, 누가 어떻게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책은 연대순으로 되어있지만 몇몇 부분에서 잠시 나운규의 이야기를 멈추고 그 시대의 영화사 전반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한국 영화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영화의 기초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해놓았으므로 초보자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나운규의 삶과 그의 영화 인생


저도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유교 사상을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배우나 뮤지션은 그닥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광대"나 "딴따라"라고 비하하며 천대받곤 했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실용음악을 한다고 하면 어른들이 눈살을 찌뿌리는 것이 당연했고, 행여나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거나 배우자감으로 소개하기라도 한다면 잔소리를 면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나운규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기 그지없던 시대에 태어나 어떻게 배우가 될 꿈을 꾸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이미 성공한 영화배우가 있어 그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며 배워나가야 하는 시점에서 그는 어떻게 자신은 배우가 되어야겠고 영화를 위해 인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단하게 느껴지더군요. 


1926년 10월 1일 초연된 영화 '아리랑'을 통해 나운규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영향력 있는 영화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 생활이 순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에피소드가 비교적 잘 알려진 다른 위인전과는 달리 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소한 것이었기에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그의 삶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의 일생은 산 넘어 더 큰 산, 그 산 너머 더욱 더 큰 산이 연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 모든 고난들조차도 그의 영화를 향한 의지와 사랑을 꺾을 수 없었다는 것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의도치 않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비난을 받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으며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의 열정은, 그의 육신의 기력이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끝을 맞이합니다. 


나운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몸조차 가누기 어려웠고,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하면서도 다음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새롭게 구상한 작품은 <황무지>, 지친 몸을 이끌고 대본을 써 나갔습니다. 큰 눈은 더욱 커졌고, 몸은 가시나무처럼 여위어 갔습니다. 나운규는 마지막 힘을 몰아쉬면서 쓰고 또 썼습니다. 하지만 <황무지>는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1937년 여름, 나운규가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1937년 8월 9일 새벽 1시, 나운규는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69 페이지)


길을 알려주는 사람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던 그 시절. 영화의 무엇이 나운규를 그토록 움직이고 그 열정에 불을 지폈는지 읽는 내내 궁금했습니다. 선생이나 멘토 없이는 무엇을 시작하기조차 어려워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본의 기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애쓴 나운규 등의 영화인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한국 영화가 된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살아있는 역사 인물 나운규 


이 책은 다섯수레 출판사에서 선보이는 "살아있는 역사 인물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입니다.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통해, 그들이 남긴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역사 인물 평전"이라는 설명에 걸맞게 한 인물의 업적과 사회적 공헌을 토대로 그의 인생을 적어나가고 있습니다. 특별한 것은 이 시리즈에서 소개된 인물들은 세계역사가 아닌 우리나라 역사의 인물들인데요, 지금까지는 우장춘 박사와 실학자 박지원, 화가 이중섭 그리고 의사 허준의 평전이 발간되었습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앞으로 정약용, 김구, 한용운, 윤이상 등의 평전이 이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워낙 시리즈의 색이 분명하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어른이 아닌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을 읽는 느낌도 들었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문에 중간에 잠시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는데요, 뭔가 위인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미화시켜 "그러니까 그는 언제나 훌륭했고, 끝까지 훌륭했으며, 그래서 위인입니다"라는 옛날 위인전 스타일에 심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끝까지 큰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나운규라는 인물을 바탕으로 조금 더 세세한 내용을 다루었으면 하는 점인데, 영화인이나 매니아가 아닌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한 책이다보니 심화된 내용 자체가 시리즈의 취지에 어긋날 것 같았습니다. 즉, 영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거나 전공하시는 분들께는 조금 "수박 겉핥기" 식으로 끝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기꺼이 추천하고 싶은 것은, 그동안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베일에 싸여있던 우리나라 영화의 시작을 알려주는 몇 안되는 책이기 때문인데요, 이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영화이론과 분석학 출간 사업에 새로운 불이 지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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