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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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部>
1. 中國槪要
1) 槪要
<중국>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중화(中華)사상’에 근거하는 <나라(諸國家)의 중심> 또는 <세계의 중심>을 의미하는 공간적인 개념을 기초로 한 자칭(自稱)이었으며, 특정의 지역을 가리키던 말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中國>이라고 불리고 있는 지역은 지리적으로는 '아시아대륙' 동부에 넓게 퍼져있는 지역과 그리고 본토인 '중국대륙' 거기에다 부수(附隨)하는 크고 작은 섬들이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상기(上記)의 지역에서는 현대 '중국사회'의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민족(漢民族)'을 시작으로 해서 한때 '중국' 전 국토를 지배했던 '몽골' 등과 그 외의 여러 민족들에 의한 왕조(王朝)들의 출현과 멸망 그리고 전란(戰亂)이 반복되어왔다. 그래서 '청대(淸代)'까지의 '중국'에서는 아직 <國家>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天下는 있으되 國家는 없다>라고 할 수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한 국가의 명칭보다는 그 '왕조'들의 이름이 대내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랬던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중국'이 세계적인 주권국가의 체제를 구축, 확립해가던 과정에서 그 <中國>이란 말이 자칭(自稱)적으로 넓게 사용되었으며, 그로써 점차 고유명사적인 성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근대에는 '중국'의 지역과 문명 그리고 그 민족을 넓게 가리키는 용어로서 이용되게 되었고, 또 그 중에 성립했던 <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약칭(略稱)으로서도 이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 지역에서의 기원전(紀元前)부터 계속되었던 문명의 총체(總體)로서도 현재 사용되고 있다.
2) 古典的用法
그 '중국'이란 말은 '중국'의 고전 중 하나인 <시경(詩經)>에서 <지리적(인) 중심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 그 처음이었다. 따라서 본래는 ‘특정의 민족’ 내지는 ‘국가’를 가리켰던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베트남’에서의 완조(阮朝-베트남의 마지막 왕조)가 자국을 '중국(츈콕쿠)'이라고 불렀던 것과 ‘일본’ 또한 자국에 대해서 ‘아시하라(갈대밭) 中國’(토요아시하라-豊葦原-일본국의 미칭으로, 갈대가 풍성하게 자란 들판이란 뜻)이라고 불렀던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한편 '황하(黃河)' 유역에서 '황하문명'을 영위하고 있었던 '한민족(漢民族)'의 사이에서는 그 '중국'이란 말이 '공자(孔子)'와 그 외의 사상가들에 의해 윤색을 거치면서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문화적 우월성을 가진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의미를 띠게 되었고 '중국역대왕조'들의 정치적인 또는 군사적인 경계(境界)를 설정하는 가운데 서서히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경계 짓는 자칭으로서 확장되어 갔다. 그리고 또한 그 <중원(中原)>이란 말도 '황하문명'의 발상지인 '황하'의 중하류(中下流)지역에 넓게 퍼져있는 평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중화(中華)'라든가 혹은 '화하(華夏)'라는 말도 <뛰어난 문화를 가진 자(者-存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민족(漢民族)'들의 사이에서는 그 '中國'과 같은 의미의 자칭으로서 이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에 따른 <중심의 나라에 살고 있는 뛰어난 문화의 담당자>라고 하는 의미의 '中華'에는 지리적(地理的)인 의미가 첨가되었고, 더불어서 <한민족의 아이덴티티>와 <화하문화(華夏文化)의 우월성>이라는 요소(要素)가 공존(共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중화사상'에 대해서는 '中國' 또는 '中華'에 대해서, 그 사방(四方)으로 거주하는 주변 민족들은 미개인(未開人)으로 대치(對置-置簿)되었다. 그리하여 '한민족(漢民族)'은 주변 민족들을 '이적(夷狄-북방 오랑캐)'이라거나 '동이(東夷-동쪽나라 백성들 또는 동쪽 오랑캐)' 또는 '서융(西戎-서쪽 변방 이민족)' '남만(南蠻-남쪽 오랑캐)' 등으로 부르면서 야만(野蠻)으로 간주해서 업신여겨왔던 것이다.
거기에 병행해서 '중국역대왕조'들은 <자신들만이 인류 중 유일한 국가이며, 그 이외는 중화세계에 있어서의 변경(방)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그랬으므로 또 그들과 대등한 관계의 외교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로 또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는 모두 '조공(朝貢)'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또 역으로 말하자면, 미개인(夷狄)의 왕(王)이 '중원'을 정복해서 '중국'에 동화(同化)되고, 그렇게 해서 '중국'의 황제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대표적인 예로는 <5胡 16國 시대>의 제국들이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북조(北朝)'가 그 전형(典型)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遼)'와 '금(金)' 그리고 '원(元)'과 '청(淸)' 그 '4왕조'는 결국 '한민족(漢民族)'을 지배해서 '중화제국(中華帝國)'의 계통에 속하는 왕조를 만들었지만, 그런 한편 자민족의 문화도 계속해서 유지해서 그 '한민족'에 대해서는 '정복왕조'로서 자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자 또 '한민족'이 직면했던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송학(宋學)'에서는 <화이질서(華夷秩序)>란 것이 강조되기도 했다.
