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별
최문정 지음 / 다차원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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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가 지나고 난 어느 날서부턴가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10대 후반 정도 되었을 때였던 것 같은데, 진부한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무엇보다도 자연스럽지 못한 캐릭터 설정이라던가 억지스러운 상황에 빠져들지 못하게 되자 지루해졌던 것 같아요. 20대에 들어서면서는 거기에다가 허접한 회의주의자(?)가 되어버린 바람에 드라마나 예능과는 더더욱 멀어지게 되었죠. 이제 20대를 마무리 하는 지금, 예능은 가끔 보고 즐기기도 하지만 드라마와는 아직까지도 친하지 않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의 별"은 저에게 있어서 몇 십 년 만에 제대로 본 드라마 한 편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SBS 주말 드라마 "바보엄마"의 작가 최문정 씨의 신작소설인 "아빠와 별"은 "바보엄마"와 마찬가지로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 그리우면서도 상처를 줄 수 있는 예민한 관계,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것이 주목할만한데요, "바보엄마"에서 삼 대에 걸친 모녀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아빠의 별"에서는 결코 가까워지지 못했던 부녀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등장인물과 복잡한 관계도가 그려지지만 소설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중심인물은 바로 군인 출신의 아버지와 프리마 발레리나, 수민입니다.

 

 

 

 

 

 

서로 먼 길을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217-218 페이지)

 

작가가 소설에서 인용한 초등학생의 "아빠는 왜?"라는 시입니다 (이 시가 인용된 것인지 창작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읽은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오더라구요. 너무도 어린아이다운, 솔직한 발상이 씁쓸하기까지 했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아직까지도 아이들은 아빠보다는 엄마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직장에 출퇴근 하는 아버지라면 서로 생활리듬이 같지 않아 몇 날 며칠을 같은 집에 살면서 마주치지 않을 때도 있고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뭔가 "무언의 끈끈한" 관계라고 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크면 클 수록 점점 아빠와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저 역시 그 때부터 아빠와는 자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방학 때 잠깐 한국에 들어올 때 같은 집에서 식사하고는 했지만, 매 년 올 수도 없었고 언제나 바쁘신 아빠의 스케쥴 덕분에, 함께 놀러간다거나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은 무리였으니까요. 그렇게 15년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아빠와 저 사이에도 표현하기 어려운 벽이 생긴 것 같아요. 장애물 개념의 벽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통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빠의 마음에는 아직도 열세 살 어리기만 한 딸 같은데 현실에서는 어느새 20대 후반에 접어든 주부가 되어있으니까요^^

 

 

수민과 그녀의 아버지 사이는 하지만 이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너무 닮은 두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일까요? 인생의 가장 큰 상처이자 그리움인 "어머니 (아내)" 를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었던 둘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 견디어내기 위해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사람은 한없이 따뜻해질 수도, 한없이 잔혹해질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였던 수민은 아버지가 아들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멀어 몸이 아픈 엄마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오열합니다. 이미 두 딸이 있었음에도 불구, 셋째 아이를 가지게 했기 때문이죠. 어린 수민을 상대로 아버지 역시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쳐버리게 됩니다. 네 시험을 따라가느라고, 추운 데서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느라고, 그래서 아이가 죽은 것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모두가 패자일 수 밖에 없는 부녀의 싸움은 외가 식구들이 등장하면서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남 부러울 것 없던 부잣집 딸이었던 수민의 어머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을 한 탓에 자신의 가족과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못하던 상태였기 때문이죠. 애지중지 키운 딸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비보를 접한 외가 친척과 수민 그리고 아버지의 격정으로 얼룩진 사랑하는 어머니의 장례식은 마음 속 깊숙이 자리잡은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분노를 쏟아낸 만큼 자신이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자신만큼이나 무능력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을 알기에 결국은 서로에게 계속하여 상처만 주게 되는 관계로 전락해버린 것이죠.

 

 

언제나 뛰어났던 수민과는 달리 여동생 수지는 말 그대로 "평범한 주부"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다가 교사가 되어 중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평범한 회사원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죠.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도 그야말로 "평범"해서 좋을 때는 좋았다가도 한번 나빠지면 서로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곤 합니다. 수민과 수지가 대조를 이루는 또 한가지는 원치 않는 혼전임신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수민에 반해 남편과 자신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들어서지 않는 아이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으며 불임치료를 받는 수지의 모습입니다. 자매는 이렇듯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합니다. 자신의 문제가 워낙 크게 생각되다보니 자신과는 너무 다른 환경에 있는 상대방의 걱정은 우습게만 보이죠. 세상에서 가장 아픈 병이 "내가 걸린 병"이고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내가 당한 일"이라고 했던가요.

그런 면에서 이 두 자매는 결국 화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감옥보다 심한 끔찍한 환경에 지칠대로 지친 수민이 이혼을 결심하고 그 사실을 털어놓자 수지가 소리칩니다.

 

"언니, 그딴 게 이혼 사유가 된다고 생각해? 뭐? 자신이 점점 초라해진다고? 결혼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다른 여자들도 다 그렇게 살아. 하루가 멀다 하고 남편이 바람피워도 모른 척 혼자 삭이고 넘어가. 주구장창 때려? 그럼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면서 살아. 시댁에서 구박한다고? 친정 식구랑도 지지고 볶고 싸우는데 남남 사이에 당연한거 아니야? […] 그런 여자들 다 이혼하면 이 세상에서 결혼이란 제도는 벌써 사라졌어.

