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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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部> 

 1. 中國槪要

 1) 槪要

 <중국>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중화(中華)사상’에 근거하는 <나라(諸國家)의 중심> 또는 <세계의 중심>을 의미하는 공간적인 개념을 기초로 한 자칭(自稱)이었으며, 특정의 지역을 가리키던 말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中國>이라고 불리고 있는 지역은 지리적으로는 '아시아대륙' 동부에 넓게 퍼져있는 지역과 그리고 본토인 '중국대륙' 거기에다 부수(附隨)하는 크고 작은 섬들이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상기(上記)의 지역에서는 현대 '중국사회'의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민족(漢民族)'을 시작으로 해서 한때 '중국' 전 국토를 지배했던 '몽골' 등과 그 외의 여러 민족들에 의한 왕조(王朝)들의 출현과 멸망 그리고 전란(戰亂)이 반복되어왔다. 그래서 '청대(淸代)'까지의 '중국'에서는 아직 <國家>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天下는 있으되 國家는 없다>라고 할 수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한 국가의 명칭보다는 그 '왕조'들의 이름이 대내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랬던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중국'이 세계적인 주권국가의 체제를 구축, 확립해가던 과정에서 그 <中國>이란 말이 자칭(自稱)적으로 넓게 사용되었으며, 그로써 점차 고유명사적인 성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근대에는 '중국'의 지역과 문명 그리고 그 민족을 넓게 가리키는 용어로서 이용되게 되었고, 또 그 중에 성립했던 <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약칭(略稱)으로서도 이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 지역에서의 기원전(紀元前)부터 계속되었던 문명의 총체(總體)로서도 현재 사용되고 있다.


 2) 古典的用法

 그 '중국'이란 말은 '중국'의 고전 중 하나인 <시경(詩經)>에서 <지리적() 중심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 그 처음이었다. 따라서 본래는 ‘특정의 민족’ 내지는 ‘국가’를 가리켰던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베트남’에서의 완조(阮朝-베트남의 마지막 왕조)가 자국을 '중국(츈콕쿠)'이라고 불렀던 것과 ‘일본’ 또한 자국에 대해서 ‘아시하라(갈대밭) 中國’(토요아시하라-豊葦原-일본국의 미칭으로, 갈대가 풍성하게 자란 들판이란 뜻)이라고 불렀던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한편 '황하(黃河)' 유역에서 '황하문명'을 영위하고 있었던 '한민족(漢民族)'의 사이에서는 그 '중국'이란 말이 '공자(孔子)'와 그 외의 사상가들에 의해 윤색을 거치면서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문화적 우월성을 가진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의미를 띠게 되었고 '중국역대왕조'들의 정치적인 또는 군사적인 경계(境界)를 설정하는 가운데 서서히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경계 짓는 자칭으로서 확장되어 갔다. 그리고 또한 그 <중원(中原)>이란 말도 '황하문명'의 발상지인 '황하'의 중하류(中下流)지역에 넓게 퍼져있는 평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중화(中華)'라든가 혹은 '화하(華夏)'라는 말도 <뛰어난 문화를 가진 자(者-存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민족(漢民族)'들의 사이에서는 그 '中國'과 같은 의미의 자칭으로서 이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에 따른 <중심의 나라에 살고 있는 뛰어난 문화의 담당자>라고 하는 의미의 '中華'에는 지리적(地理的)인 의미가 첨가되었고, 더불어서 <한민족의 아이덴티티>와 <화하문화(華夏文化)의 우월성>이라는 요소(要素)가 공존(共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중화사상'에 대해서는 '中國' 또는 '中華'에 대해서, 그 사방(四方)으로 거주하는 주변 민족들은 미개인(未開人)으로 대치(對置-置簿)되었다. 그리하여 '한민족(漢民族)'은 주변 민족들을 '이적(夷狄-북방 오랑캐)'이라거나 '동이(東夷-동쪽나라 백성들 또는 동쪽 오랑캐)' 또는 '서융(西戎-서쪽 변방 이민족)' '남만(南蠻-남쪽 오랑캐)' 등으로 부르면서 야만(野蠻)으로 간주해서 업신여겨왔던 것이다.

