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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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남자가, 자신을 관찰하는 전지적 작가의 목소리를 어느날 갑자기 듣게 되면서 겪는 곤경 

을  그린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그 목소리가 말하는 것이 일종 

의 스토리라고 여긴 주인공이 문학 전공 교수를 찾아가 상담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 교수는 주 

인공이 듣는 목소리가 어떤 작가인지 알아내고자 일종의 테스트 문항을 만들어내는데, 그렇게해 

서 작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목소리가 말하는 스토리의 성격도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 

문이다.  

 자, 우리도 한 번 이같은 테스트를 해보자. 

 Q. 백수급 편의점 알바생.                                               
    A. 박민규? 틀렸다. 

 Q. 반지하방이나 옥탑방에 살고 있다.                             
    A. 김애란? 땡. 

 Q. 뭔가 나서기만 하면 비가 오는 날들의 이야기.                
    A. 부코스키, 아니 한재호? 노. 

 Q. 쿨한 유머같은 이야기들. 뼈가 있는 듯도 하지만 싸이 미니홈피들을 랜덤타기 하다가 어디선가 본듯한 대화들. 인물의 갑작스런 죽음.       

    A. 뭐야 이거, 번역소설이었어? 하루키? 

 
 아니, 아니다. 다 틀렸다. 사실은 문진영. 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자이다.  

어떤 작품에 어떤 상을 주어야하는지에 대한 기준의 옳고 그름은 던져두자. 그저 위의 테스트 문 

항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소설계는 또 한 명의 개성없는 소설가를 탄생시켰다는 말로 충분하니까.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비롯하여, 어떤 한 세대를 부르는 명칭들에는 그 궁극적인 목적이 숨겨져  

있다. 그 명칭이 궁극적으로는 그 세대를 부를 수 있는 효용의 가치를 잃고 다른 명칭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운동성을 그 세대에 부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88만원 세대'는 "88만원"이 어떤  

한 "세대"의 가치관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자극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그때 '88'이라는 자리에  

그 어떤 숫자이든 또 다른 숫자들이 대체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88만원 세대'라는 명찰에는, 어차피 100만원도 안되는 돈을 받느니 그냥 대학 휴학하고  

편의점 알바를 하라는 뜻이 있거나, "쐐-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습관"처럼 살라는 뜻이 들어있 

는 것이 아닐게다. 그런데도 최근 쏟아지는 우리의 젊은 소설들에서는 왜 그 이상의 세계는 없는  

걸까? 왜 88만원 세대라는 명칭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 들이는 걸까? "울 필요가 없다"는 극히 개 

인적이고도 개인적인 자각이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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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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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태어난 땅에 특별한 애착이 없는 나이지만, 모국어가 내 육체적 욕망의 한 부분을 그렇게나 크게 차지하고 있을줄은 몰랐다. 한국을 떠나온지 3개월여 쯤. 나는 거의 미칠듯 모국어로 된 책을 읽고 싶었고, 그러다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다른 사람(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의 책을 뻔뻔하게 돌려주지 않은 채 아껴가며 조금씩 조금씩 읽었다. 그 책이 <여행의 기술>이었고, 그렇게 알게 된 알랭 드 보통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때의 분위기상 내게 약간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귀국 후 맞은 바쁘고도 지겨운 일상속에서 알랭 드 보통은 어느새 잊혀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내 생일에 가까운 후배가 <행복의 건축>을 선물했고 그렇게 다시 알랭 드 보통은 필연인 듯 다가왔다. 모국어로 쓰인 것이라면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로서의 불리한(?) 조건을 벗고 만난 알랭 드 보통은 더욱 놀라웠다. 에세이 방식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다양하게 수집한 자료들의 방대함에도 놀랐고, 그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배치한 능력에도 놀랐으며, 그 자료들을 하나로 꿰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야 마는 예술적 감각과 통찰력에도 놀랐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의 다른 책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야 말았다. 소위 "가벼움"을 표방한 퓨전 식의 그 어떤 장르도 거부하는 내게 알랭 드 보통은 그 금기를 조금은 넘어도 괜찮지 않냐고 말을 건넨 최초의 작가인 셈이다. 
 세 번째. 삼고초려라는 말도 있듯 어떤 대상을 알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비유되는 숫자. 이번엔 거의 신간인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직접 구입해서 알랭 드 보통을 만났다. 물론, 일말의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생겨나고 있던 작가에 대한 믿음과 공항에 대한 막연하다고 할 정도의 설렘을 가진 난 어느새 책을 사고 말았는데....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자본이 어떻게 예술과 미적인 것을 탐구하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지배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보여주는 끔찍한 책이다. 오죽했으면, "정말 이 책을 작가가 출간하려 했을까, 혹시 그냥 히드로 공항의 무료 홍보 책자로 발간된 것을 작가의 인기에 영합해서 출판사가(난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다.) 무리하게 판권을 산 뒤 국내 출판을 강행?"이란 생각까지 했을까. 그러나 이건... 진짜.. 책이다. 아마존에서도 팔리고 있고, 작가의 홈페이지에도 버젓이 있더라... 흠...
 7쪽에 달하는 다소 장황한 집필에 대한 변명은 일단 접어두자. 또, 자신의 "고용주"인 브리티시에어라인 사장을 만난 부분의 "용비어천가"도 정말정말 힘들지만 또 접어두자. (사실 그러고나면 책 내용이 얼마 남지도 않지만...) 일주일동안 히드로 공항의 터미널 No.5에서 작가가 한 일이라고는, 소피텔 호텔의 클럽 샌드위치를 작살낸 것, 애프터 버너라는 칵테일을 처 마신 것, 자판기에서 애새끼들마냥 과일맛 하드를 사 처먹은 것, VIP 라운지 식당에서 브리오슈를 바닥에 깐 포르치니 버섯 한 접시를 배불리 처먹고 시계풀 열매 셔벗과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까지 시켜 먹은 것 뿐이다. 아, 하나 일같은 일을 했긴 했다. 공항에서 헤어지는 어떤 연인을 보고 사진기자와 "병력"을 나누어 탑승 게이트 너머까지 뒤쫒아 간 일. 