그 여자들은 언니보다 못난 인간이라서, 그런 대접 받아도 싼 인간이라서 참고 사는 줄 알아?" (356-357 페이지)

 

수지의 말을 듣다 보면 수민의 고민 따위는 호강에 초를 친 소리처럼 들리기 마련입니다. 프리마돈나의 연봉 정도는 용돈으로 줄 만큼 부자인 시댁에 평생 돈 걱정 하지 않고 살 수 있고, 시댁 식구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무시 당하기 일쑤지만 그거야 이쪽에서도 무시하면 그만이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수지의 발언은 얼핏 들으면 지혜롭고 논리적으로 들릴 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보자면 "나도 이렇게 고생하고 사니 언니 역시 그런 고생을 견디는 수 밖에는 없어!" 라는 어린아이 같은 보상심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더 커보이기 때문에 남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수지가 이렇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그것은 툭하면 자신의 가족까지 걸고 넘어지는 시어머니 때문입니다.

 

"수지가 은근슬쩍 수민이 이혼 얘기를 꺼냈다가 시어머니한테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들었나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부터 시작해서 우리 집 가정교육까지 물고 늘어졌던 모양이야." (367 페이지)

 

동생은 자신의 걱정보다 언니의 걱정을 가볍게 여겨 함부로 논리를 논하고, 언니의 선택은 동생의 가정평화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리고 어떠한 선택도 결코 자유롭지 않은 관계. 그것이 가족의 이름일까요.

 

 

 

 

아버지조차도 언제나 우러러볼 수 밖에 없던 자랑스러운 수민의 결혼, 그리고 이혼은 그들 모두에게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지만, 그고통은 "신이"라는 한 아이로 승화되는 듯 싶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흔히 "사랑의 열매"라고 부르곤 하죠. 하지만 반 쪽의 열매인 신이는 태어나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렵고 꺼리게 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아빠의 별"의 결말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과정들이 결국 먼 길을 돌아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다시 돌아오게 된 세 부녀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항상 가까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극적인 계기를 통해서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관계. 그리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유치해도, 어설퍼도, 억지스러워도 해피엔딩

 

수민은 드라마가 싫었다. 음모, 오해, 그 모든 것들로 시작되는 비극, 그게 싫었다. 음모를 파헤쳐 해결하고 오해를 깨닫고 화해하는 결말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스럽고 험난한 과정의 여운은 해피엔딩을 즐길 수 없게 만들었다.

칼을 맞았던 자리는 칼을 뽑아내면 더 많은 피를 토해낸다. 상처가 아물어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흉터는 그 자리에 남아 날카롭던 칼날의 흔적을 되새겨준다. 그래서 가끔은 억지스럽고 때로는 유치한 해피엔딩이 오히려 더 싫었다. 차라리 완벽하게 처절한 새드엔딩이 좋았다.

하지만 어쩌면 유치해도, 조금은 어설퍼도, 간혹 억지스러워도 아버지와는 해피엔딩이고 싶었다. (456-457 페이지)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 중 하나입니다.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감동이 가시지 않는 새드엔딩이 낫다고 저 역시 생각하고는 했거든요. 선택과목으로 듣던 "연출론" 수업에서도 교수님은 항상 "주인공들을 충분히 괴롭히고 그들을 곤경이나 비극에 처하도록 두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들이 흥미롭지 못한 것이다" 라고 강조하시곤 했죠. 다소 극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스스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을 겪어가고 있다면, 더이상 앞으로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때는 정말 "유치하거나 어설퍼도" 간절하게 해피엔딩을 소망하게 되지 않을까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솔직한 수민의 고백이 참 와닿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빠의 별"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사실 수민과 수지 그리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로운 시작이며 출발점이 되겠죠. 새로운 환경과 회복된 가족 그리고 새로운 구성원 신이와 함께.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커다란 굴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그들 각자의 인생이, 이제는 마치 흰 도화지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새로운 도약을 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드라마 같았던 독서 산책

 

초반에 한 번 언급했듯 "아빠의 별"을 읽은 후 한 편의 드라마를 본 느낌이었습니다. 잘은 몰라도 최소한의 시나리오 작업만 거치고도 드라마로 만들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드라마에 최적화 된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격 드라마 소설" 이라고 할까요? 그런만큼 몰입도 쉽고 가독성도 좋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들도 있었는데요.

가장 아쉬웠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극명하게 갈린 편과 선입견을 그대로 반향하는 캐릭터들이었습니다. 재벌들은 하나같이 서민들을 무시하고 사람 취급 하지 않으며 예술가들은 까다롭기 그지 없고,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미워하고 구박하는가 하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어 양면이 존재하는 법인데 지나치게 희극화 된 상황과 캐릭터들에 의해 전형적인 흑백논리로 마감된 것은 아닌가 아쉬움이 남네요. 물론 안방극장에서 흑백논리를 사랑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상황에 쉽게 몰입하고 감정이입할 수 있는 요소일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소설에서도 조금 더 많은 레이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마치 "스토리에 꼭 필요한 상황"만 모아 스토리를 더 극으로 치닫게 하는 극적 요소들을 강조한 것은 마치 "나 악역이야. 내가 악역이라고 말했나? 나 진짜 독한 악역이야" 라고 말하는 듯 오히려 그 신빙성을 약하게 하는 설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고,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아빠의 별"은 누구든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가족이라는 감성적 주제를 논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또한 드라마에 익숙하고 선호하는 독자라면 조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 이후 꽤 오래간만에 읽었던 소설이라 하나의 쉼표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답니다. "바보엄마"의 성공처럼 "아빠의 별"도 안방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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