 거기에 병행해서 '중국역대왕조'들은 <자신들만이 인류 중 유일한 국가이며, 그 이외는 중화세계에 있어서의 변경()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그랬으므로 또 그들과 대등한 관계의 외교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로 또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는 모두 '조공(朝貢)'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또 역으로 말하자면, 미개인(夷狄)의 왕(王)이 '중원'을 정복해서 '중국'에 동화(同化)되고, 그렇게 해서 '중국'의 황제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대표적인 예로는 <5胡 16國 시대>의 제국들이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북조(北朝)'가 그 전형(典型)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遼)'와 '금(金)' 그리고 '원(元)'과 '청(淸)' 그 '4왕조'는 결국 '한민족(漢民族)'을 지배해서 '중화제국(中華帝國)'의 계통에 속하는 왕조를 만들었지만, 그런 한편 자민족의 문화도 계속해서 유지해서 그 '한민족'에 대해서는 '정복왕조'로서 자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자 또 '한민족'이 직면했던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송학(宋學)'에서는 <화이질서(華夷秩序)>란 것이 강조되기도 했다.


 3) 近代的用法

 '중국'은 '청대(淸代)' 후반,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근대화를 이룩했던 '구미제국(歐美諸國)'들이 압도적인 국력을 앞세우며 자국(自國)으로까지 파급되어오자, 그때서야 그들 나라들과 대등한 일원(一員)으로서 '국제사회'에 동참할 필요를 느꼈다. (自己의 再定義)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치러졌던 1842년의 '아편전쟁'에서 '청조(淸朝)'가 패배함에 따라서 '영국'과의 조약을 맺게 되었고(南京條約), 그러자 또 바로 그 자리에서 주권국가로서의 근대적인 개념으로의 자국 명칭을 '중국(中國)'이라고 한문으로 사용했던 것이 그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네르친스크조약'에서는 '청조'의 외교사신(外交使臣)이 스스로의 신분을 칭했을 때, 그 '중국(中國)'이라는 용어를 '만주어(滿洲語)'로 사용했다. 그리고 또한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근대적인 '국민국가(國民國家)형성'을 목표로 해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성립한 다음에는 '중국(中國)' 또는 '중화(中華)'란 말은 곧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각(各) 국호(國號)가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중국' 또는 '중화'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었던 <한민족의 아이덴티티>라는 요소는 이제 <다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요소로 재구성되었고, 그리하여 또 그 결과, 다민족의 구성원이 주체가 되어서 건설한 <중국문화의 우월성>이란 것만이 공통분모로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때에 <그 소유자>라고 하는 의미의 '화인(華人)' 또는 '화교(華僑)'라는 호칭도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한민족' 이외에도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고, 또 그 수(數)는 또 <중화인민공화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만도 55개나 된다. 그래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서는 '한민족'을 포함한 그 모든 민족을 모두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4) 中國의 人口

 '중국'의 총 인구 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성립당시 전국적으로 5억 4,167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해서 1996년에는 8억 671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던 '중국정부'는 70년대부터 '계획출산'을 실행했고, 이어서 지속적으로 '인구증가억제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또 2007년 말 현재 '중국대륙부'의 인구는 13억 2,129만 명이며, 그것은 또 세계인구의 약 1/5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래서 '중국'은 세계최고의 인구다수국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은 인구밀도가 꽤 높은 나라 중 하나이며, 1㎢ 당 평균인구밀도는 134명이다. 그리고 또 특히 '동부연해지구(東部沿海地區)'에는 인구가 밀집해서, 1㎢ 당 인구밀도는 400명을 웃돌고 있으며, 중부(中部)지구도 1㎢ 당 200명. 그러나 서부고원지구(西部高原地區)에서는 1㎢ 당 10명 이하로, 그 전체의 분포(分布)는 언밸런스 되고 있다. 그리고 또 민족 면(民族面)에서도 56개의 민족이 있어 '한민족'을 제외한 55개의 민족은 '소수민족'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2007년 말>의 중국인구에 대한 개요는 아래와 같다. (단위 : 萬 名)