 작가는, 공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들을 때깔나고 담아보고도 싶었겠지만 자본이 제한한 장소와 시기 앞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가지고 있었던 거 맞는거죠?) 예리함은 그 공간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고 만다. 
 기내식을 만드는 공간을 보고나서 "(기내식을 먹는) 누구도 그 음식을 만든 리투아니아 출신의 스물여섯 살 난 루타는 떠올리지도, 그녀에게 감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 작가는 실상 스스로가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VIP라운지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는 운동복 차림의 스물일곱 살짜리 기업가와 욕실을 돌아다니며 국제적 박테리아 군체를 닦아내는 일을 하는 필리핀 청솝의 지위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작가는 애써 그 관계를 외면하고 있다. 

 결국, 주급을 받고 써야 할 것을 써야만 했던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고용주를 만난 시간 즉, "노동조합 대표를 만나는 시간과 에어버스 대표를 만나는 시간"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버린 채 두 손을 들고 있다.   

 이 책을 사면서 <불안>을 같이 샀다. 이거 읽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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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9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9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이 된 남자 - 전6권
제랄드 메사디에 지음, 최경란.최혜란 옮김 / 책세상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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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면서부터 더불어 산 것 중에 중요한 하나가 종교일 것이다. 굳이 종교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 이외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를 항상 남겨두려는 경향이 있다. 이제 그것이 하나의 틀까지 갖추게 되면 흔히 말하는 철학이 될테고, 그것이 전파되어야 할 의무를 갖추게 되면 종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종교는 타인에게 "강요"되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생겨났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기독교는 유일신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강요의 속성이 때로는 기독교인인 내게도(나만?) 거부감을 주곤 한다. 또한, 철학이 가지고 있는 논리를 내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논쟁을 거부하는 양면성도 가지고 있어서 신자들을(또, 나만?) 어리둥절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변명을 하자면 난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도 심사숙고를 해본 일이 없고 또한 심사숙고를 해보라고 가르침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저 성경을 읽어도 일체의 불경스러운 해석을 거부하는 정언명을 접하듯이 무릎꿇고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이다. 만약,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배척을 당해야 하는 각오를 해야 한 채....

 과연, 그렇다면 기독교는 그 자체의 내부에 의문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단 말인가?


 이 책은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내게는 하나의 빛과 같은 책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없길. 예수의 생애(공생애와 그 이후의 삶)를 중심으로 하여 개연과 허구를 균형 있게 갖추고 있는 이 책이 기독교인에게만, 그리고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결국, 종교든 무엇이든 진리를 다루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같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작가가 개연뿐만이 아니라 허구를 갖춘 소설의 방식을 택한 것은 탁월한 방식이라고 본다. 종교를 다른 진리와는 다른, 절대 진리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역시 소용이 없겠지만...

 작가가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사료들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폭이 얼마만큼인지 사실 가늠해보긴 힘들지만, 읽는 동안 내 정신과 몸이 있어야 할 곳에 대해서, 그리고 올바른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끔 해주었던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서 보여 지는 대로 예수 역시 완벽한 사람(또는 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서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사람-신이었다는 것이 가슴을 울린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기독교내에서 받아들여질 때 기독교인 스스로 자신의 종교를 자랑스러워할 단 하나의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종교는 올바른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과정이지, 그 완벽한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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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남은 항상 그렇듯 설레임을 동반한다...?  하,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싶다. 지금 난  밤을 새고 있는 중...

 오늘 하루종일 굵은 비가 오락가락 하고, 내 마음도 하루종일 현해탄을 오락가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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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운전을 하며 듣는 라디오는 온통 지루하고 게다가 신파적이기까지한 사랑들로 넘쳐난다. 대체 정말 사람들은 어디서들 이런 사랑을 나누고, 아파하고, 눈물 짓는 걸까...  그리고 정말 이에 공감한다는 듯한 디제이의 멘트까지... 

 하지만 한강으로 달려갈 것이 아니라면, 자고 일어날때마다 주어지는 그날 하루를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그 속에서 사랑은 너무 쉽게 낡고, 내 마음은 너무 쉽게 지쳐간다. 핸들을 꽉 움켜쥐고, 눈을 시뻘겋게 뜨고, 일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더 먼저 가려고 이리저리 다니다 집에 오면 사랑은 어느새 다 닳아 있기 일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사랑은 그저 신호위반 한 번에 머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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