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20세기 역사
수전 케네디 외 엮음, 이시은 외 옮김, 리처드 오버리 편집자문 / 지식갤러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초등학교 때 역사에 참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관심이 많은 것과 잘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지만). 선사시대부터 쭉 이어오면서 어떻게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는지 배우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는데, 여러가지 사진들과 자료들을 둘러보면서 그 시대를 가늠해볼 때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듯 두근두근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쉬운 것이 있었는데, 항상 선사시대부터 먼 과거의 이야기는 참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야기는 후딱(?) 지나가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를 배울 때도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이야기는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차근차근 배우다가 6.25서부터는 한 시간만에 훌쩍 넘겨버린다는 것이 어렸을 때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답니다. 6.25가 일어난지도 (그 때) 50년이 지났을 때인데, 어째서 그 50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몰아서 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작곡법을 배울 때였는데 가장 "중요한" 바로크에서부터 고전 그리고 초기낭만파에 이르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을 할애하다가 정작 19세기 말부터는 흐지부지 넘어가버리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죠. 작곡 뿐만 아니라 형식론, 심지어는 음악사까지도 특수한 과목이 아니고는 "현대"의 이야기를 듣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몇 백년 전의 이야기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대는 마치 베일에 싸인듯 신비로운 존재로 남는 듯 했습니다.

요즘들어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현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라는 "시간적인 관계"가 아직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 조심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의 일들은 그동안 충분한 연구도 거칠 수 있었고 많은 자료를 종합하여 가장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진행중인 "현대"에 들어서는 그런 "객관성"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테니까요.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정작 우리가 사는 "현대"를 파악하지 않고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아무리 잘해도 반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론"이 없는 현대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고찰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에서 배우는 풍부한 지식으로 현대를 비추어볼 수 있다면 무언가 이상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아쉬움과 소망을 가지고 있던 중 갑자기 다가온 너무도 반가운 책 한 권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제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라고 자신있게 선언하는 한 책. 그 내용과 자료에서부터 독자를 압도하는 "우리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20세기 역사" 입니다.




"역사와 제 2차 세계대전"의 저자이자 유명한 다큐멘터리 제작자 셀리 리건 (Sally Regan) 과 "과거로 떠나는 역사 여행",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의 저자 수전 케네디 (Susan Kennedy) 그리고 군사사 전문가 R. G. 그랜트 (R. G. Grant) 가 만나 탄생한 이 책은 그 저자들의 약력만 보아도 얼마나 탄탄한 배경 속에서 집필되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20세기를 빚어온 크고 작은 사건들을 수많은 사진들과 함께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물론 20세기가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폭력적이고 격동한 시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구촌에서 이렇게도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처음입니다. 또한 마치 나비효과처럼 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전 세계로 번져나가고 한 사람의 욕심과 야망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괴로워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10년 단위로 20세기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0년 간의 가장 중요했던 사건들의 연대표가 나오고, 그 후에는 대부분의 사건들에 대해 두 페이지씩 설명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무언가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나 일러스트가 아니라, 실제로 그 당시의 사진들과 자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건조한 몇 줄의 글로 읽었던 역사적 사건들이 얼마나 큰 파장을 가지고 왔는지 새삼스레 다시 느낄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에 정말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20세기 초반의 사람들의 모습은 생소하기 그지 없을 정도로 다르기만 합니다. 글로만 읽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그 때의 모습들을 수 많은 사진과 함께 다시 마주하면서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어린 시절 놀라운 사진들로 가득찼던 도감을 읽던 기억이 나더군요. 어른이 된 지금도 사진이 주는 감동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은 1950년 이후의 사건들도 그 이전의 사건들과 같은 인텐션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911테러 이후 지난 몇 년 간의 중요한 사건들은 (어떠한 이유에서던지) 많이 말을 아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클린턴 대통령 탄핵 사건이나 리만 브라더스가 무너져버린 글로벌 경제 위기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 우리 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한꺼번에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주요 사건들을 시간적 흐름과 사진 위주로 정리해놓은 책인만큼 구체적인 설명이 되어있진 않습니다. 아마 그것은 이 책의 취지와도 별로 부합하지 않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건을 가장 시각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디테일에 집중하다가 전체성을 놓치지 않도록 언제든 펼쳐볼 수 있는 참고서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것입니다. 이 책에서 본 것을 심화하기 위해 다른 역사 서적과 함께 병행해서 읽는다면 보다 본질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또 한가지 이 책의 큰 장점은 어른은 물론 어린이까지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입니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아이라도 여러가지 사진들과 그에 부합하는 짧은 설명들 그리고 인과관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흐름 등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교과서에서 배우는 건조한 역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그 장면을 함께 보며 공감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교육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채워넣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20세기가 (그 전의 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수 많은 사진 기록들을 남길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이점들을 충분히 사용하여 조리있게 엮은 저자와 감수자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네요. 80년대 이후에 더 많은 사건들이 함께 수록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 21세기가 되고도 13년이 지난만큼 앞으로 더 많은 연구의 결과물들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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