 총인구 132129
 도시지역 59379
 농촌지역 72750
 남성 68048
 여성

 64081

 0-14 세

 25660

15-59 세

 91129
 60세 이상 15340



 

 1. 宋學
 중국 송나라 때에 체계화된 유교철학이며, 한(漢)나라와 당나라 때의 훈고학이 고증에 치중했던데 반하여 송학은 독자적인 입장에서 경전을 해석하고, 또 도교와 불교 사상까지도 모두 포용했던 우주관, 역사관, 인간관을 형성하였으며, 철학적인 사색을 통하여 인성과 우주의 관계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2. 난징조약
1842년에, 아편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서 난징에서 영국과 청나라가 맺었던 조약.
청나라가 영국에 대하여 홍콩의 할양과 광저우, 상하이 등 다섯 항구의 개항, 그리고 배상금의 지급 등을 수락한다고 했던 불평등 조약으로, 중국 반식민지화의 발단이 된 사건이었다.


 3. 네르친스크(Nerchinsk) 條約
1689년에 네르친스크에서 청나라와 러시아가 체결했던 국경 확정 조약.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으로 국경을 정했다.


 4.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에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혁명.
10월에 우창(武昌)에서 봉기하여, 그 이듬해 1월에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혁명 세력이 약한 탓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총통에 취임하여 군벌 정치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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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의 글들은 <현 부정 정부>를 비판하고
대한민국이 바르게 발전하길 기원한다는 의미로

쓰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므로 이런 글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나
현 정부를 옹호하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기를 바라며

그런 사람이 이 글을 보더라도 상기의 상황을 알고

조용히 떠나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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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의
적은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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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二 部

 


 

 

 


<Union Flag>

 

 

 

 第 一 章

 

 "오전에 한번 다녀갔었습니다만!"

 그러자 일단 <닥터 에드>가 이렇게 먼저 말을 했었다.

 그러자 <찰리>가 여전히 밝지 못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아, 내가 항상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보다시피 조수(助手)도 한명도 없고, 그 외 여러 가지 공무(公務)가 많기 때문에..."
 "네..."
 "음,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아, 지사(知士)가 불러서 갔다 왔네! 근데 왜?..."
 "네, 서류에 서명을 받을 것이 있어서요!"
 "아, 그런가?"
 "네!"

 그러자 <닥터 에드>가 이렇게 답을 하고는 그 서류를 꺼냈다. 그러자 또 <찰리>가 몸이 무거운 듯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서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봉투와 내용물을 분리해서 마치 <체스>의 말처럼 늘어놓고는 도장과 볼펜을 꺼냈다.

 하지만 <닥터 에드>가 봤을 때, 그것은 거의 사무적인 태도나 모습으로 보였고, 그래서 진지하게 보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또 <닥터 에드>가 생각했을 때, 그는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닥터 에드>는 그런 <찰리>의 모습을 보면서 <찰리>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찰리>가 심사를 다 끝냈던지 서류에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 Q Fortnum >

 이것이 그의 서명(署名)이었는데, 그리고는 <찰리>가 이렇게 말을 했었다.

 "천(千) 페소(peso)야! 그리고 이 Q자(字)에 대해서는 묻지를 말아주게, 비밀로 하고 있으니까!"
 "네!"

 그리고 <닥터 에드>가 천(千) 페소(peso)를 지불했을 때, 그는 영수증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닥터 에드>는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찰리>가 이렇게 말을 했었다.

