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노라 에프런 지음, 김용언 옮김 / 반비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오디션 열풍"은 10년이 넘도록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American Idol (엄밀히 말하자면 영국의 Pop Idol 이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시즌 1에서 Kelly Clarkson이 우승한 것이 2002년이니 올해 10주년을 맞았네요.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의 인기는 식어가기는 커녕 더욱 더 뜨거워져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중인 오디션 프로그램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니까요.

저는 관심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는것도, 에피소드를 챙겨보는 쪽도 아닙니다만 가끔씩 기회가 될 때는 흥미진진하게 시청하곤 합니다. 베스트 중 베스트만 입성할 수 있다는 본선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지역예선인데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니, 가끔은 이것이 방송을 위해 서로 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랍니다. 멋진 밴드와 화려한 무대, 스타일리스트를 통해 새로 태어난 참가자를 보여주는 본선 무대와는 달리, 예선에서는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무반주에 아무런 도움 없이 그야말로 "생으로" 자기 재능을 표출해야 하는 터라 참 난감할 때가 많이 있죠. 솔직히 현재 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 환경에서 공연을 해야 한다고 하면 제대로 실력발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해진 적도 있답니다.

아무튼 그렇게 여러 참가자들을 관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심사위원으로 빙의해 참가자들을 평가하게되곤 하는데, "에이~ 저 친구는 음감이 너무 부족하네" 혹은 "목소리도 괜찮은데 역시 가수감은 아니야" 등 혹평을 할 때면 노래 잘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스스로가 놀라기도 한답니다. 그 짧은 시간 짧은 노래를 잠깐 들려주면서도 비판의 대상이 될만한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

그러다가 상황이 180도 바뀔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같은 조건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시작하는 그 순간서부터 집중하게 되고 매료되는 그런 사람이 나타날 때죠. 시청자는 물론이고 화면 안의 심사위원들까지 숨죽이며 그의 노래를 듣습니다. 이미 "음정이, 박자가, 애드립이" 등의 잣대는 사라진지 오래고 그의 표현에 따라 이리저리 함께 파도를 타는 느낌! 심지어는 음정이 나가거나 목소리가 뒤집혔어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되는 그런 사람.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노래의 경우는 재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너무나도 나기 때문이죠. 아무리 피나게 연습한다 하더라도, 재능이 없이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노래는 두 가지다. 할 줄 아는 것과 할 줄 모르는 것. 중간은 없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어떻게 보면 비참하기까지 한 현실인데요, 노래에 미쳐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은 몇 년 몇 십년을 피가나게 노력했는데도, 갑작스럽게 피자배달하던 사람이 나타나 관객을 매료시키질 않나, 노숙자에서 수퍼스타로 변신하질 않나... 그렇게 보면 예술은 정말로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서론이 많이 길었네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 궁금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과 Kelly Clarkson이 도대체 오늘 소개할 책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제부터 설명드리려고 해요. 키워드는 바로 "능력 (ability)" 입니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재능과 동의어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노래와 마찬가지로 글을 쓴다는 것 역시 타고난 재능이 결정적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노력과 경험으로 글쓰기 솜씨를 향상시킬 수 있겠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을 따라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런 저런 잣대를 들이대며 비판하다가 갑자기 모든 잣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에세이를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로맨틱 코미니의 거장, 노라 에프런의 에세이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입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주름잡던 시나리오 작가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난 노라 에프런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어쩌면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쓴 작품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노라 에프런은, 우리나라에 그녀의 두번째 에세이집이 발간된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2012년 6월 26일 급성 골수성 백혈병의 합병증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나이, 겨우 61세였습니다. 이 책이 미국에서 발간된 것이 2010년이니 1941년생인 그녀가 만 59세에 출간한 에세이집입니다만, 그 내용을 읽어보면 환갑을 앞두고 있는 모습보다는 이제 청춘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푸념하는 중년의 여성이 떠오를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매력적인 작가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우리에게 또 한 권의 주옥같은 에세이집을 남겼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어렸을 때 그녀의 영화를 보고 울고 웃었다면 몇십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정말 궁금할테니까요.





한번 페이지를 펼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이 읽어가다가 결국은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버리는 책이 있습니다. 제게는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가 그러한 책들 중 한 권이었는데요, 노라 에프런의 인생 이야기나 그녀가 끊임없이 생각해온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공감하며 웃다 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려 아쉽기까지 했답니다. 시니컬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문체는 중독성이 있어 읽고 또 읽으면서 웃게 되더군요. 마치 엉킨 실타래가 단번에 풀리듯이 미끄러지듯 흘러나오는 그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실제로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테마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금세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하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하며 밑줄을 치고 별표까지 그리는 느낌이랄까요? 그러한 그녀의 글이 그녀의 영화 속 여주인공들의 모습과 묘하게 합쳐지면서,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노라 에프런"이라는 사람은 친근하게까지 느껴진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나를 슬프게 하고, 애석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런 일은 내가 정말 늙었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노화의 징후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다. 요즘 나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또 '내가 젊었을 때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종종 농담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바로 알아들은 척한다.) 영화나 연극을 두번째로 보러갔는데, 생전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 얼마 전에 처음 봤는데도 말이다. <피플> 잡지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 두뇌 용량이 다 찬 게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 반대가 사실임을 인정할 때가 된 것 같다. 내 머리는 텅텅 비어가는 중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중, 13~14 페이지)


