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기억
티나 바예스 지음, 김정하 옮김 / 삐삐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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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인 잔은 앞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랑많고 화목한 그의 가족에게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죠. 아직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 어쩌면 그래서 좀 더 감정에 솔직하고 꾸밈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 <나무의 기억>은 이런 잔의 시선으로 따라가보는 가슴시린 이야기입니다. 


정체를 알지 못하는 막연한 어두움과 두려움. 하지만 그것을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잔은 있는 힘껏 주어진 시간동안 할아버지와 알차게 시간을 보내기로 합니다. 할아버지는 잔의 이름에 o를 더한 '조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을 손자, 손녀가 물려받는 일이 흔하지만 웬일인지 잔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주지 않고 o자를 뺐어요. 이 o자는 소설 전반에 걸쳐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잔은 때로 투정을 부리고, 때로는 악몽을 꾸고, 때로는 행복한 시간을 할아버지와 함께 보냅니다. 챕터에 따라 시간이 이리저리 뛰기 때문에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될 것 같은데도 오히려 입체적인 꿈처럼 선명해져갑니다. 조안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고,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할머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모님은 두 분을 잔의 집으로 모시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기억의 장소였던 본가 집도 정리하게 됩니다. 슬픈 것은 할아버지도, 집안 식구들 모두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멈추거나 늦출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할아버지는 "마지막에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치매를 정의합니다. 이 말은 잔이 그 무엇보다도 듣고싶지 않았던 말이었고요. 


소설을 관통하는 또 한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할아버지의 버드나무 이야기에요. 초반부터 언급되지만 후반에 가서야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마저도 파편처럼 이어지기 때문에 점점 파편이 되어가는 할아버지의 기억처럼 아련하고 몽환적으로 느껴져요. 결국 할아버지는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언젠가는 자신마저 기억하지 못하게 되겠지만 소설은 한 가지 희망을 남겨놓습니다. 나 자신조차 날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기억해준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죠. 잔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기억할테니까요. 


꿈을 꾸는 것처럼 읽어내려갔던 소설입니다. 먹먹하고 아련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면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치매로 인한 온 가족의 슬픔을 열 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왼쪽 아래 원(아마도 소설 속 o를 뜻하는 거겠죠)이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가를 반복합니다. 마지막 기억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할아버지의 마음처럼요. 여러모로 오래 간직하고 싶은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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