 "지금 내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데, 왜 그런지 알겠는가?"
 "혹시, 술을 드셨습니까?"
 "아니, 바로 이 신경질 나는 기후(氣候) 때문일세! 이 더움과 이 습도(濕度) 때문에 말이야! 그런데도 우리 아버지는 왜 이런 곳에서 사시다 가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남부(南部)에 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아니,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아!"
 "그러시면, 다른 곳으로 옮겨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 늦었네! 내 나이 벌써 내년이면 육십 하나야! 그러니 61세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나이란 이야기지! 그런데 혹시, 아스피린 같은 거 가지고 있나?"
 "네, 드릴까요?"
 "응!"
 "그럼 물은?"
 "아니야 됐네! 나는 그런 것은 씹어서 먹는다네. 그게 효과가 더 빨리 오거든!"

 그러자 <닥터 에드>가 가방에서 아스피린 하나를 꺼내서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또 <찰리>가 그것을 씹어서 먹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을 했었다.

 "맛이 나쁘지 않습니까?"
 "괜찮아, 습관이 돼서! 그렇게 말을 해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나는 이 물맛이 더 안 좋아!"
 "네..."
 "그나저나, 아아... 오늘은 정말로 기분이 별로군?"
 "혈압(血壓)을 한번 재보시죠?"
 "왜?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드는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연세가 드신 분들은 자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죠!"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네?"
 "그보다 사는 것이 더 문제야!"
 "혹시, 과로(過勞)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뭐, 꼭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새로 온 대사(大使)가 시끄러운 이야기를 자꾸 해대니까 말이야..."
 "네? 어떤 이야기를?..."
 "아, 이 지방의 <마테 차(茶)> 산업(産業)에 대해서 보고를 하라는 둥... 뭐, 그런 이야기지!"
 "네..."
 "그런데 자네, 우리 고국(故國)에서 그 <마테 차(茶)>를 마시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조차도 없네! 그런데도 나는 그 덜컹거리는 길을 1주일이나 돌아다니면서 그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할 판이야! 하지만 그들은 내가 2년마다 신차(新車) 1대를 수입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둥 트집을 잡는데, 하지만 그것은 나의 권리가 아닌가?! 그러니까 그것은 외교관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인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도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수입하고,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것인데, 그래서 또 그것은 당연히 나 개인의 문제인데도 대사(大使)가 그것을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는 것이지! 그리고 또 내가 그 <마테 차(茶)>의 조사를 위해서 나의 그 <포트남의 프라이드(pride) 호(號)>를 타고 돌아다니는데, 그러나 나는 그에 드는 비용은 단 한 푼도 청구를 하지 않아! 그것은 또 순전히 그 사람들 때문에 하는 일인데도 말이야? 그러니 그 사람들은 완전히 쩨쩨하고 치사한 작자들이란 말인 것이지! 거기다 또 그들은 이 집에서 집세가 얼마나 나가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단 말인 것이지!"

 그러자 <닥터 에드>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왕진가방을 열었다.

 그러자 또 <찰리>가 갑자기 하던 말을 끊고 이렇게 말을 했었다.

 "뭐하려고 그러나?"

 그러자 <닥터 에드>가 혈압을 재는 기구를 꺼내서 이렇게 말을 했었다.

 "네, 아무래도 혈압을 한번 재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또 <찰리>가 수긍을 하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을 했었다.

 "음, 그렇다면 아무래도 침실 쪽이 좋겠지?"
 "네? 왜요?"
 "응, 여긴 하녀(下女)가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그 애는 완전히 밥맛이야! 그래서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당장에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질걸?"
 "네?"
 "아, 내가 곧 죽게 될 거라고 말이야! 그렇게 되면 청구서(請求書)들이 마구 날아들 것이고! 아무튼, 침실로 가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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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二 部

 


 

 

 


<Union Flag>

 

 

 

 第 一 章

 

