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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회이명 - 영화 ㅣ 인문학 수프 시리즈 2
양선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3년 5월
평점 :
흔히들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합니다. 여러가지 예술 분야들이 필히 모여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영화의 특성은 영화가 발명된 이후로 영화를 사랑하고 만들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무궁무진한 영감과 기쁨, 좌절과 실망 그리고 희망을 주곤 했습니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지만, 영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를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이나 영화의 종류와 장르도 다양한데, 그렇기 때문에 한 영화를 보는 시선역시 천차만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00만 관객을 꿈꾸는 영화제작자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버라이어티"한 영화산업의 컨슈머들을 풍부하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가 대단한 관심사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취미로, 재미로 영화를 보던 사람들도 조금씩 영화에 빠지기 시작하면 영화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기 마련입니다. 난해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거장의 작품들이 왜 영화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각광받고 있는지, 어떤 작품이 시사하고 있는 바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파고들어가면 파고들어갈 수록 점점 더 원대해지는 것이 영화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상업적인 영화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영화들은 철학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서부터는 영화 세계의 기초가 되고 있는 철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곤 하죠.
여기 바로 이런 분들의 귀가 솔깃해질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용회이명"이라는 제목부터가 참 철학적인데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책날개에 적힌 설명을 읽을 때까지는 그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답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설명을 듣고 난 뒤에도 저자가 왜 굳이 이 제목을 선택했는지는 좀 더 생각해보야 할 듯 싶습니다. 용회이명 - "어두운 곳에서 빛은 빛난다". 영화와 철학이 만나는 그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겉표지 오른쪽 위의 적혀진 문구였습니다. "인문학 수프 시리즈"라니. 굳이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시리즈의 의도가 분명하게 전달되오는 느낌이더군요. 살펴보니 작가와비평 출판사에서 발간한 인문학 수프 시리즈는 모두 여섯 권으로 장졸우교 (소설), 용회이명 (영화), 이굴위신 (근간 고전), 우청우탁 (근간 문식), 감언이설 (근간 시속) 그리고 소가진설 (근간 근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언가를 수집하는데 딱히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리즈만큼은 한번 제대로 다 읽어보고 싶은 구성이더군요. 물론 그렇다고 "용회이명"이 그렇게 완벽하게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이 책을 소개하는 문구와 이 책의 내용이 아주 맞아떨어지지 않는데 가장 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은이인 소설가 양선규씨는 활발한 작품 활동과 함께 문학과 소설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텍스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만큼 영화에서 그야말로 줄과 줄 사이 (between the lines) 에 숨겨진 메시지에 대한 책이 아닐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인문학"이라는 대주제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니, 그동안 스스로가 부족한 철학 지식으로 인해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하지만 "용회이명"은 영화에 대한 분석이나 영화이론, 혹은 기술에 관한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바로 이 책을 읽기 전의 저처럼) 아쉬움이 많은 책이 될 것입니다. 일단은 한 주제에 있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깊은 내용으로 들어갈 수 있기 만무하고, 어떤 영화에 대한 통괄적인 고찰보다는 그 영화에서 저자가 느낀 하나의 테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주제에 여러 개의 영화가 소개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대부분의 챕터가 가장 흥미로워질 바로 그 때 여지없이 끝나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수 많은 영화들을 이렇게 정리하고 책으로 발간한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끝까지 읽고 난 뒤 마치 영화의 트레일러만 모아본 느낌이 든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특히 일반대중보다는 이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독자를 위한 특성이 강한 만큼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쉽네요.
그렇다고 용회이명 자체가 아쉬운 책이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분명한 기대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았다면 용회이명은 영화를 사랑하는 (특히 8~9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레퍼토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내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혹은 "아,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었을 수 있겠군" 이라고 혼잣말하면서 말입니다. "인문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글의 스타일 자체가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고 오히려 간결하고 읽기 편하기 때문에 "영화는 좋은데 인문학이라니 어려울 것 같아"라는 고민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정자세(?)로 읽기 시작했다가 편안한 자세로 읽기를 마쳤습니다. 오래전 영화들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그 영화를 소개하는 주제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어 즐거웠네요. 한가지 욕심이 있다면 언젠가 "용회이명"으로 시작한 영화에 대한 저자의 고찰이 조금 더 심화되어 다시한번 우리를 찾아와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아직은 뭔가 "트레일러"의 느낌이 남아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