솔직담백하다 못해 스스로에게 시니컬하기까지 한 그녀의 고백은 수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만큼,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큼 뛰어나지 못하고 훌륭하지 못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애석해하고, 스스로 농담거리로 만들면서도 그것이 이른바 "자학개그"가 되지 않는 것은, 그녀의 가슴 속 깊이 존재하는 건강한 "자존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아픈 기억이라 할지라도 담담하면서도 위트있게 풀어갈 수 있는 것이죠.





"뉴욕 포스트"의 기자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준 영화 "해리와 샐리를 만났을 때". 로맨틱 코미디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지금 다시 보아도 세대를 막론하고 울고 웃으며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 속 맥 라이언 (샐리) 의 깐깐하고 지극히 주관적이며 고집불통인, 하지만 결코 미워하거나 탓할 수 없는 성격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궁금하시다면 더더욱 노라 에프런의 에세이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샐리"의 캐릭터가 그렇게도 실제적이고 개성만점이었던 것은, 아마도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인물을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으니까요.  


"몽키 바를 그 다음에 방문했을 때 나는 미트 로프를 또 주문했다. (...) 그런데 놀랍게도, 내 미트 로프가 좀 달라져 있었다. (...) 나는 수석 웨이터를 불러 이 변화에 대해 대화를 시작했다. 웨이터는 내 이야기를 정중하게 듣고는, 다른 손님이 버섯 소스는 요리 위에 뿌리지 말고 옆에 두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바꾸려면 나하고 의논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나는 상냥하게, 아주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나야말로 소스를 항상 요리 옆에 뿌리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지만, 이 미트 로프만큼은 소스를 위에 뿌리는 게 맞는다고 말해주었다. 웨이터는 나의 제안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내 사랑 미트 로프" 중, 129~130 페이지)





그녀가 표현하고 있는 자신과,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적어도 자신에게는) 거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생각하기보다는 충실하게 자신의 감정과 맞서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려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노라 에프런의 인생 역시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처럼 참 다사다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부모님이었지만 노후에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자식들에게 큰 짐이 되는가 하면, 몇 번의 결혼실패는 그녀가 꿈꿔왔던 "아름다운 판타지의 세계"를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에서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야심차게 준비한 영화가 무너져내렸을 때의 좌절 역시 당사자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인생도 계속된다. (...) 그래도 실패작은 거기 남아있다. 지난 삶의 역사 속에, 난폭하고 강력한 힘을 빨아들이는 자기장을 거느린 블랙홀처럼." ("실패작" 중, 151 페이지)


하지만 그녀가 여느 실패한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결국은 실패를 뒤로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실패가 마음 한구석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할지라도 그녀는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다시 도전합니다. 그렇다고 좌절한 것을 부정하거나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괴로워하고 충분히 불평한 후에야 조금씩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런 면이 우리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커플"로 등극한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가 다시 만나 화제가 되었던 영화 "유브 갓 메일 (You've got Mail)".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에프런의 상상력을 다시한번 자극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금 그녀 특유의 "판타지에 기반한 애정"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녀 자신은 자신이 나이가 들어 더이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졌다고 푸념하곤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불평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브 갓 메일"의 주제가 된 이메일이 하나의 예죠. "유브 갓 메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에세이 "이메일의 여섯 단계"를 읽으면서 계속 피식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착하고 애틋한 주인공들의 모습에 더해지는 그녀의 애교스러운 불평불만은 정말 매력적인 조미료가 될 것이니까요. 아무런 배경 없이 에세이만 읽는다면 매사에 불평불만을 던지는 여성의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노라 에프런의 작품 속 여주인공들을 잘 알고 있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헝클어진 머리로 불만을 토로하는 맥 라이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약이며 고통을 잊게 될 거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출산할 때 듣는 상투어이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 낳을 때의 고통을 잊어버린다고들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그 고통을 기억한다. 진짜 잊어버리는 건 사랑이다." ("이혼" 중, 172 페이지)


남들보다 예민하고 남들보다 감성적인 그녀였기에, 그만큼 인생에서의, 사랑에서의 좌절은 더욱 더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가 겪은 일이 쓰디 쓴만큼 그녀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더욱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을 한 것일지도 모르고요.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우리에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노라 에프런은 더이상 세상에 없지만, 그녀가 남긴 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은 오랜 시간동안 그녀를 기억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파란만장하게 거침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늙고 고집스러워진 모습에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풍자하는 어투로 삶에 대해 이야기한 그녀의 에세이집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그녀가 남긴 마지막 이야기에 우리는 다시금 웃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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