 하지만 <닥터 에드>는 <찰리>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또 그로부터 약 1, 2개월쯤 후에 그는 영국(英國) 영사(領事)의 서명(署名)을 받아야 할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사(領事)를 만나 보려고 했지만 최초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또 그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하고 넘어가면, 그러니까 그날 오전 11시경에 <닥터 에드>는 영사관(領事館)에 도착했다. 그러자 그때 영사관(領事館)의 유니언잭(Union Jack)은 <차코>로부터 불어왔던 무덥고 건조했던 바람에 매우 위태롭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그날 왜 국기를 걸어두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했다. 하지만 잠시 후에야 그는 그날이 바로 <세계 제1차 대전>의 <휴전(休戰) 기념일(1918년 11월 11일)>이란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그는 그 국기를 다시 한 번 더 쳐다보면서 영사관(領事館)의 벨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은 열리지 않고, 안에서 누군가가 그가 누구인지를 확인이라도 하는 양, 밖을 엿보는 구멍으로 커다란 검은 눈알이 하나 나타났다. 그러자 그는 그 눈알이 <영사(領事)의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가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게 자세를 바로 하고 그 앞에 똑바로 섰다. 하지만 잠시 후, 문을 열었던 사람은 영사(領事)가 아니었고, 아주 큰 코를 가졌던 조그마한 체구의 흑인 여자아이였다. 그리고는 그 크고 맑았던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봤을 때 그 눈은 마치 상대로부터 썩은 고기의 일점(一點)이라도 노리는 듯했던 육식조(肉食鳥) 같이 예리하게 집중하는 듯했던 눈이었다.

 

 그러자 아무튼, 그는 아주 인상적인 그 흑인 여자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영사(領事)가 계신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 흑인 여자아이는 영사(領事)는 부재(不在) 중이라고 하면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조금 실망이 되었지만, 그러나 또 영사(領事)가 없다고 하는데 다른 말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곳을 떠났고, 그렇게 해서 그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사(領事)의 서명을 꼭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하고는 잠시 쉬었다가 빈민지구의 환자를 보러 가던 길에 다시 그곳에 들렀다. 그런데 또 그때, 그는 그 흑인 여자아이가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뜻밖에도 문을 열어주었던 사람은 바로 <찰리 포트남>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깜짝 놀랐을 정도였는데, 그러나 또 그때는 <찰리>가 말했던 그 <우울했던 또는 슬펐던 때>였는지는 몰랐어도, 어쨌든 앞에 술에 취해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찰리>는 <닥터 에드>를 무언가 경계하는 듯한 태도로 맞이했다.

 

 그러자 또 그는 아마도 <찰리>가 그 전의 그런 유쾌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그를 만났던 기억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어떤 꺼림의 느낌이 발동을 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방어적인 자세가 되었던 것인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먼저 아는 척을 해주는 것이 아랫사람으로서의 도리라든가,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는 먼저 인사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찰리>는 그날의 기억은 물론이었고, 그의 존재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대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찰리>는 그때서야 약간 생각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나 끝까지 완전히 기억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닥터 험프리즈>를 알고 있고, 그날 <닥터 에드>가 <찰리>를 그곳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에서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지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래서 <닥터 에드>는 <찰리>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두운 복도에 문이 세 개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음식 냄새가 났던 것으로 보아서 식당인 것 같았으며, 그리고 그 두 번째는 침실로 생각되었는데, 그러나 마지막 문은 굳게 닫혀있어 무슨 용도의 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찰리>는 그를 그 세 번째의 방으로 데려갔고,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 방 안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서류를 정리해 둔 선반이 하나 있었으며, 그 옆에는 금고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또 벽에는 금이 간 유리로 덮였던 <안니고니(Pietro Annigoni-1910.6.7일부터 1988.10.28.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1956년에 Queen Elizabeth II의 초상화를 그렸음)>의 여왕(女王) 복제초상을 넣은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없이 단지 <아르헨티나 차(茶)> 광고가 붙은 탁상(卓上) 캘린더 하나만 덜렁 놓여있었을 뿐이었다.

 

 

 

 

 

 

<안니고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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