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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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그리고 또 아래는 위의 설명에 대한 보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편의상, 번호를 붙임.


 2. 1945년(昭和20年) 8월 24일 오후 5시가 넘어서, 22일 밤 10시에 오오미나토(大湊)를 출항(出航)했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총 4.730t, 全長 114.79m, 航海速度 14노트, 全速 17.95노트)가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하기 위해서 그 앞 바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는 255명의 해군(海軍)들과, 조선인(朝鮮人) 3.735명이 승선(乘船)해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증언 등에 의하면, 그보다 훨씬 많았던 사람들, 즉 4000명 또는 6000명 또는 8000명하고도, 수백(數百) 명 정도가 승선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배(浮島丸)는 화객선(貨客船)이었기 때문에 정원(定員)이 860명이었다. 그랬는데도 그 배에는 정원의 10배나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선저(船底)에서부터 갑판(甲板)까지 꽉 들어차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무게 때문에라도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더욱 속도를 내지 못하고 천천히 그 만(灣)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또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그 선내(船內)의 객실(客室)들은 해군(海軍)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조선인(朝鮮人) 노동자들은 탄약고(彈藥庫)와 기관실(機關室) 사이의 중갑판(中甲板)과 선창(船倉)에 밀어 넣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배의 밑바닥에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양의 자갈이 적재되어있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또 나머지 조선인(朝鮮人)들은 그 자갈 위에다 깔았던 나무판자 위에도 많이 밀어 넣어져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때, 같이 승선해있었던 한 병사(長谷川)는, 자신은 6000에서 8000명 정도가 그 배에 승선(乘船)해있었다고 들었다고 하면서, 정부의 발표에 대해서 의아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세이칸연락선(靑函連絡船)의 대체(代替)로 운행(運行)했을 때, 선저(船底)에는 사람이 없었던 상태로 4000명 정도가 승선(乘船)해있었으며, 오오미나토(大湊)에서 태웠던 조선인(朝鮮人)들은 공간이 없어서 선저(船底)까지 쑤셔 넣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최소 4000명 이상, 총 6000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을 했던 사람(齊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마이즈루(舞鶴) 만구(灣口)는 좁아서, 그 폭이 1킬로미터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다 특히 그날은 입항(入港)하는 함선(艦船)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앞에는 두 척(隻)의 해방함(海防艦)이 입항(入港)을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고 하며, 그 항적(航跡)을 따라서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항구로 천천히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승조원(乗組員)들 중에서, 그 만내(灣內)의 지리(地理)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고, 거기다 해도(海圖)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또 패전(敗戰) 시(時)에 전부 소각시켜버렸던 때문이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들은 기뢰(機雷)가 어디에 얼마나 부설(敷設)되어 있었던 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고, 단지 가지고 있던 일반보통지도만으로 짐작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위험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또 그들은 앞서갔던 그 해방함(海防艦)의 뒤만 따라서 갔을 뿐이었지만, 그리고 또 당시, 그 해방함(海防艦)이란 것도 천 톤도 되지 않았던 소형(小型)의 연안경비용(沿岸警備用) 해군함선(海軍艦船)이었고, 그런데다 또, 좁고, 몹시 붐비던 장소였기 때문에,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매우 느린 속도로 항구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때, 목격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시속(時速) 약 10킬로에서 15킬로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아무튼,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그렇게 바쿠치미사키(博奕岬-舞鶴灣口)로 들어와서, 토시마(戶島)를 정면(正面)으로 보면서 전진(前進)했고, 그런 다음 산본마츠하나(三本松鼻-또는 산본마츠바나)와 요코나미하나(橫波鼻-또는 요코나미바나)를 지났을 때, 왼쪽으로 진로(進路)를 꺾어서, 히가시마이즈루항(東舞鶴港)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또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한 승조원(乗組員)의 증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마이즈루(舞鶴)에 입항했을 때, 우리는 그 마이즈루(舞鶴) 항만(港灣)을 관리하고 있었던 마이즈루해방대(舞鶴防備隊)와 수기(手旗)로 연락(連絡)을 취했고, 그래서 앞의 그 해방함(海防艦) 두 척(隻)이 무사히 입항(入港)했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는 입항(入港)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때 조타(操舵)를 맡지 않고, 다른 수병(水兵)이 그것을 맡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배의 속도는 너무 느렸고, 엔진들도 거의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거의 타성(惰性)으로 운항(運航)을 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함교(艦橋)에서 정찰을 하던 수병(水兵)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만약에 기뢰(機雷)가 바다 위에 떠있었다면, 분명히 그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런 부유(浮遊)기뢰(機雷)가 발견되면, 배에서 기총소사(機銃掃射)해서 그것을 폭발시켰던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長浜五森-해상보안학교 위치도>

 



 그런데 또 당시, 그 수기(手旗)로 연락을 취했다던 곳은, 현재의 해상보안학교(海上保安學校)의 자리에 있었던 본청(本廳) 나가하마이즈모리(長浜五森)에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기(手旗)를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그래서 또 추측해보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 그 수기(手旗)를 받았을 때는,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폭침(爆沈)하기 바로 직전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 근처에 마이즈루방비대송신소(舞鶴防備隊送信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곳은 지금도 자위대(自衛隊)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곳이며, 그래서 또 그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원인 모를 사고로 폭발하고 말았고, 그리고는 400미터 정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후, 카라스지마(烏島) 285도(度) 1080미터 지점(地點)에서 침몰했는데, 그때의 시간은 오후 5시 20분 또는 15분경이었고, 수심(水深)은 18미터였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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