3) 近代的用法
'중국'은 '청대(淸代)' 후반,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근대화를 이룩했던 '구미제국(歐美諸國)'들이 압도적인 국력을 앞세우며 자국(自國)으로까지 파급되어오자, 그때서야 그들 나라들과 대등한 일원(一員)으로서 '국제사회'에 동참할 필요를 느꼈다. (自己의 再定義)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치러졌던 1842년의 '아편전쟁'에서 '청조(淸朝)'가 패배함에 따라서 '영국'과의 조약을 맺게 되었고(南京條約), 그러자 또 바로 그 자리에서 주권국가로서의 근대적인 개념으로의 자국 명칭을 '중국(中國)'이라고 한문으로 사용했던 것이 그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네르친스크조약'에서는 '청조'의 외교사신(外交使臣)이 스스로의 신분을 칭했을 때, 그 '중국(中國)'이라는 용어를 '만주어(滿洲語)'로 사용했다. 그리고 또한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근대적인 '국민국가(國民國家)형성'을 목표로 해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성립한 다음에는 '중국(中國)' 또는 '중화(中華)'란 말은 곧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각(各) 국호(國號)가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중국' 또는 '중화'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었던 <한민족의 아이덴티티>라는 요소는 이제 <다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요소로 재구성되었고, 그리하여 또 그 결과, 다민족의 구성원이 주체가 되어서 건설한 <중국문화의 우월성>이란 것만이 공통분모로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때에 <그 소유자>라고 하는 의미의 '화인(華人)' 또는 '화교(華僑)'라는 호칭도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한민족' 이외에도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고, 또 그 수(數)는 또 <중화인민공화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만도 55개나 된다. 그래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서는 '한민족'을 포함한 그 모든 민족을 모두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4) 中國의 人口
'중국'의 총 인구 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성립당시 전국적으로 5억 4,167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해서 1996년에는 8억 671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던 '중국정부'는 70년대부터 '계획출산'을 실행했고, 이어서 지속적으로 '인구증가억제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또 2007년 말 현재 '중국대륙부'의 인구는 13억 2,129만 명이며, 그것은 또 세계인구의 약 1/5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래서 '중국'은 세계최고의 인구다수국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은 인구밀도가 꽤 높은 나라 중 하나이며, 1㎢ 당 평균인구밀도는 134명이다. 그리고 또 특히 '동부연해지구(東部沿海地區)'에는 인구가 밀집해서, 1㎢ 당 인구밀도는 400명을 웃돌고 있으며, 중부(中部)지구도 1㎢ 당 200명. 그러나 서부고원지구(西部高原地區)에서는 1㎢ 당 10명 이하로, 그 전체의 분포(分布)는 언밸런스 되고 있다. 그리고 또 민족 면(民族面)에서도 56개의 민족이 있어 '한민족'을 제외한 55개의 민족은 '소수민족'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2007년 말>의 중국인구에 대한 개요는 아래와 같다. (단위 : 萬 名)
| 총인구 | 132129 | | 도시지역 | 59379 | | 농촌지역 | 72750 | | 남성 | 68048 | | 여성 | 64081 | | 0-14 세 | 25660 | 15-59 세 | 91129 | | 60세 이상 | 15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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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宋學 |
| 중국 송나라 때에 체계화된 유교철학이며, 한(漢)나라와 당나라 때의 훈고학이 고증에 치중했던데 반하여 송학은 독자적인 입장에서 경전을 해석하고, 또 도교와 불교 사상까지도 모두 포용했던 우주관, 역사관, 인간관을 형성하였으며, 철학적인 사색을 통하여 인성과 우주의 관계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
| 2. 난징조약 |
1842년에, 아편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서 난징에서 영국과 청나라가 맺었던 조약. 청나라가 영국에 대하여 홍콩의 할양과 광저우, 상하이 등 다섯 항구의 개항, 그리고 배상금의 지급 등을 수락한다고 했던 불평등 조약으로, 중국 반식민지화의 발단이 된 사건이었다. |
| 3. 네르친스크(Nerchinsk) 條約 |
1689년에 네르친스크에서 청나라와 러시아가 체결했던 국경 확정 조약.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으로 국경을 정했다. |
| 4. 신해혁명(辛亥革命) |
1911년에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혁명. 10월에 우창(武昌)에서 봉기하여, 그 이듬해 1월에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혁명 세력이 약한 탓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총통에 취임하여 군벌 정치를 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